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riva cromatica

fuga

그냥 왜인지 갑자기 너의 손을 잡고싶었다. 기억조차 뚜렷하게 나지않는 나의 어린시절을, 어둡기만했던 그 동굴속의 한줄기의 빛이 되어준 너의 손을… 그냥 잡고싶었다.

말없이 너의 손을 잡고 탈출구를 향해 걸었다. 너의 손은 차가웠지만, 동시에 따뜻했다. 거칠었지만 부드러웠고, 미안했지만 고마웠다. 그냥 말하고싶었다. 말해주고싶었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잘 버텨주어서 고마웠다고. 하지만, 아직 그 순간이 아니었다.


002: 형. 여긴… 뭐야?


혼란스러워보이는 너의 눈을 나는 마주하지 못했다. 자신이 없었다. 죄책감이 몰려왔다. 자신의 목숨을 위해 형제들을 져버리는 행동을 하길 선택한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누군가는 세상 밖으로 나가야한다. 누군가는 진실을 밝혀야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살고싶었다.


기다리는수밖에. 그렇게 너의 대답을 기다렸다. 몇초 되지않는 순간이 이렇게나 흐르지 않은것은 처음이었다. 목이 메어오는듯한 시간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그닥 많지않았다. 너의 눈은 나의것만큼이나 흔들렸다.


“가자… 같이. 나가자.”


너의 그 대답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손끝이 저리고 화끈거렸다. 나는 문을 열었고, 길을 따라 내려갔다.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그게 내 마지막 기억이다.


일어나보니 호수 근처였다. 피부가 얼듯한 추위였다. 아마 물살에 휩쓸려 나오게 된 것 같다. 저수자로 통했던 길을 따라 나온것이다. 머지않아 네가 일어났고, 우린 근처의 작은 폐건물 벽이 기대어 잠을 청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너의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형, 움직여야할 것 같아…”


우린 수용소에서 멀리 떯어진곳으로 계속 걸었다. 네온싸인이 반짝이는, 소리가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안은 따뜻했다.


‘게임기…?’


그곳엔 수많은 게임머신들이 전원이 켜진채로 돌아가고있었다. 아무도 오지않는 곳에서. 오지않을 누군가를 기다리며. 둘은 따뜻한 건물안에서 서로에게 대화를 청했다.

우린 곧 서로를 부를 이름이 필요하단것을 느꼈지만, 아직 두려웠다. 나의 이름은 누가 지었는지, 어떻게 불렸는지 아는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려웠다. 이름이란것을 다시 찾는것이. 번호에 익숙해져 살던 삶에서 벗어남을 느꼈지만,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마음 한켠의 아픈 기억을 꺼내는듯한 느낌이었다.


“‘은호’. 난 은호야.”


아팠지만 언젠간 겪어야할 일이었다. 나의 이름. 마음이 아픈 동시에 시원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