被俘

(20)正式晚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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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잡히다 (20) 정찬 모임



곽진수는 학회에서 만난 나에게 오소리 모임을 제안했던 사람이었다. 그날 나는 연구 발표자였고 발표가 끝난 뒤 나에게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냐고 물었다.. 당연히 연구에 대한 질문이 있는 줄 알고, 시간을 기꺼이 내주었다. 그런데 기껏 그가 나에게 권한 것은 오소리모임이었다. 나의 관심사 밖의 내용이어서 원래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래서 진수와는 첫 시작이 그닥 기분이 좋질 않았다. 종종 학회에서 마주치던 사이었기에 나는 예의를 생각해서 바로 거절하진 않았다.이 일로 김석진에게 나는 연락을 했었고, 이후 스파이로 활동하기로 하고 나서야 진수에게 모임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답변을 주었다. 

진수는 후원금이나 정제계와 관련된 배경 없는 회원들은 사냥제에 나가려면 2~3년 간 조직과 컨텍을 유지해야 가능하다고 했다. 내가 사냥제에 나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자 진수는 나를 정기 모임에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엔 진루는 모임의 실무자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신입 회원을 받기도 하고, 간부들에게도 연락을 했었다. 또한 어디서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냥제에 쓰이는 약물을 어디선가 받아오기도 했다. 사냥제에서 피해자를 동물화 시키는 부분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기 떄문에 약물이 그런 곳에 쓰이지 않을지 추측된다. 



끼이이익...



택시가 멈추고 나는 택시에서 내렸다. 

정찬 모임이 있다고 한 호텔은 시내 한가운데에 위치한 곳이었지만, 전철역에서 걸어오기엔 무리가 있었다. 나름 꾸민다고 꾸몄지만, 주변사람들이 입은 값비싼 옷들에 비하면 SPA브랜드의 검은 원피스를 입은 나는 꽤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호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사파이어 홀까지 오자 이번에는 모임의 실무자인 누군가가 나를 지정석으로 안내해줬다. 



"이 쪽에 앉으시면 됩니다."



그나마 이곳은 지정석이라서, 딱히 친하지 않더라도, 어디 앉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서 편했다. 입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중앙의 커다란 샹들리에를 보며 한숨이 살짝 나왔다. 나처럼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낸 진수는 이런 상류 사회를 동경했고, 이곳에 속해있다는 것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과연 반인류적인 행위를 하는 이 집단이 상류사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딱히 이런 집단에 속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는데.. 정말 가끔 이따금씩 이곳에 왜 와있는지 좀 의문이 들 떄가 있긴 하다.

김석진 서장의 부탁으로 이 곳의 사냥제를 파해치기 위해 1년 동안 모임에 참여 중이지만, 이번에 진수가 지난번에 참관 자격으로 불러준 것 빼고는 딱히 사냥제에 참여할 기회도 없었고, 모임에서도 정보를 최소한만 주었기 때문에 경찰에 도움이 되고 있긴 한 걸까.. 하는 생각도 들긴 했다.   

진수가 없으니 정찬 시작 시간까지 10여분 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시간이 참 느리게 갔다. 보통은 정기모임에 오면 아까 나를 자리로 안내해준 실무자처럼 진수도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나는 도와주곤 했었다. 오늘은 뭐랄까.. 진수도 없고 정말 불편하다.

정기모임은 주로 실무자들이 대부분인 모임이지만, 정찬 모임은 실무자들 뿐만 아니라 높은 사람들도 오는 날이었다. 왠지 평소와 느낌이 달랐다. 테이블 가장 안쪽에 이전에는 못 보던 자리가 있었다. 지난번 사냥제 사건으로 인해 익숙한 얼굴 몇몇이 비어버려 장내는 살짝 어수선했는데, 그래서인가.. 왠지 정말로 내가 생각한 윗선에 해당하는 누군가가 나타날 것 같았다.


난 긴장한 채로 어떻게든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약속된 시간이 지나고 서로 인사하느라 어수선한 사이, 안쪽에서 빨간색 수트를 입은, 갈색 곱슬 머리사이로 안광이 빛나는 누군가가 나타났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김태형입니다."



그는 가장 윗쪽에 앉았다. 눈에 띄는 외모만으로도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오소리는 아닐 것 같아.. 이 기운은... 우리보다는 훨씬 상위 중종이야.. 그가 나오자 분위기는 조용해졌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띄고 이야기했다.



