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바투 범규] 아리도록

17화. 아리도록, 다시 (완결)

한양에서 돌아오는 길, 범규는 몇 번이고 마을 어귀를 마중 나올 얼굴들을 그려보았다.

발걸음이 아무리 빨라도, 마음은 그보다 몇 배는 앞서 달리고 있었다.

대문이 보이자마자, 여주가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돌아오셨네요. 정말로."

 

"약속드렸잖습니까."

 

범규는 여주를 번쩍 안아 들었다가, 이내 발목을 떠올리고 화들짝 다시 내려놓았다.

 

"…아직도 아프십니까?"

"아니요, 이제 다 나았어요. 그러니 그렇게 조심하지 않으셔도 돼요."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여주의 어깨너머로, 그리웠던 옅은 땀내와 흙먼지 냄새가 뒤섞여 풍겨왔다. 그제야 비로소, 그가 정말로 살아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단이는 그 모습을 보며 눈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활짝 웃었다.

 

 

 

*

 

 

 

소란스러운 인기척에, 안채에서 김유형과 부인도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자네, 정말 살아 돌아왔구먼."

 

김유형의 목소리가 떨렸다. 범규는 얼른 여주를 놓고, 김유형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어르신. 심려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고개를 들게. 그런 인사보다, 자네 몸이 성한지가 먼저일세."

 

부인도 다가와 범규의 손을 잡고 이곳저곳을 살폈다.

 

"상처는? 어디 다친 데는 없고?"

" 크게 다친 곳은 없습니다."

 

범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간의 일을 간략히 아뢰었다.

 

"…조승학은 의금부로 압송되었습니다. 국문 끝에 죄가 낱낱이 드러났으니, 이제 남은 건 조정의 정식 처결뿐입니다."

 

김유형은 한참을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다, 이윽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고생 많았네. 정말로."

 

그는 그제야 안도한 얼굴로 옆에 선 여주를 바라보았다.

 

"…며칠 동안, 저 아이가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내질 못했네."

"…아버지도 참,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여주가 얼굴을 붉히며 눈을 흘겼다.

한바탕 웃음이 마당에 번졌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함께 웃는 순간이었다.

 

 

 

*

 

 

 

며칠 뒤, 조정의 공문이 당도했다.

 

최시헌의 역모 혐의가 모두 무고임이 밝혀져, 관작이 복원되고 최가의 신원이 회복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범규는 마침내 본래의 성과 신분을 되찾았다.

한양에 있던, 불타 사라졌던 최가의 옛집 터에도, 새로이 사당을 지어 부모의 넋을 모실 수 있게 되었다는 전갈이 함께 왔다.

 

범규는 그 소식을 듣고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십 년을 기다려온 순간인데도, 정작 실감이 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김유형 앞으로도 별도의 처결이 내려졌다. 십 년간 진실을 은폐한 죄는 결코 가볍지 않았으나, 스스로 밀서를 내어 조승학의 죄를 밝힌 공을 참작해 관직만 영구히 박탈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양반으로서의 신분과 가산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만하면, 과분한 처사일세."

 

김유형은 담담히 그 뜻을 받아들였다.

곁에서 지켜보던 부인이 남편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이제 한양에 다시 나설 일은 없겠지만, 오히려 홀가분합니다."

"그러게요. 이 마을에서 남은 여생을 조용히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김유형 내외는 그렇게, 오랫동안 낙향해 지내온 이 마을에 뿌리를 내리고 살기로 했다.

 

 

 

*

 

 

 

그날 저녁, 김유형은 오래된 옥패 한 짝을 범규 앞에 내밀었다.

 

"자네가 크게 다쳐 몸져누웠던 그날 밤, 옷깃 사이로 흘러나온 걸 보고서야 자네가 누구인지 알았네. 그때부터 줄곧 내가 품고 있었지. 이제야, 자네 것을 돌려주는군."

 

범규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십 년 넘게 지니고 다녔던 반쪽이, 다시 손안에 놓였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자네만 괜찮다면…… 이제 그 호칭도 바꿔야 하지 않겠나. '어르신' 말고, '장인어른'이라고."

 

김유형이 헛기침을 하며 던진 그 말에, 범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예, 장인어른."

 

그 한마디에, 김유형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때,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부인이 품속에서 작은 함을 꺼내 놓았다.

함 속에는, 범규가 지닌 것과 꼭 닮은 옥패 한 짝이 들어 있었다.

 

"…이건, 원래 여주 몫으로 있었어야 할 물건이네. 그이는 최가와의 연을 지우겠다며 없애라 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요. 언젠가 이 아이들이 다시 만날 날이 올 것만 같아서, 십 년을 몰래 품고만 있었습니다."

 

김유형이 놀란 눈으로 부인을 바라보았다.

 

"…당신, 그걸 여태 가지고 있었단 말이오?"

"…미안해요. 당신 뜻을 어겼지만, 후회는 없어요."

 

부인은 옥패를 범규의 손에 가만히 쥐여주었다.

 

"이건 자네가 맡아두었다가…… 내일, 직접 여주에게 보여주게."

 

범규는 두 개의 옥패를 나란히 겹쳐 쥔 채,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

 

 

 

안방에서 나온 범규는 여주를 마당으로 불러냈다.

