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탯사연에 / 태산 빙의글] 세 번째 결말

2화. 인사를 못 하는 아침

퇴근하고 방에 들어와 씻지도 않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멍하니 벽을 보고 있는데 오늘 하루가 자꾸 되감기듯 떠올랐다.

 

소장님은 아침에 서류를 흔들며 마감이 앞당겨졌다고 했다. 말투도, 손짓도 어제와 똑같았다. 지원 언니는 김밥을 사겠다고 했고, 거기까지도 예상한 그대로였다.

 

근데 그다음, 언니가 내 얼굴이 왜 이렇게 하얗냐고 물었던 건 예상에 없던 말이었다. 소장님 대사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반복됐는데, 그 한마디만은 처음 듣는 거였다.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방금 죽었다 살아난 얼굴이 멀쩡할 리가 없으니까, 그건 반복된 대사가 아니라 지금 내 꼴을 보고 그 자리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렇다는 건 정해진 건 그대로 오고, 내가 뭘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있다는 뜻이었다.

 

무섭기도 하고, 한편으론 다행이기도 했다. 전부 다 정해져 있다면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는 거였을 텐데.

 

그 생각 끝에 자연스럽게 그날 밤이 떠올랐다.

멀쩡하던 브레이크가 갑자기 그렇게 안 들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동민이 마지막으로 흘리듯 했던 말이 귓가에 남아 있었다.

 

"…이 차, 성호 실장이 배정한 건데."

 

단순한 사고가 아닐지도 몰랐다. 지금 당장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

 

그보다 더 자꾸 마음이 가는 건 다른 쪽이었다. 우리가 어쩌다가 그렇게까지 됐더라.

 

손등에 붙여 준 밴드 한 장. 분식집에서 나란히 먹던 라면. 생일이라고 억지로 들이밀었던 케이크. 비 오는 날 씌워 주던 우산. 그런 사소한 것들이 쌓여서 어느 순간 좋아하게 됐고, 사귀게 됐고, 그리고 같은 차 안에서 같이 죽었다.

 

둘 다 있어서 둘 다 죽은 거라면, 이번엔 둘 중 하나만 있으면 된다.

 

'가까워지지 않는다. 그의 일에 끼지 않는다. 절대로, 다시 좋아하지 않는다.'

 

세 개면 충분했다. 지키기만 하면 됐다.

 

손목의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유리에 간 금이 손끝에 걸렸다.

 

 

 

*

 

 

 

다음 날 아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동민은 이미 안에 있었다.

나는 인사도 하지 않고 조용히 구석에 섰다. 문이 닫혔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먼저 "안녕하세요" 했을 타이밍인데, 그냥 흘려보냈다.

 

동민이 슬쩍 이쪽을 봤다.

 

"…오늘은 인사 안 해요?"

 

존댓말이었다. 그런데 목소리에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정면으로 물어보니 끝까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마지못해 나온 인사였다.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앞을 봤다.

 

4층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렇게 조용한 적은 처음이었다. 문이 열리자 나는 먼저 내려서 복도로 걸어갔다. 등 뒤에서 동민이 조금 늦게 따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나란히 걸었을 거리인데, 오늘은 두 걸음쯤 벌어져 있었다.

 

 

 

*

 

 

 

오전 열 시쯤, 사무소 문이 열렸다.

동민이었다. 손에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있었다.

 

"…이거, 여기로 잘못 온 것 같은데요."

 

택배 상자였다. 주소는 우리 사무소가 맞는데 받는 사람 칸엔 BND 리서치 직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옆 사무실끼리 종종 헷갈리는 일이었다.

 

 

 

과거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는 동민이 상자를 흔들어 보고는 "이거 뭔데 이렇게 무거워요, 벽돌이라도 들었나" 하며 실없는 소리를 했었다. 나도 같이 웃었었다. 그러다 상자를 다 정리하고 나서, 나는 별생각 없는 척 물었었다.

"…오늘 퇴근하고 저녁 먹을래요?"

별생각이 없기는. 대답을 기다리던 그 몇 초가 유난히 길었다. 동민은 한참 뜸을 들이다 그러겠다고 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거 뭔데 이렇게 무거워요, 벽돌이라도 들었나"

 

익숙한 대사였다.

 

"…아, 네. 감사합니다."

 

나는 짧게 받아 들고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동민이 잠깐 서 있다가, 뭔가 다른 말을 하려다 만 것 같은 얼굴로 그냥 돌아섰다.

문이 닫히자마자 지원 언니가 의자를 끌고 다가왔다.

 

"둘이 뭐 있어? 근데 저 사람이 저런 걸로 직접 왔었나? 원래 얼굴 보기도 힘든 사람이."

"아뇨. 택배가 잘못 왔대요."

 

과거에는 저녁 약속을 잡고 신나 했던 것 같은데,

이번엔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했다.

 

 

*

 

 

 

점심시간, 나는 일부러 계단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또 마주치기 싫어서였다.

 

건물을 나서는데 늘 가던 분식집 앞에 동민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는 것처럼, 유리문 앞에서 발만 동동거리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저기서 내가 먼저 손을 흔들었을 자리였다.

 

'…원래는 저기서, 나한테 처음으로 자기 얘기를 했었는데.'

 

떡볶이 국물이 식어 가는 냄새,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던 그의 옆모습. 다 기억나는데, 이제 그 얘기는 영영 못 듣게 됐다. 그게 왜 이렇게 아쉬운 건지 모르겠다.

그때 낯선 얼굴 하나가 뛰어오더니 동민을 붙잡았다.

 

"형! 저 오늘 야근 조 걸려서 죽는 줄 알았잖아요. 저녁 사 주신다고 한 거 잊은 거 아니죠?"

 

앳된 얼굴의 남자애였다. 동민이랑은 이미 아는 사이인 듯했다. 저녁 먹자던 말이 이번엔 나한테 온 게 아니었다. 동민은 대답 대신 짧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먼저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남자애가 신난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나는 못 본 척 반대편으로 돌아서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봤다. 유리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안쪽에서 둘이 자리를 잡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가까워지지 않기로 했으면서, 오늘 하루 종일 그의 하루만 눈에 담고 있었다.

 

사무실에 돌아와 손목의 시계를 봤다. 유리에 간 금은 그대로였다. 이 하루가 진짜였다는 증거처럼, 흐려지지도 않고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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