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바투 범규] 아리도록

외전 3화. 나란히 걷는 봄 (완결)

한양살이도 어느덧 반년을 넘어서고 있었다.

봄볕이 방문 틈으로 스며들도록, 범규는 여전히 이불 속에서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해가 중천인데 아직도 이러고 계세요?"

 

여주가 이불을 슬쩍 걷어내며 흘겨보았다.

 

"…조금만 더요."

 

범규가 눈도 뜨지 않은 채, 오히려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도로 이불 속으로 끌어당겼다.

 

"아니, 이러시면 저까지……"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범규의 팔이 여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딱 한 식경만."

"아까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때는 진심이 아니었고, 지금은 진심입니다."

 

여주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그 품에 마지못한 척 몸을 기댔다.

 

"이러다 정말 해가 다 지겠어요."

 

"그럼 오늘은 그냥 하루 종일 이러고 있죠."

"단이가 방문 두드리다 지쳐 돌아가겠는데요."

"그럼 내일 아침에 사과하면 되지요."

 

말도 안 되는 대답에도, 여주는 굳이 나무라지 않았다.

창호지 너머로 스며든 볕이 두 사람의 어깨 위로 나른하게 내려앉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의 숨소리만 듣고 있던 여주가, 문득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나직이 물었다.

 

"…행복하세요?"

"이렇게 묻는 것부터가, 이미 답을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그래도 듣고 싶어서요."

"…예.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만큼, 그렇습니다."

 

 

 

*

 

 

 

늦은 조반상을 앞에 두고도, 단이의 눈총은 매서웠다.

 

"두 분 다 낮잠 벌써 다 자셨으면서, 이제 아침을 드세요?"

"단아, 너도 참 잔소리가 늘었구나."

"누구 덕분에요."

 

여주가 못 이기는 척 눈을 흘기자, 단이는 콧방귀를 뀌며 국그릇을 놓았다.

범규는 그 틈에 슬쩍 여주의 밥그릇에 자기 몫의 반찬을 옮겨주었다.

 

"…이러시면 저 살쪄요."

"살쪄도 예쁩니다."

"지금 그걸 칭찬이라고."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단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두 분 보면 아직도 신기해요. 그 기억 잃은 손님이랑 우리 아가씨가, 결국 이렇게 되실 줄이야."

"단아, 그 얘기는 이제 그만."

 

여주가 민망한 듯 손을 내저었지만, 범규는 오히려 흥미로운 얼굴로 되물었다.

 

"그때는 어땠습니까? 제가 그렇게 수상해 보였습니까?"

"수상한 정도가 아니었죠. 밤마다 몰래 나가시고, 옥패는 왜 그렇게 감추시고. 저는 진작 눈치챘었다고요."

"…그건 몰랐네요."

 

범규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리자, 여주와 단이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

 

 

 

아침을 먹은 뒤, 두 사람은 먼저 사당에 들렀다.

매달 초하루면 으레 그러는 참이었다.

향을 피우고 나란히 절을 올린 뒤, 여주가 무릎을 펴며 조용히 말했다.

 

"아버님 어머님도, 아드님이 이렇게 잘 지내시는 거 보고 흐뭇하시겠어요."

"…그러셨으면 좋겠습니다."

 

범규가 위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옅게 웃었다.

 

"요즘은 여기 올 때마다, 예전만큼 마음이 무겁지 않습니다. 그게 이상하게 죄송하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하고요."

"죄송할 일이 아니에요. 두 분도 아드님이 슬픔 속에서만 사는 걸 바라시진 않았을 거예요."

 

여주가 그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범규는 그 손을 마주 잡으며, 오래도록 위패 앞에 머물렀다.

 

"…그래도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저는 지금, 참 잘 살고 있습니다."

 

여주가 그 말에 조용히 웃으며 그의 어깨에 살짝 기댔다.

사당을 나서는 길, 볕이 유난히 따뜻했다.

 

 

 

*

 

 

 

그 길로, 두 사람은 볕이 좋다는 핑계로 저잣거리까지 걸음을 옮겼다.

포목점 앞에서 여주가 고운 비단 자락에 눈길을 주자, 범규가 두말없이 그것을 사들였다.

 

"이러실 필요 없는데."

"아가씨한테 어울리는 걸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게, 저한테는 더 힘든 일입니다."

 

옆 가게 처녀들이 그 말을 듣고 저마다 범규를 흘끔거리며 속닥였다.

여주는 못 본 척 시선을 돌렸지만, 걸음이 미묘하게 빨라졌다.

