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97화. 협상(1)



우리는 미겔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씩 들고 나왔다.




"영화 속 배경에 들어 와 있는 느낌이에요."



마을을 둘러보기 시작하자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훈지 씨는 영화 속 주인공이기도 했잖아요."




그를 보고 있자니 내가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의

설렘이 떠올랐다.



그는 신난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맞아요.

 그런데 여긴...

 영화 장르 자체가 완전히 다른데요.

 이런 곳에 살면 욕심이란 게 다 사라질 것 같아요."





"그렇죠?

 그냥 하루가 잔잔한 호수처럼 흘러가는 느낌이죠?

 그래서 미겔이 미국보다는

 여기서 사는 걸 더 좋아하나봐요.

 그런데 나는...

 평생이 이렇게 평온하면 너무 심심할 것 같아요."





나란히 걷던 그는

갑자기 내 앞을 가로막듯 멈춰섰다.



"이제 한국 가고 깊은 생각이 나요?"




나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내가 어젯 밤 잠도 못 자고 생각해 봤는데...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알아요?"




"...왜요?"


그는 의아한 듯 나를 쳐다봤다.




"훈지 씨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한 게 없어요.

 물론, 그게 다는 아니었지만...
 
 훈지 씨와 멀어지기 위해 이곳까지 와서

 벌써 2년 가까이 됐잖아요.

 그런데 훈지 씨가 여기 오자마자

 그 결심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어요.

 이렇게 와 준 게 눈물 날 만큼

 고맙고, 기쁘고, 행복해서...

 지금처럼 나란히 산책하고...
 
 내가 그동안 뭘 한 건가 싶기도 하고."




"그동안 정아 씨에게 많은 일이 있었잖아요.

 그러면서 당신이 나를 조금씩 받아들이게 된 거에요.

 난 그래서 한편으로는

 줄리앙이란 사람한테 고맙던데요.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여전히 나를 밀어내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와... 우리 훈지 씨,

 2년 동안 정말 많이 어른이 됐네요.

 훈지 씨 말 들으니 아이러니가 아니라,

 내가 내 감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거구나."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거에요?

 그전에도 나는 어른이었어요.

 지금은... 좀 더 믿음직스러워졌다고 해야 할까?"




"그럼 믿음직한 훈지 씨와

 우리의 동거 생활에 대해 의논 좀 해 볼까요?"




우리는 한 벤치에 앉았다.




"우선은...

 난 우리가 한집에서 함께 사는 건 절대 반대에요.

 우리 이웃이 되도록 해요!!

 한 아파트에 살아도 되고,

 앞, 뒷집에 살아도 되구요.

 어쨋든 한 집은 싫어요.

 난 훈지 씨에 대한 환상 다 깨고 싶지 않아요."




그는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물었다.




"나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어요?"




"그럼요.

 난 훈지 씨를 팬으로 좋아하기 시작했고...

 더군다나 남녀 사이에

 어떻게 판타지가 없겠어요?

 함께 생활하면 그런 게 다 깨져 버릴 텐데

 그러기 싫어요."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음... 차라리 빨리 깨지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어차피 언젠가는 깨질 거라면..."




"자...들어봐요.

 예를 들어 같이 살다 보면요.

 청소 당번 문제로도 예민해질 수 있고,

 생활 패턴이 달라도 힘들고,

 심지어 치약은 왜 뒤에서부터 안 짜냐는

 이런 사소한 걸로도 싸우게 된단 말이에요."




"혹시...

 전에 동거해 본 적 있어요?

 완전 경험담 같은데.

 지금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넘어가 줄께요."




"동거해 본 적... 있죠."




훈지 씨는 갑자기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말하면 넘어가 준다면서요?"




나도 그를 따라 일어났다.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를 잡아 끌어 다시 앉혔다.




"캐나다에서 여자 친구들이랑

 하우스 메이트로 살아봐서 잘 안다구요.

 가족이 아닌 남과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훈지 씨는 그런 경험이 없고,

 남자라서 잘 모를 거에요."





그는 내 양 볼을 꾹 꼬집었다.





"아니 누가 그런 걸로 농담하래요?

 나 진짜 깜짝 놀랐잖아요."





"아! 아파요!"





"다시 그런 농담하면 볼꼬집으로 안 끝날 줄 알아요."





그는 정말 놀란 모양이었다.





"훈지 씨가 나이에 비해 유교보이구나..."





나는 안도하는 그의 표정이 귀여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내가 한 발 양보할께요." <98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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