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바투 범규] 아리도록

외전 1화. 그가 삼킨 이름

범규시점

 

 

횃불이 삼면을 에워쌌다.

범규는 태현과 등을 맞댄 채, 좁혀오는 인기척의 수를 가늠했다.

 

조승학의 사병들이 이 산속까지 따라붙을 줄은 몰랐다. 그자의 심복 하나를 미행해 은신처를 캐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며칠 전부터 낌새를 챈 모양이었다.

 

"흩어지세. 한쪽이라도 살아남아야 이걸 조정까지 가져갈 수 있어."

 

태현이 품속의 서찰을 다독이며 낮게 말했다.

 

"자네는?"

"내가 놈들을 끌고 갈 테니, 자넨 저쪽으로."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현이 먼저 몸을 날렸다. 고함과 함께 횃불 절반이 그를 쫓아 방향을 틀었다.

범규는 이를 악물고 반대쪽 능선을 향해 내달렸다.

 

산길은 어두웠고, 발밑은 미끄러웠다.

등 뒤로 화살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옆구리에 칼을 맞은 게 언제였는지, 팔에 화살이 스친 건 또 언제였는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여기서 잡히면, 십 년을 버텨온 모든 게 끝이었다.

부모의 이름도, 태현과 나눠 가진 그 서찰도, 전부.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걸 느끼며, 범규는 마지막 힘을 다해 낡은 당집 앞까지 기어갔다.

거기서 정신을 놓았다.

 

 

 

*

 

 

 

의식은 띄엄띄엄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누군가 그를 흔들어 깨우는 손길, 다급하게 오가는 발소리, 그리고 낯선 목소리들.

 

"아가씨, 가시면 안 됩니다!"

"모르니까 더더욱 그냥 둘 수 없지 않느냐."

 

또렷하진 않았지만, 그 목소리만은 이상하게도 귓가에 오래 남았다.

누군가 그의 몸을 부축해 옮기는 동안, 범규는 흐릿한 시야 너머로 달빛에 비친 옆얼굴 하나를 보았다.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

 

 

 

며칠이었는지, 몇 밤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열에 들뜬 잠에서 문득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촛불 아래 앉은 여인의 옆얼굴이었다.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꿈인가 싶었다. 아니, 꿈이어야만 했다.

십 년이었다. 그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지가.

살아 있었구나.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 왈칵 치밀어 올랐다. 반가움인지 원망인지조차, 스스로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뒤이어 찾아온 건, 뼈저린 두려움이었다.

이 집이 어느 집인지 깨닫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 여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이 조용한 마을이 무엇으로부터 숨어 있는 마을인지, 그 모든 게 한꺼번에 이해가 됐다.

십 년 전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침묵 속에, 이 사람들도 함께 있었다는 걸.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여기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 집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도.

 

조승학의 눈과 귀가 이 마을까지 따라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름을 밝히려던 마음이 도로 움츠러들었다.

살아 돌아왔다고, 반갑다고, 그 한마디조차 지금은 사치였다.

 

그래서 범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굴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 사람이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십 년이 흘러도, 여주의 얼굴선도 단정한 옷차림도 어릴 적 그대로였다. 부유한 양반가의 여식으로 나고 자란 사람은, 세월이 흘러도 그 태가 쉬이 바뀌지 않는 법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저 얼굴을 단번에 알아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반면 자신은 어떤가. 곱게 지어 입던 도포 자락 대신 해지고 피에 전 무명옷을 걸치고, 볕에 그을리고 상처투성이가 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 한때 양반가 자제였던 흔적은, 이제 얼굴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낯빛도, 행색도, 말투마저 이만큼 거칠어졌으니 못 알아보는 게 오히려 당연했다. 그 사실이 야속하면서도, 지금만큼은 다행이었다.

 

오래전 볕 좋던 어느 날의 기억이 문득 스쳤다.

 

"이 담에 크면 정말 낭군 각시 하는 거예요."

 

어린 여주가 배시시 웃으며 옥패 한쪽을 그의 손에 꼭 쥐여주던 그 순간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그 웃음소리를, 그 손의 온기를, 범규는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은, 그날을 까맣게 잊은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여주가 조심스레 다가와 이름을 물었을 때, 범규는 이미 마음을 정한 뒤였다.

 

"…모르겠습니다."

 

거짓말이 이렇게 쉬울 줄은 몰랐다.

동시에, 이렇게 아플 줄도.

 

한마디만 하면 됐다. 저는 최범규입니다, 아가씨의 정혼자였습니다 —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하지만 그 한마디 뒤에 벌어질 일들이 너무 선명하게 그려졌다.