 

"…왜 그렇게 서두르십니까?"

"그냥요. 덥잖아요."

 

"지금 볕도 그렇게 안 뜨거운데."

 

범규가 짐짓 모른 척 웃으며 묻자, 여주의 귀끝이 붉게 물들었다.

 

"…자꾸 그렇게 웃지 마세요. 얄미워요."

"제가 뭘요."

 

능청스러운 대답에, 여주는 결국 그의 옷자락을 슬쩍 잡아끌었다.

 

"얄밉다는 사람 손은 왜 잡으십니까."

"…놓기 싫으면 잡고 있을 뿐이에요."

 

범규는 그 말에 아무 대꾸도 못 한 채, 그저 그 손을 조금 더 힘주어 마주 잡았다.

그렇게 손을 맞잡고 걷다가, 국화 장신구를 파는 노점 앞에서 여주의 발걸음이 다시 멈췄다.

 

"이건 딱히 안 사셔도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눈은 좀처럼 그 노리개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범규는 못 이기는 척 값을 치르며 낮게 웃었다.

 

"입으로는 됐다 하시면서, 눈은 계속 그쪽만 보고 계시더군요."

"…보는 거야 제 마음이잖아요."

"사드리는 것도 제 마음이니, 서로 마음대로 하는 거지요."

 

여주는 결국 못 이기는 척 그것을 받아 들며, 슬쩍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

 

 

 

저녁, 김유형이 보낸 서신이 도착했다.

 

마을은 무탈하고, 태현은 얼마 전 조정에서 옛 가문의 신원을 인정받아 이제 제 이름으로 살게 되었으며, 연준은 여전히 곁을 지키는 벗으로 남아 있다는 소식이었다.

 

"다들, 저마다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네요."

 

여주가 서신을 접으며 나직이 말했다.

 

"…그러게요. 저도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기분입니다."

 

범규가 여주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저녁상을 물린 뒤, 두 사람은 술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오늘 저잣거리에서, 뒤에서 아가씨들이 뭐라고 수군거렸는지 아세요?"

"…모르겠는데요."

"신수가 훤한 낭군을 두었다고, 다들 부러워하는 눈치던데요."

 

여주가 술잔을 기울이며 짐짓 새침하게 말을 이었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나쁘지 않았다는 건, 좋았다는 뜻입니까?"

"그건 아가씨…… 아니, 부인께서 알아서 짐작하시죠."

 

범규가 슬쩍 말을 고쳐 부르며 웃자, 여주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호칭, 아직도 낯설어요."

"익숙해지실 때까지, 계속 불러드리겠습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술기운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그윽하게 들렸다.

여주는 애써 시선을 피했지만, 범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손끝을 가만히 감쌌다.

 

"…왜 이렇게 자꾸 보세요."

"보지 말라 하시면 안 보겠습니다만, 딱히 다른 볼 게 없어서요."

"그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요."

"기억을 잃었던 시절에도, 아가씨 얼굴 보는 재미만은 잊지 않았으니까요."

 

여주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밀쳤다.

밀쳐진 어깨는 다시 슬며시 그녀 쪽으로 기울어졌다.

밤이 깊어지자, 방 안엔 은은한 등잔불만 남았다.

 

"…부인."

 

낮게 부르는 그 한마디에, 여주는 대답 대신 그의 옷깃을 가만히 붙잡았다.

범규가 조심스레 그녀의 뺨을 감싸며, 이마를 맞대었다.

숨결이 서로에게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곁에 있어주시겠습니까."

"…묻지 않아도 될 걸, 왜 자꾸 물으세요."

 

여주가 먼저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옷고름 사이로, 옥패 두 짝을 엮은 노리개가 나직이 부딪혔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등잔불 아래 하나로 겹쳐졌다.

등잔불이 가늘게 흔들리다, 이내 조용히 꺼졌다.

 

 

 

*

 

 

 

이튿날 아침, 여주는 늦도록 눈을 뜨지 못했다.

 

옆자리를 더듬던 손끝에, 대신 목에 걸린 노리개가 닿았다.

옥패 두 짝이 하나로 엮인 그 노리개를, 여주는 가만히 매만졌다.

 

창밖으로, 밤새 자리를 지켰던 북두칠성이 아직 희미하게 남은 새벽하늘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 별을 함께 올려다보았던 밤도, 아리도록 그리워하던 계절도, 이제는 모두 이 방 안의 온기로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의 봄은, 그렇게 나란히 걷는 하루하루 속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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