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엘리베이터 앞에 동민이 먼저 와 있었다.
손에 머그 두 개를 들고.
"…이거."
내밀어진 머그를 보고 잠깐 멍해졌다.
몇 주 전, 똑같은 모양으로 내밀었던 손을 그가 거뒀던 날이 떠올랐다.
"…이번엔 안 빼시네요."
"그땐 빼야 할 것 같아서 뺀 거고, 지금은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동민이 짧게 웃으며 머그를 쥐여 줬다.
손끝이 스쳤다.
예전 같으면 거기서 멈췄을 손이, 이번엔 자연스럽게 깍지를 꼈다.
"…회사 앞인데."
"알아요. 그래도 손은 안 놓을래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둘이 나란히 탄 채 4층 숫자를 올려다봤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는데도, 예전의 그 무거운 침묵과는 완전히 달랐다.
손끝으로 맞닿은 온기가 그 차이를 말해 주고 있었다.
"…어제, 많이 울어서 눈 부었어요."
"…티 나요?"
"조금요. 근데 예뻐요."
얼굴이 화끈거렸다.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손을 놓기 싫어서 일부러 한 걸음 늦게 내렸다.
*
퇴근 시간이 지난 자료실에, 셋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여주, 동민, 운학.
운학이 먼저 어색하게 웃었다.
"…이렇게 셋이 앉은 거, 처음이네요."
"그러네요."
동민은 운학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지난 며칠 그를 오해했던 게 아직 걸리는 눈치였다.
"…그때 자료실에서 본 거, 사실 오해였어요. 미안해요."
"아, 그거요. 괜찮아요. 저도 그때 형 얼굴 보고 좀 웃겼거든요. 질투하는 얼굴이 그렇게 티 나는 줄 몰랐어요."
"…야."
"형이 그런 얼굴 하는 거, 저 처음 봤어요. 평소엔 뭘 물어봐도 무표정이시잖아요."
운학이 장난스럽게 웃자, 동민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지난 며칠의 날 선 질투와 지금의 어색한 사과가 한 사람 얼굴에 겹쳐 보이는 게, 묘하게 다행스러웠다.
"…그보다, 이제 셋이 같이 가는 거 맞죠?"
운학이 분위기를 바꾸며 물었다.
"네. 맞아요."
"다행이네요. 저만 자꾸 형 뒤에서 몰래 움직이는 기분이었거든요."
*
역할을 다시 나누고 있었다.
운학이 앞장서 BND 내부 결재 라인을, 전처럼 눈치 보지 않고 좀 더 정면으로 파야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전면적으로 나가면, 위험한 거 알죠."
여주가 걱정스레 물었다.
"알아요. 근데 어차피 그쪽 눈은 이미 저한테 쏠려 있어요. 차라리 제가 더 눈에 띄게 움직이면, 두 분은 좀 편해질 거예요."
"…그게 왜 운학 씨만 짊어질 일이에요."
"저랑 여주 씨는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맨날 붙어 다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쪽 입장에서도 저 하나가 수상한 거지, 여주 씨까지 엮어서 볼 이유는 없어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말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두 번째 생에선 정반대였다.
동민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숨기고 있던 자신까지 같이 걸렸었다.
그때는 둘이 붙어 있어서 나까지 들켜 항상 같이 죽었다.
"…그거, 운학 씨 혼자 다 뒤집어쓰겠다는 소리잖아요."
"뒤집어쓰는 게 아니라, 지금은 제가 제일 안전한 선택을 하는 거예요."
"안전한 게 아니라 위험한 거잖아요! 성호 실장 쪽이, 일 틀어지면 어디까지 하는지 몰라요. 라인째로 지워 버릴 수도 있어요. 계좌도, 서류도, 사람까지도. 운학 씨가 제일 먼저 그 자리에 서는 거라고요."
목소리가 날카롭게 나갔다.
운학이 잠깐 말이 없었다.
"…그만해요. 이제 운학 씨는 좀 빠져요. 그 라인, 제가 더 볼게요."
"…여주 씨가요?"
"저도 할 수 있어요. 운학 씨 혼자한테만 다 미루고 싶지 않아요."
동민이 그제야 끼어들었다.
"그럼 저도 그쪽 좀 도울게요."
"…동민 씨는 안 돼요."
"왜요. 저도 같이 가는 거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왜 유독 저만 빼세요."
"부서장님이 벌써 동민 씨 쳐다보고 있잖아요. 더 들어가면 동민 씨가 제일 먼저 걸려요."
"그럼 여주 씨는 안 걸려요?"
"저는 원래 그 회사 거래처 담당이라 들여다봐도 안 이상해요. 동민 씨는 달라요."
"…그래도 이렇게 다 혼자 짊어지려는 거, 그만하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요."
둘 다 지지 않고 말을 주고받았다.
운학이 그 사이에서 한숨을 쉬었다.
"…형이랑 여주 씨, 또 똑같은 거로 싸우네요."
맞는 말이었다.
역할을 나누자고 모인 자리였는데, 정작 서로 위험한 쪽을 자기가 맡겠다고 다투는 꼴이 되어 있었다.
*
다음 날, 그 다툼 끝에 남아 있던 불안이 현실이 됐다.
점심시간, 부서장이 동민을 따로 불렀다. 돌아온 동민의 얼굴이 평소보다 굳어 있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이사급 결재 라인에 왜 관심 있냐고, 그냥 지나가듯 물으셨어요. 저도 그냥 지나가듯 둘러댔고요."
"…그걸로 끝났어요?"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동민이 잠깐 말을 끌었다.
"그 질문이 저한테까지 내려왔다는 거 자체가, 누군가는 이미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에요. 부서장님이 직접 물을 정도면, 그 위에서 먼저 내려온 말일 수도 있고요."
심장이 내려앉았다. 동민의 작은 질문 하나가, 벌써 어딘가에서 보고가 되고 있었다.
"…그만 캐실래요? 저 때문에 동민 씨까지."
"그 소리 또 하면, 저 진짜 서운해요. 저도 이제 같이 가는 거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단호한 말투였다.
예전엔 밀어내던 쪽이 저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반대였다.
그 반대가 오히려 불안해졌다.
*
퇴근길, 동민이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며 따라나섰다.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가도 되는데."
"알아요. 그래도 같이 가고 싶어서요."
큰길을 벗어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동민이 슬쩍 손을 잡았다.
"…무섭지 않아요? 요즘 이런 거."
"무서워요. 근데 동민 씨 손 잡고 있으면 덜해요."
"…그 말, 책임지셔야 해요. 앞으로 계속 잡아야 하는 거니까."
여주가 작게 웃었다.
집 앞 골목 가로등 밑에 다다르자, 동민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열흘 뒤에, 다 끝나면."
"…네."
"그다음 날은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냥 평범하게, 같이 밥 먹고 그런 날이었으면."
소박한 바람이었다.
두 번의 생에서 단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평범함이었다.
그 말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저도 그러고 싶어요."
동민이 이마를 맞대 왔다가,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들어가세요. 문 잠그는 소리 듣고 갈게요."
*
밤, 집에 돌아와 달력을 봤다.
2주였던 숫자가 벌써 열흘로 줄어 있었다.
더는 혼자 세던 숫자가 아니었다.
지키겠다고 혼자 끌어안았던 다짐 하나는 깨졌지만, 그 대신 세는 사람이 셋으로 늘었다.
창밖으로, 골목 끝에서 아직 떠나지 않고 서 있는 동민의 그림자가 보였다.
문을 잠그는 소리를 듣고 가겠다던 말을, 정말로 지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