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온 뒤, 한동안은 다들 말이 없었다.
단이가 분주히 오가며 범규의 상처에 새 약을 발라주었고, 여주의 발목에도 다시 붕대가 감겼다.
해가 중천에 오를 때까지, 네 사람은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숨을 골랐다.
여주는 방 안에 홀로 앉아, 지난 며칠의 일들을 되짚었다.
범규를 처음 만난 날부터 오늘까지, 모든 순간이 결국 이 자리로 이어지기 위한 길이었던 것만 같았다.
*
이윽고 김유형이 먼저 안채로 사람을 불러 모았다.
"…이제는, 미뤄둔 이야기를 나눌 때가 된 것 같네."
범규는 무릎을 꿇은 채 앉았다.
"…지난 십 년, 어찌 지냈는지 듣고 싶네."
김유형의 조용한 물음에, 범규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화마 속에서 어머니를 잃고, 저는 근처 절에서 숨어 지내던 노스님께 거두어졌습니다. 그곳에서 검술과 글을 익히며 자랐습니다."
"매일 밤, 언젠가 반드시 진실을 밝히고 부모님의 이름을 되찾겠다는 다짐 하나로 버텼습니다."
"어린 나이에…… 혼자서 그 원한을 짊어졌겠구나."
김유형의 목소리에 짙은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
"성인이 되고 나서는, 저처럼 조승학에게 가문을 잃은 이들을 하나둘 만나게 되었습니다. 태현이라는 벗도 그중 하나입니다. 옛 최가 가솔의 자손이지요. 우리는 함께 조승학의 죄를 증명할 물증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다 그자의 잔당을 쫓던 중 크게 다쳐, 이 마을 어귀까지 흘러들게 된 것입니다."
여주는 그제야, 그가 처음 마당에 쓰러져 있던 그날의 이야기가 완성되는 것을 느꼈다.
우연이라 여겼던 그 만남이, 실은 십 년 세월이 만들어낸 필연이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럼, 기억을 잃은 척했던 것도, 처음부터 다 계획이었던 거예요?"
"처음엔 그저 신분을 숨기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엔, 이 집을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습니다."
여주의 얼굴이 붉어졌다.
김유형은 한참을 듣고만 있다가, 이윽고 바닥에 두 손을 짚었다.
"…내가 사죄해야 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일세."
"어르신……"
"최 대감이 억울하게 죽어가는 걸 알고도 침묵했던 것도, 자네인 줄 알고도 두려움에 내쫓았던 것도, 전부 내 잘못일세. 자네의 십 년도, 어쩌면 내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어."
범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원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고개 숙여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부인 역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네. 그리고…… 늦었지만, 고맙네. 여주를 살려줘서."
곁에서 지켜보던 여주도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아버지, 저도…… 그동안 너무 원망만 해서 죄송해요."
"아니다. 네 덕분에, 이 아비가 겨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거란다."
김유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래된 함 하나를 가져왔다.
함 속에는 빛바랜 서찰 두 통이 들어 있었다.
"십 년간 품고만 있던 밀서일세. 조승학이 직접 지시를 내린 물증이지."
범규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이걸…… 이제야 제게."
"진작 내밀었어야 했네. 그리고 이것만으론 부족할 걸세. 낙향하며 데려온 사병들도 함께 내어주겠네. 한양으로 가서, 조승학을 완전히 무너뜨리게."
"…어르신."
"이번엔, 나도 함께 싸우겠네. 더 이상 두려움 뒤에 숨지 않을 것이야."
"…감사합니다. 이 은혜, 반드시 갚겠습니다."
"은혜라 할 것 없네. 애초에 자네 몫이었던 것을, 이제야 돌려주는 것뿐이야."
김유형은 밀서를 범규의 두 손에 직접 쥐여주었다.
"태현이라는 그 벗과, 자네를 따르는 이들을 모두 불러 모으게. 한양까지 가는 길, 내 사병들이 함께할 걸세."
여주는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다, 문득 범규와 눈이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서로의 눈빛에 담긴 마음만은 분명했다.
이제 정말로, 끝을 향해 나아갈 시간이었다.
"…반드시 돌아오세요."
여주의 나직한 말에, 범규는 처음으로 편안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겠습니다. 이번엔 약속드리지요."
김유형과 부인도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오랜만에, 이 집 안에 웃음소리가 감돌았다.
*
그날 밤, 범규는 태현을 비롯한 동료들에게 소식을 전할 서찰을 써 내려갔다.
한양으로 향할 채비가, 그렇게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붓끝을 놀리는 그의 옆얼굴에는, 오랜만에 보는 단단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