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자료실에 먼저 와 있던 건 운학이었다.
책상 위에 서류 한 장을 펼쳐 놓고 있었다.
"…이거 보세요."
결재란 한 귀퉁이, 전에 봤던 그 영문 이니셜 'S' 옆에 작은 사번 코드가 찍혀 있었다.
"어제 다른 서류에서 하나 더 찾았어요. 이번엔 사번 뒷자리까지 나왔어요."
여주가 숨을 죽이고 그 코드를 들여다봤다.
"…이거, 조회할 수 있어요?"
"혼자는 못 해요. 인사 시스템 접근 권한이 있어야 하는데, 저한텐 없어요."
동민이 서류를 받아 들고 코드를 읽었다.
"…이 앞자리, BND 코드 아니에요. 외부 코드예요. 저희 쪽 사번 체계랑 달라요. 근데 적어도 BND 직원은 아니라는 뜻이네요."
*
이틀 뒤, 여주는 선일 캐피탈 쪽 옛 서류를 뒤지다가 같은 코드 형식을 발견했다.
이사회 참관인 명단, 맨 아래 작은 글씨.
사번 코드 옆에, 이번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이상혁.
손끝이 떨렸다. 처음으로 본 이름이었다.
성호 위에 있다던 그 사람의, 실체가 있는 이름.
곧바로 운학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상혁이요. 성호 실장 위에 있는 사람, 이름이 이상혁이에요."
전화기 너머로 운학이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이름, 결재란에서 한 번 더 본 것 같아요. 다시 찾아볼게요."
*
그날 퇴근 무렵, 휴대폰이 울렸다.
운학이었다.
마침 옆에서 같이 걷던 동민도 스피커 너머로 그 목소리를 같이 들었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 방금 성호 실장이랑 마주쳤어요. 복도에서 갑자기 부르더니, 저보고 요즘 바쁘냐고 웃으면서 물었어요."
"…그래서요?"
"결재 라인 쪽 자료를 자꾸 들여다본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업무 범위 넘어가는 건 서로한테 안 좋다고 그랬어요. 적당한 선에서 멈추라는 뜻 같았어요."
"…그게 다예요?"
"네. 근데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는 게, 더 무서웠어요. 다 알고 있다는 투였어요."
"…지금 어디예요. 혼자예요?"
"회사 앞인데."
"움직이지 말고 거기 있어요. 저랑 동민 씨 바로 갈게요."
십 분도 안 돼서 둘이 뛰어나갔다.
운학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냥 경고만 하고 갔어요."
동민이 운학의 어깨를 짧게 붙잡았다.
"…고생했어요. 이제 그 라인은 저랑 여주 씨가 맡을게요. 운학 씨는 완전히 손 떼요."
"그래도, 둘만 남으면……."
"괜찮아요. 운학 씨까지 더 위험해지는 것보단 나아요."
운학이 반박하려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숨을 내쉬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제야 동민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이상혁이라는 이름, 생각났어요. 예전에 회사 송년회에서, 부서장님이 그 이름 부르면서 전화 받는 거 들은 적 있어요. 되게 공손하게. 그때는 그냥 외부 거래처 사람인가 보다 했는데."
조각이 하나씩 맞춰지고 있었다.
성호 혼자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위에 있는 사람이 회사 안에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게 이제야 실감 났다.
*
운학을 집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 여주의 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왜 그래요."
"이제 그 라인, 저랑 동민 씨가 보는 거잖아요. 성호가 운학 씨한테 저렇게 직접 나타났는데, 저희한테도 똑같이 올 거 아니에요."
동민이 걸음을 멈추고 여주를 마주 봤다.
"올 수도 있어요. 근데 이번엔 혼자가 아니잖아요."
"그래도 무서워요. 운학 씨 얼굴 보니까, 다음엔 저나 동민 씨일 수도 있다는 게."
"…무서운 거 당연해요. 근데 저는 이제 그쪽 혼자 두는 게 더 무서워요."
동민이 여주의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어떻게 되든, 이번엔 같이예요. 혹시 또 잘못되는 일이 생겨도, 혼자 보내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또 그렇게 될까 봐."
"그런 뜻 아니에요. 그만큼 같이 가겠다는 뜻이에요. 무슨 일이 생겨도, 그쪽만 먼저 보내는 일은 없을 거라고요."
여주가 걸음을 멈추고 동민을 올려다봤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동임이 여주를 품에 안았다.
"…그러니까 무서워도, 혼자 무서워하지 마요."
그 말에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
며칠 뒤, 여주와 동민 둘이 자료실에 남아 이상혁이라는 이름을 다시 파고들었다.
"…동민 씨, 그 송년회 기억 더 자세히 안 나요?"
"그때 부서장님이 전화받으면서 '이사님'이라고 부른 것도 같아요. 확실친 않지만."
"BND 사람은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럼 이사님이라고 부를 사람이면……."
"…저희 모회사 쪽일 수도 있어요. BND가 선일지주 산하거든요."
동민이 노트북을 열어 선일지주 쪽 임원 명단을 찾아봤다.
몇 번 검색 끝에, 한 줄에 그 이름이 걸려 있었다.
"…여기 있어요. 선일지주 이사로요."
손끝이 차가워졌다.
성호 위에 있던 그 사람은, BND 직원이 아니라 BND를 가진 회사 쪽 사람이었다.
"그러니 BND 직원은 아니어도, 성호 실장이 함부로 못 건드리는 거였네요."
"…일주일 안에 이걸 어디까지 더 팔 수 있을지가 문제네요."
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두 번의 생에서 겪었던 그 날이 다시 떠올랐다.
"…맞아요. 조심해서 가는 수밖에 없죠."
동민이 여주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래도, 이번엔 혼자가 아니니까."
그 말에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밤, 집에 돌아와 달력을 봤다. 일주일. 며칠 전보다 숫자가 훌쩍 줄어 있었다.
줄어드는 숫자만큼, 이름 하나가 선명해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