조승학이 이 집 담장 안까지 쫓아 들어오는 모습이, 십 년 전 그날처럼 불타는 마당이, 그 한가운데 서 있을 이 사람의 얼굴이.

 

차라리 이름 없는 나그네로 남는 편이 나았다. 적어도 그렇게는, 이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테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거짓말은 조금씩 다른 무게를 지니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던 그 말이, 어느 순간부터는 이 집에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되어 있었다.

여주 앞에서 실없는 농을 던지고, 삐걱거리는 사립문을 손보고, 처마 밑에서 소나기를 함께 피하는 그 모든 순간이 — 십 년 만에 처음 맛보는,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은 하루였다.

 

기억을 잃은 사내에게는, 지켜야 할 이름도, 갚아야 할 원한도 없었다.

그저 오늘 하루, 이 사람 곁에서 웃을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범규는 스스로에게 놀라곤 했다.

십 년을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만 버텨온 사람이, 이렇게 쉽게 다른 걸 바라게 될 줄은 몰랐다.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은, 그녀가 무심코 옛 기억의 조각을 건드릴 때였다.

북두칠성의 이름을 무심코 입에 담았을 때, 매화를 알아보았을 때, 그녀의 눈에 스치는 옅은 의아함을 볼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옥패를 보여달라며 웃던 그날.

손바닥 위에 놓인 옥패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이거 어디서 나신 거예요?" 하고 되묻던 그 얼굴에는, 정말 아무 기억도 없었다.

 

정말 다 잊은 걸까. 그 여름날의 마당도, 그날의 약속도.

가슴 한쪽이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그녀는 너무 어렸고, 세월은 너무 길었으니까.

 

그래도, 서운함마저 삼켜야 하는 밤은 유독 길었다.

밤마다 담을 넘는 일은, 웃음 뒤에 숨긴 또 다른 얼굴이었다.

 

 

 

*

 

 

 

태현은 살아 있었다. 그날 밤 흩어진 뒤로 근방에 몸을 숨긴 채, 조심스레 연통을 넣어오고 있었다.

 

"조승학 쪽이 이 근방을 훑고 있어. 자네가 이 마을에 있다는 걸 눈치채는 건 시간문제일세."

"…조금만 더 시간을 주게. 아직 몸도 다 낫지 않았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라는 말 뒤에 차마 잇지 못한 말이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은 이 집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태현은 그 말끝의 침묵을 알아챈 듯, 더 캐묻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범규는 그 뒷모습을 보며,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언제까지 이 평온을 붙들고 있을 수 있을까.

언제까지, 저 사람을 속이며 이 집 안에 머물 수 있을까.

답을 알면서도, 그는 매번 하루만 더, 하루만 더를 되뇌었다.

 

그리고 그날 밤, 결국 모든 게 무너졌다.

 

여주가 뒤를 따라왔다는 걸 알았을 때, 범규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었다.

숨어서라도 지켰어야 할 사람을, 정작 자신의 손으로 가장 위험한 곳까지 끌고 들어온 셈이었다.

화살이 그녀의 팔을 스치던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이 사람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정신없이 내달리는 내내, 범규의 머릿속엔 오직 그 한 문장뿐이었다.

품 안에서 흘러내리는 그녀의 온기와, 옷섶을 타고 번지는 뜨거운 피의 감촉이 뒤섞여 분간이 가지 않았다.

집 앞에 다다라 그녀를 조심스레 내려놓는 순간,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다 아물었다 여겼던 상처가 다시 벌어진 모양이었다.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범규는 옷깃 사이로 무언가 스르르 빠져나가는 감촉을 느꼈다.

 

옥패였다.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손끝은 이미 말을 듣지 않았다.

 

안 돼.

 

그 한마디를 삼킨 채, 범규의 시야는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

 

 

 

그날 이후의 일들은, 이미 알려진 대로다.

옥패를 손에 쥔 김유형의 떨림도, 쫓겨나듯 나서야 했던 새벽길도.

다만 그 새벽, 사립문을 나서며 범규가 삼킨 건 이름 하나만이 아니었다.

 

십 년 만에 되찾은 것 같았던 평온도, 감히 이름 붙이지 못했던 그 마음도, 전부 그 문턱 너머에 두고 나와야 했다.

언젠가 떳떳해지는 날, 반드시 다시 뵈러 오겠습니다 — 끝내 삼킨 그 한마디만이, 오래도록 그의 안에 남아 있었다.

 

 

 


 

 

 

ㅎㅎ 외전입니다!!

여주 이미지? 는 민지로 생각해서 이번 화에선 범규 시점이니 만큼 민지 이미지 넣어서 써 봤습니다 ㅎㅎ

범규를 못알아 본 이유나 범규가 이름을 속이고 있던 것들이 잘 이해가 되셨나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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