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도 범규는 인기척을 죽이며 사립문을 나섰다.
여주는 이불 속에서 그 발소리를 듣고도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매일 밤 되풀이되는 그 발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조심스러웠다.
기억이 없다던 사람이 대체 어디를, 무엇 때문에 매번 이 시간에 나서는 걸까.
지난 며칠, 옥패를 감추던 손짓과 잠 못 이루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물어봐도 그는 웃어넘기기만 했다. 그 웃음 뒤에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오늘만큼은, 기다리는 대신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담을 넘어 사라지자, 여주는 조용히 일어나 겉옷을 걸치고 뒤를 따랐다.
*
심장이 유난히 크게 뛰었다. 무섭다기보다는, 더는 모른 척할 수 없다는 마음이 앞섰다.
밤길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범규는 익숙한 걸음으로 산길을 올랐고, 여주는 발소리를 죽이며 그 뒤를 쫓았다.
풀잎에 스치는 옷자락 소리조차 크게 느껴져, 몇 번이고 숨을 멈춰야 했다.
발밑이 자꾸 미끄러졌지만, 그와의 거리를 놓치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한참을 걷던 그가 어느 낡은 서낭당 앞에서 멈춰 섰다.
곧이어 어둠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오갔다.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시간이 없어. 저쪽도 이미 이 근방을 훑고 있어."
여주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였다.
낯선 이야기였다. 낯선 범규였다.
이 사람이 정말 기억을 잃은 손님이 맞나,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면 지금껏 봐온 서툰 웃음도, 어설픈 손짓도 전부 거짓이었단 말인가.
이윽고 상대는 인사도 없이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
그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범규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여주와 눈이 마주쳤다.
"…아가씨?"
더는 숨을 곳이 없었다.
"손님이야말로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방금 그 사람은 누구고요."
"…따라오신 겁니까."
"대답이 먼저잖아요. 시간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손님, 대체 정체가 뭐예요?"
범규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잠시 흔들렸다.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일단 돌아가시죠."
"그렇게는 안 돼요. 오늘은 제대로 듣기 전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범규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방금까지의 난처한 얼굴은 사라지고, 서늘하리만치 낯선 눈빛만 남았다.
"조용히."
낮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성이었다.
그가 여주의 팔을 붙잡아 당기며,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입술 앞에 세워 보였다.
순간 여주의 온몸이 굳었다. 아는 사람의 손길인데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붙들린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이 사람이 정말 그 손님이 맞나. 두려움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놀라 뒷걸음질 치던 발끝이 마른 나뭇가지를 밟았다.
부러지는 소리가 숨죽인 산 정적을 갈랐다.
"저쪽이다!"
날카로운 고함이 메아리쳤다.
저 아래에서 흔들리던 횃불이 일제히 이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범규의 얼굴이 다시 한번 굳었다. 이번엔 조금 전의 서늘함이 아니라, 다급함이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이것부터."
낮게 중얼거린 그가 여주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 손만은 아까와 달리 다정했다.
숨어 있을 틈도 없었다. 사내들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손에 쥔 칼날이 횃불에 번뜩였다. 예사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주는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지만, 맞잡은 손의 온기만은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뛰십시오!"
범규가 여주의 손을 붙잡고 산길을 내달렸다.
등 뒤로 화살이 스치는 소리가 몇 번이고 귓가를 스쳤다.
나뭇가지에 뺨이 긁히고 치맛자락이 걸려 찢어졌지만,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때, 화살 하나가 여주의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다.
"악……!"
짧은 비명과 함께 여주의 걸음이 크게 휘청였다.
"아가씨!"
범규가 돌아보기도 전에, 여주의 다리에서 힘이 풀리며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다 왔습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와중에도, 여주를 품에 안은 채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등 뒤로 화살이 몇 번이고 더 스쳐 지나갔지만, 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품 안에서 여주의 팔뚝을 타고 흐른 피가 그의 옷섶까지 붉게 물들였다.
*
마을 어귀가 보이자 추격의 기척이 조금씩 멀어졌다.
범규는 집 앞에 다다라서야 여주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놀란 하인들의 비명에 김유형과 단이가 뛰쳐나왔다.
"아가씨!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사람들이 정신을 잃은 여주를 서둘러 방 안으로 옮겼다.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걸 보고 나서야, 범규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손님!"
단이의 다급한 외침에 사람들이 돌아보았을 때, 그의 옷섶은 이미 붉게 젖어 있었다.
다 아물었다 여겼던 예전 상처가, 그새 다시 벌어져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쓰러지는 그를 부축하려는 손길 속에서, 옷깃이 벌어지며 옥패가 스르르 흘러나왔다.
그것을 집어 든 김유형의 손이, 순간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낯익은 문양이었다. 십 년 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그날의 문양이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차마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떨리는 손끝으로 옥패를 움켜쥔 채, 김유형은 실려 가는 사내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방으로 옮겨진 여주는 단이가 상처를 닦아주는 내내 정신을 놓았다 차렸다 했다.
몽롱한 와중에도 귓가엔 아까 그가 외치던 다급한 목소리만 맴돌았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다 왔습니다." 라던 그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았다.
옆방에서는 의원을 부르는 소란이 밤새 그치지 않았다.
여주는 둘 다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다시 깊은 잠 속으로 가라앉았다.
팔에서 흘린 피가 많았던 탓인지 열이 오르기 시작했고, 그 밤 이후로 여주는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