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TE CACHÉE : Carte cachée

ESPER : Médium [04]

윤기, 호석, 그리고 여주. 저녁을 먹고 학교 뒷문에서 만나 통제 구역 S-2까지 가는 길이 전보다 멀게 느껴졌다.

호석은 처음 와 보는 이 길이 어색하고 신기한지 연신 주위를 둘러보느라 바빴고,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에어팟을 끼고 있는 윤기는 그냥 걸음이 늦었다.

그런 그 둘을 신경쓰며 덩달아 늦게 걷던 여주가 우뚝, 발을 멈췄다. 갑자기 멈춘 여주 때문에 여주의 등과 부딪힐 뻔한 호석도 깜짝이야. 짧은 외마디를 내뱉으며 자리에 멈췄다.

김여주

"기회는 지금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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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석

"…응?"

김여주

"도망가요. 정부가 모르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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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윤기

"……."

여주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바닥에 시선 고정을 한 채 말했다. 상황과 맞지 않는 소리를 하는 여주를 보며 호석과 윤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김여주

"한 번 가디언이 되면, 다시 나갈 방법은 죽는 것밖에 없어요.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도망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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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석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지금 순찰하러 가는 거 아니었어? 그리고 우리 아직 통성명도 안 했는데…."

김여주

"지금 도망가지 않으면 기회는 없어요."

바닥에 향했던 여주의 시선이 호석과 윤기에게 향했다. 윤기는 아무 말 없이 여주의 눈을 마주봤다. 여러 감정이 담겨있을 줄 알았던 눈동자 속엔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다.

굳이 예측해 보자면… 후회랄까. 그래, 후회. 무미건조한 눈동자 속엔 후회만이 자리 잡았다.

김여주

"여기 순찰은 제가 할 테니까, 두 분은 그냥 아무것도 건들지 말고 빨리,"

카악– 카악–

여주의 말을 끊고, 뒤에서 여러 짐승의 경계어린 소리가 들렸다. 느낌이 좋지 않아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언제 이렇게 빨리 온 건지 모를 하이에나들이 몰려있었다.

입가에 핏물을 뚝뚝 흘리는 것을 보니 이미 피해자가 있는 듯 했다. 최소 중상, 최대 사망. 아니, 시체가 없을 수도 있겠다.

아직 저것들이 월타인지 볼타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여주는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에 섣불리 공격할 수도 없었다.

인상을 찌푸리곤 어떻게 윤기와 호석이 모르게 저것들을 없앨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점점 하이에나들이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가운데에 있는 가장 큰 하이에나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크게 한 번 울음소리를 내니, 주변에 있던 다른 하이에나들도 그 하이에나를 따라서 울었다. 그리고,

김여주

"…아. 시발."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저 하이에나의 능력은 속박인가…. 이렇게 발이 묶인 후에야 알게 됐다. 저건, 볼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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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윤기

"정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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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석

"…안 돼. 밤이라 빛이 없어."

저들이 볼타라는 걸 눈치챈 것인지 윤기와 호석 또한 자기들끼리 상의를 했다. 윤기는 주변을 시끄럽게 울리는 하이에나들에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으며 자신의 앞에 있는 여주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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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윤기

"야."

김여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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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윤기

"이봐."

김여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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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윤기

"어이, 김여주."

김여주

"네, 네?"

혼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중이라 다른 소리는 듣지 못한 여주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김여주라는 이름은 어디서 알아냈을까,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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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윤기

"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거 다 말해."

김여주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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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윤기

"가디언이잖아. 어떻게든 이 상황 빠져나가려는 거 아니야? 빨리 지금 네가 생각하고 있는 거 말해. 뭘 하든 도움 될 테니까."

김여주

"……."

그래. 지금은 능력을 숨기는 데에 급급하면 안 된다. 볼타들도 없애야 하고, 나머지 순찰도 해야 하고, 피해자가 없는지 찾아봐야 한다.

이 고민을 하는 순간에도 이미 하이에나들은 세 사람을 둘러싼 채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더는, 시간이 없다.

김여주

"…일단 하이에나들을 잡아야 해요. 그리고… 피해자가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저것들 입에 피가 많이 묻은 걸 보니까 최소 중상, 최대 사망일 거예요."

김여주

"얼른 상태를 확인해야 하는데… 이렇게 있다가는 우리도, 피해자도 무사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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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석

"여주, 니 능력은 뭔데?"

김여주

"……지금은, 알려드릴 수 없어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왜 알려주지 않냐고 질문이 돌아올 것 같았으나, 그와 비슷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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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윤기

"알겠어. 그럼 저것들만 없애면 되는 거지? 난 또, 저것들 살려둬야 하는 줄 알았네."

김여주

"…네?"

…깜빡 잊고 있었다. 저 둘도 S클래스 에스퍼다. 순식간에 세 사람을 중심으로 바닥이 얼었고, 하이에나의 몸을 동상처럼 얼렸다.

