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빙의글] 세 번째 결말

4화. 자꾸 마주치는 이유

며칠이 지나도록 동민과는 어색한 기류가 가시지 않았다. 마주치면 짧게 인사만 하고 지나쳤지만, 그날 우산 속에서 나눴던 말들은 자꾸 머릿속에 남았다.

 

동민이 경고했지만, 선일 캐피탈 건은 그냥 덮을 수 없었다. 퇴근 후에 혼자 구청 등기소에 들렀다. 법인 등기부를 떼어 보니 대표이사 칸에 낯선 이름이 하나 있었고, 감사 칸에는 '성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사고 나던 밤 동민이 마지막으로 흘렸던 말이 그대로 떠올랐다.

 

"…이 차, 성호 실장이 배정한 건데."

 

그 브레이크를 배정한 사람과, 이 장부의 구멍을 만든 사람이 같은 이름이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정확하게 겹쳤다.

 

그리고 이 회사, 선일 캐피탈을 채권 조사한다며 들여다보고 있는 게 다름 아닌 BND였다. 동민의 회사가 지금 성호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동민이 맡은 일도 그냥 평범한 채권 조사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민이 "선일 캐피탈"이라는 말 한마디에 낯빛이 변했던 것도, "이유는 안 궁금해하는 게 나아요" 하고 선을 그었던 것도 다시 떠올랐다.

 

혹시 동민도 이 이름을, 그날의 사고와 연결해서 알고 있는 건 아닐까.

 

등기소를 나서면서는 몰랐다. 열람한 기록에 내 이름이 남는다는 걸.

 

 

 

*

 

 

 

그날 밤 야근을 마치고 사무소를 나서는데, 골목 어귀에 낯선 승합차가 시동을 켠 채 서 있었다.

 

처음엔 그냥 지나쳤는데, 몇 걸음 걷고 나서 보니 차가 아주 천천히 같은 속도로 따라오고 있었다.

 

걸음이 빨라졌다.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했지만 등 뒤로 식은땀이 났다. 골목을 하나 더 꺾으면 큰길이 나온다는 걸 알면서도, 다리가 자꾸 풀렸다.

 

차가 속도를 조금 더 올렸다. 딱 내 걸음에 맞춰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꺼내려고 가방을 뒤졌지만 손이 떨려서 잘 잡히지도 않았다. 뛸까,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조수석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안에서 누군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얼굴은 안 보였지만 시선이 느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걸음이 오히려 더 느려졌다. 이대로 큰길까지 못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순간, 차가 슬쩍 인도 쪽으로 붙었다.

 

 

그때 누가 팔을 확 잡아끌었다.

숨이 턱 막혔다.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예요. 조용히."

 

동민이었다. 그가 나를 골목 반대편 편의점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유리창 너머로 그 승합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

 

 

 

*

 

 

 

편의점 안에서 승합차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본 후,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동민의 팔을 나도 모르게 꽉 붙잡았다.

 

"…괜찮아요? 다친 데 없어요?"

 

목소리가 다급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가 붙잡은 손을 내려다보더니, 뿌리치지 않고 오히려 그 위에 자기 손을 겹쳐 왔다.

 

"…놀랐을 텐데, 천천히 숨 쉬어요."

 

정신이 들자마자 손부터 빼려 했다. 가까워지지 않기로 했으면서 이게 무슨 꼴인가 싶었다. 그런데 손이 말을 안 들었다. 겨우 힘을 줘서 떼어 내려는 순간, 다리가 아직도 후들거리는 게 느껴져서 결국 다시 힘이 풀렸다.

 

"가까워지지 않는다"던 다짐이 이 손 하나로 이렇게 쉽게 흔들릴 줄은 몰랐다. 지금은 놀라서 그런 거지, 다른 뜻은 없다고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었다.

 

"…동민 씨가 여긴 어떻게……."

"…그냥, 지나가다가요."

 

거짓말이었다. 이 시간에 이 골목을 지나갈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며칠째 퇴근길마다 마주친 게 우연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계속 저 따라오셨어요?"

 

동민이 잠깐 말이 없었다. 인정도 부정도 아닌 침묵이 오히려 더 답이었다.

 

"…위험한 짓 하고 다니시니까요."

"제가 뭘 하고 다니는지 어떻게 아세요."

"등기소 다녀오신 거, 압니다."

 

숨이 막혔다. 그건 오늘 오후에 혼자 다녀온 일이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는데.

 

"…계속 지켜보고 계셨던 거예요?"

"…걱정돼서 그런 거니까, 오해는 하지 마세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전히 내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편의점 형광등 아래서 마주 본 그의 얼굴은, 화가 난 것도 안도한 것도 아닌 복잡한 표정이었다.

 

"…이제 그만 캐세요. 부탁이에요."

 

부탁이라는 말이 이번에도 낯설었다. 나는 대답을 못 한 채 고개만 떨궜다. 그만두겠다는 말도, 계속하겠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동민이 결국 작게 한숨을 쉬었다.

 

 

 

*

 

 

 

편의점을 나설 때, 동민이 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괜찮다고, 혼자 갈 수 있다고 한 번은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뗐는데, 정작 나온 말은 "…그럼 큰길까지만요"였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몇 걸음 뒤에서 따라 걷는 발소리가 아까와는 다르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큰길에 접어들 때쯤, 그가 문득 물었다.

 

"…무섭지 않으셨어요? 그 차 보고."

"…무서웠어요. 지금도 다리가 떨려요."

"근데 왜 그만두지 않으세요."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만두면 된다는 걸 알면서도, 여기서 멈추면 아무것도 모른 채 또 그 정산일에 사고가 날 것 같았다. 운 좋게 다시 살아 돌아온 만큼 이번에는 기필코 비밀을 알아내 동민을 살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냥 알아야 할 일이라서요."

 

동민이 더 캐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헤어지기 직전, 그가 낮게 덧붙였다.

 

"…다음엔 혼자 다니지 마세요."

 

집에 돌아와 손목의 시계를 봤다. 유리에 간 금 위로, 아직도 그의 손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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