우린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89화. 의심

sophie97
2026.07.31Vues 28
또다시 긴 비행 끝에
파리에 도착했다.
줄리앙은 언제나처럼 환한 미소로
나를 맞아주었고,
우리는 그의 차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힘들었죠?
가방도 이리 줘요."
줄리의 말을 듣는 순간,
예전에 미겔이 했던 행동이 떠올랐다.
"풉..."
"왜 웃어요? 가방 이리 줘요.
어깨가 무거우면 몸이 더 피곤해요."
"예전에 미겔이
한국 남자들은 여자 가방을 들어준다는 걸
배웠다면서,
내 가방을 달라고 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 때 생각이 나서...
가방은 괜찮아요.
난 남자들이 여자 가방 들고 다니는 거 별루에요."
"어? 미겔이 플러팅 한 거였네...
계속 미겔 카페 가서 작업해도 괜찮은 거에요?"
줄리앙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의 미소는 늘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아파트 근처에 있는 호텔로 예약해 놨어요.
그리로 가서 좀 쉬어요.
많이 피곤해 보여요."
"아...그 생각은 못 했어요.
미리 챙겼어야 했는데...미안해요.
내 일까지 이렇게 맡겨 버려서요...
부모님은 언제 봬요?"
"뭐가 그리 급해요?
가서 좀 쉬어요.
저녁쯤 내가 호텔로 갈께요.
부모님은 지인분들과 약속이 있으셔서 나가셨어요.
사실 파리에 오실 때미다
나보러 오신다고는 하시는데,
지인들도 만나시고 여행도 다니시느라
나보다 더 바쁘신 거 같아요."
줄리앙은 체크인까지 대신 해 주고
룸까지 데려다주었다.
"쉬고 있어요. 이따 6시쯤 올께요.
참, 그리고 이거.
정아씨 배고플까 봐
샌드위치랑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 왔어요.
씻고 배고프면 먹어요.
이따 저녁은 나랑 같이 먹구요."
"...고마워요..."
나는 그의 세심한 배려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샤워를 마친 뒤,
그가 건네 준 샌드위치와 커피로 허기를 달래고는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어느새 오후 5시가 넘어 있었다.
서둘러서 외출 준비를 했다.
6시가 되기 5분 전 쯤,
노크 소리에 문을 열었다.
줄리앙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좀 쉬었어요?
아까보다는 덜 피곤해 보이네요."
"훨씬 나아요.
나갈까요?"
"우리 집으로 가도 괜찮아요?
편하게 이야기할 곳을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집이 가장 좋을 것 같아서요.
가는 길에 저녁은 포장해서 가요."
"좋아요.
그런데 줄리, 무슨 일 있어요?"
줄리앙의 얼굴에서 불안함이 느껴졌다.
"아니요. 무슨 일은요...
부모님께 요즘 잔소리를 많이 듣다 보니
피곤해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어요."
그는 말을 끝내고, 힘없이 피식 웃었다.
그의 집에 도착하자,
그는 저녁 식사로 포장해 온 스시를
접시에 옮겨 담았다.
공항에서 만났을 때와는 달리
말수도 적었고,
어딘가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우리는 식탁에 마주 앉았다.
그는 평소처럼 젓가락과 냅킨,
물잔까지 말없이 하나하나 챙겨 주었다.
훈지씨를 보고 온 죄책감 때문인지
나는 그에게서 뭔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식사를 마치고,
줄리앙은 저녁이니 따뜻한 차를 마시는 게 좋겠다며
캐모마일 차를 타서 내 앞에 놓아 주었다.
나는 말없이 그의 행동의 지켜 봤고,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그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당신의 전 남자친구...혹시 박훈지라는 배우에요?"
나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말문이 막혀
그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는 재촉하지 않고
내가 대답하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서야
나는 입을 뗐다.
"어떻게... 알았어요?
"예전에 나랑 같이 있을 때
그 사람한테 전화가 온 적이 있었잖아요.
정아씨가 그 사람 이름 부르는 걸 들었어요.
그 때 이름이 조금 특이해서 기억에 남더라구요.
정아씨가 한국에 있다는 전화 받고 나서
한국 사이트에서 그 배우가 촬영하다가 다쳤다는
기사를 우연히 봤어요.
생각해 보니 정아씨가 한국에 갔던 시기와
그 배우가 다쳤다는 시점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더라구요.
나와 통화할 때 무슨 일인지 끝내 말하지 않고
얼버무린 것도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자꾸 의심이 들어서...
사실은... 어제 정아씨가 나한테 전화했던 번호로
다시 걸어봤어요.
그러면 안 되는 줄 알았지만...미안해요."
"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덮는다면..
당신도 그렇게 해줄 수 있어요?" <90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