하이에나의 눈동자는 여전히 붉었지만, 움직이지 않던 몸은 이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이미… 죽은 것 같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멍때리며 자리에 서 있으니, 뒤에 서 있던 윤기가 어깨 위에 손을 툭 얹었다. 마주보는 얼굴은 차가운 한기와 달리 장난기가 다분했다.

"안타깝네. 앞으로 죽을 때까지 보겠어."

아. 말려들었다.

통제 구역 S-2는 온통 밀밭으로 가득했다. 여주의 눈높이를 훌쩍 넘는 높이에 시야가 가려졌지만, 그에 굴복하면 가디언이 아니었다.

김여주

"피해자가 한 명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잘 찾아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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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석

"이렇게 셋이 몰려다니는 건 비효율적일 것 같은데, 각자 찾으러 다닐까?"

김여주

"아뇨. 그래도 위험해요. 저는 혼자 찾으러 갈게요. 두 분은 같이 다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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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석

"너야말로 위험하지. 아까처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

두 사람에게서 등을 돌려 당장이라도 혼자 가려고 하니, 호석이 그런 여주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여주가 뿌리치면 쉽게 나가떨어질 수 있는 정도, 딱 그 정도였다.

호석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한몸에 받는 여주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호석을 바라봤다.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니, 처음이었다.

김여주

"…괜찮아요. 지금껏 혼자 다녔고, 그게 익숙해요. 아까 전해준 인이어 잘 갖고 있죠? 피해자 찾는대로 그걸로 연락해요."

호석의 눈을 계속 보고 있자니, 속이 이상했다. 울렁거렸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기분에 얼른 여주는 호석의 손을 잡아뺐다.

김여주

"그럼, 좀 있다 봅시다. 두 분."

이대로 시간을 지체하다간 중상을 입은 피해자도 사망까지 이를 수 있다. 여주는 발을 바쁘게 움직였다.

10분 동안 주변을 수색했는데도 머리카락 하나 찾지 못했다. 피해자가 없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렇다면 하이에나의 입에 피가 잔뜩 묻어있을 리도 없었다.

군데군데 있던 가시에 얼굴과 몸을 긁히며 밀을 헤쳐나가고 있을 때쯤, 저 바닥에 군화로 보이는 신발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오늘 군인들이 수색한다는 말은 없었던 것 같은데…. 불길한 예감에 여주는 으득, 이를 갈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김여주

"…저기요. 정신 좀 차려봐요. 저기요."

예상대로 군화 옆에는 군인이 쓰러져 있었고, 그의 상태는 심각했다. 어깨와 허리, 다리를 집중적으로 물어뜯긴 건지 옷이며 살이며 지저분하게 긁혀있었다.

김여주

"…아아. 들리면 답하지 말고 그냥 들어요. 아까 저희가 헤어졌던 곳에서 동쪽 방향으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피해자 한 명 발견했습니다."

김여주

"피해자는 군인으로 보이고, 상처는… 어깨와 허리, 다리 부분이 심각합니다. 서준 선배한테 GEC 불러달라고 말 좀 전해주세요."

무전을 전한 여주는 인이어에서 손을 뗐다. 지금 이 상황에 서준 선배한테 직접 연락을 넣을 시간은 없었다. 서준 선배는 왜 하필 오늘 오프인 건지…. 일이 두 배가 됐다.

여주는 사람들 몰래 허리에 묶어두었던 흰 천을 풀어 길게 찢었다. 항상 부상 입을 것을 대비해 가지고 다니는, 일종의 습관이었다.

김여주

"이걸로는 지혈이 다 안 되겠는……."

그때, 어디선가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 마리가 아니고 두 마리. 몸을 바닥에 숙여 최대한 의식을 잃은 군인을 보호했다. 주위를 한 번 쭉 훑어본 그 순간,

카학–!!!

하얀 송곳니를 드러낸 하이에나가 달려들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달려든 하이에나를, 여주는 피하지 않았다. 여전히 자리에서 몸을 숙인 상태로 하이에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파스스–

달려들던 하이에나가 사라지고, 하이에나가 있던 자리에는 잿빛을 띄는 가루만 흩날렸다.

김여주

"후…."

하이에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여주는 다시 몸을 돌려 천으로 군인의 다리를 감쌌다. 그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누가 봤다면 하이에나 같은 건 이 자리에 원래 없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무리에서 한 마리가 빠져나왔나 보네. 방금까지만 해도 있었던 하이에나를 떠올리며 여주는 이번 순찰은 꼼꼼히 해야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쏴아아–

밤바람이 불어 밀이 한쪽으로 흔들렸다. 이제 다른 피해자를 찾아가 보려 무심하게 고개를 든 여주는 바로 앞에 보이는 인물에 우뚝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김… 여주?"

호석이…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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