품속에서 옥패 두 짝을 꺼내, 나란히 겹쳐 보였다.

 

"이건 제 몫이고, 이건…… 원래 아가씨 몫이었던 겁니다."

 

여주의 눈이 커졌다. 낯익은 문양이 새겨진 옥패 두 짝이 나란히 놓이자,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꼭 들어맞았다.

 

"이게…… 왜 여기에."

"어머님께서, 십 년을 몰래 품고 계셨다더군요. 없앤 게 아니라, 늘 곁에서 지키고 계셨던 겁니다. 아가씨를 향한 마음도, 이 옥패도."

 

여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 반쪽을 찾으려, 십 년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 끝에서, 반쪽보다 더 큰 걸 찾았습니다."

"기억을 잃은 척, 이름조차 감추고 곁에 머물던 그 시간부터…… 줄곧 아가씨였습니다. 제가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건."

 

"…저와 혼인해주시겠습니까."

 

"…네. 몇 번이라도, 좋다고 할게요."

 

범규는 두 짝의 옥패를 한데 엮어 여주의 옷고름에 매어주었다. 반쪽뿐이던 물건이, 비로소 온전한 하나가 된 순간이었다.

 

 

 

*

 

 

 

혼인 날짜를 정하기에 앞서, 범규는 김유형 내외 앞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한양의 새로운 집은 아직 손볼 곳이 많아, 당장 여주를 데려가 살림을 차릴 형편이 못 됩니다. 혼례는 이곳에서 치르고, 집이 정리될 때까지 얼마간 이 댁에 머물다가…… 채비가 되는 대로 한양으로 데려가고자 합니다."

 

김유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급할 것 없네. 그동안은 이 아비 곁에서 좀 더 지내다 가면 되지."

 

부인도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이내 웃음을 지었다.

 

"딸을 멀리 보내는 게 못내 아쉽지만…… 이제라도 제 이름 찾은 낭군 곁에서 사는 게 마땅한 일이지요."

 

여주는 두 손을 꼭 맞잡았다.

 

"한양이든 어디든, 함께라면 상관없어요."

 

 

 

*

 

 

 

혼례 날, 김유형의 집 마당 가득 붉고 푸른 차일이 드리워졌다.

원삼을 입은 여주와 사모관대를 갖춘 범규가 맞절을 나누는 동안, 마당을 메운 사람들 사이로 낮은 탄성이 퍼졌다.

십 년 만에 되찾은 이름으로, 마침내 정혼을 완성하는 자리였다.

 

김유형 내외는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쳤다.

단이는 저만치서 연신 코를 훌쩍이며 손뼉을 쳤다.

 

"…나리, 이제 진짜 나리가 되셨네요!"

 

범규는 그 너스레에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마당을 가득 메운 이웃들 사이로, 태현과 연준의 얼굴도 보였다.

두 사람 다, 이날만큼은 무장을 벗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당 한켠에 차려진 술상에서는 벌써부터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근심 없는 얼굴들이었다.

 

 

 

*

 

 

 

밤이 깊어지자, 여주의 집 별채에 마련된 신방에 둘만 남았다.

여주는 두 짝의 옥패를 하나로 엮은 노리개를 매만졌다.

지난 십 년의 서러움도, 지난 몇 달의 눈물도, 이 작은 노리개 하나에 모두 담긴 듯했다.

 

"이제, 더는 아플 일이 없겠죠."

"…없을 겁니다. 아리도록 그리워하던 날들도, 이젠 다 지난 일이니까요."

 

범규가 여주의 손을 마주 잡았다.

창밖으로, 언젠가 함께 올려다보았던 것과 똑같은 북두칠성이 떠 있었다.

 

"…그때 저 별을 가리키며 당황하시던 거, 아직도 생생해요."

 

"그건…… 잊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여주가 웃음을 터뜨리자, 범규도 결국 따라 웃고 말았다.

그 웃음소리가 오래도록 방 안에 머물렀다.

 

아리도록 그리워하던 지난 십 년은, 이제 그리움이 아니라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추억 위에서, 두 사람은 다시 새로운 하루하루를 쌓아갈 터였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렇게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완결 후기!!

 

와 드디어 완결입니다!!!

오랫동안 길게 쓰던 작품이라 정이 많이 들었는데 벌써 완결이네요 ㅎㅎ

 

재밌게 읽으셨나용???? 시대극은 처음이라 좀 서툴렀는데 그래도 재밌게 읽어 주신 분들이 많은 것 같아 행복했습니다 ㅎㅎ

로맨스랑 사건 진행을 적당히 버무리는게 힘들더라구요 ㅠㅠㅜ

그래도 해피앤딩으로 사건과 로맨스 둘 다 잘 마무리 된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아마 외전으로 조금 더 연재를 할 것 같아용

너무 여주 이야기로만 진행된 것 같아서 범규 시점에서 이야기도 써 보고 싶고

아기 때 둘이 사이 좋을 떄 이야기도 써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결혼 후 둘이 사는 모습도..........ㅎㅎㅎㅎㅎ

 

아 그리고 다른 작품도 쓸 예정인데 보고싶으신 소재 있으시면 추천해주세요!! 🙌

고럼 외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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