"오늘은 간만의 정찬 모임 아닙니까..? 
 즐겁게 즐기시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김태형은 이곳의 가장 큰 후원자로 정기모임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자라고 했다. 김태형이 나타나자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정리되면서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김태형의 말이 끝나자, 평소에는 딱히 관심도 없었던 온갖 고급스러운 음식들이 하나, 둘 서빙 되었다. 한우 타르타르를 시작으로 작은 자개 스푼에 담긴 캐비어, 기름진 푸아그라 스테이크 등.. 이런 음식은 굳이 왜 순서에 밎춰 먹어야하는 거지..? 그냥 맘에 드는 거 하나만 왕창 먹으면 안 되나..? 비릿한 바다향이 느껴지는 캐비어를 입에 넣으며 나는 생각했다. 진짜 내 성미에 안 맞는다.

이 모임은 사냥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참가비 외에도 다양한 명목의 후원금을 통해 운영된다. 아직 사냥제에 참여하지도 않고, 후원자가 아닌 차기 실무자로서 이 모임에 나오고 있던 나는 그런 비용을 낸 적도 없었고 그래서인지 이 음식들이 더더욱 불편했다. 

어느정도 식사를 마치자 잠시 다음 사냥제를 정하는 회의가 진행되었다.



"이번에 경찰이 급습했다고 하니,
 몸을 사려야하는 거 아닙니까?"



한 회원이 말하자 윗자리에 앉아있던 김태형이 거만하게 웃었다.



"우리가, 그런 일에 흔들려서는 안되죠. 

 게다가 1년 만의 사냥제가 아니었습니까...? 
 다들 너무 기다리셨을 것 같은데...

 차라리 두 달 뒤 쯤으로 시간을 다시 잡죠. 
 이번에는 보완을 좀 더 철저히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김태형의 말에 장내는 술렁거렸다. 곽진수처럼 이번에 체포된 실무자들에 대한 논의는 전혀 없었다. 그냥 그들에 대한 건 잊혀진 것 같았다. 사람들은 점차 김태형에게 설득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경제적 정치적 백그라운드를 믿는 것 같았다. 도대체 그 뒤에 뭐가 있는 거지? 상식적으로 몸을 사리는게 맞지 않은가..? 이해가 가진 않지만 결국 사냥제는 2달 뒤에 열리기로 최종 결정되었다.


.    .    .



회의가 끝나자 사람들은 돌아다니며 각자만의 사교활동을 시작했다. 웃으며 떠드는 회원들 사이로 핑거푸드와 샴페인이 담긴 쟁반을 든 웨이터들이 돌아다녔다. 이럴 때 나는 주로 진수를 도와줬었는데, 오늘은 진수가 없으니 꿔다놓은 보릿자루 처럼 자리에 가만히 있어야 했다. 일단 모임에 참석은 했지만, 기분 나쁜 느낌에 자꾸 몸을 사리게 된다.



"마드모아젤..? 이름이...."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아까 저쪽에 있던 김태형이었다.



"안녕하세요, 흑해주라고 합니다.. 000연구소 연구원이에요."


"네, 저는 R&V 대표 김태형입니다."



악수를 청하는 김태형의 손을 잡았다. 뜨겁고 끈적한 느낌... 적어도 재규어 이상의 중종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기운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이 예의인데 이 남자는 묘하게 자신의 기운을 아주 조금씩 내보내고 있었다. 
약간 위협적인데...?




"해주씨는 누구 소개로 오신 거죠? 처음 보는 얼굴이어서요.."



아, 이 분은 워낙 최상위 회원이라 잘 나타나지 않는 다더니, 나름 회원 관리를 하고 있네...? 이렇게 구석이 쭈그리로 있던 나에게 관심도 가져주고.. 이 거만한 남자에게 황송한 척이라도 해야하는 걸까...?



"곽진수 소개로 들어왔습니다. 

 같은 연구소는 아니지만 학회에서 종종 연구와 관련해서 교류가 있던 친구입니다."



김태형은 곽진수를 잘 모르는 듯 옆에 따라다니는 수행원에게 살짝 물어보는 것 같았다. 수행원이 뭔가 대답하자 김태형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수 소개로 온건데 정작 진수가 없는 게 너무 어색했다. 어쩔수 없다.. 곽진수 너는 너 아마 지금쯤엔 그 수인 심문실에 있을것 같군.. 차가웠던 시멘트 방과 철컹거리던 수갑의 감촉이 문득 떠올랐다. 권투를 빈다 친구.. 부디 전정국만 만나지 마라..

딴생각을 하며 김태형이 어서 나를 지나치길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나에게 보내는 눈빛이 영 끈적끈적하고 좋질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은 무얼하시나, 우리 해주씨는?"


뒷배경을 보고 회원을 뽑는다는 말도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바로 호구조사가 들어왔다.

모임에 들어온 사람들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 후원자 혹은 실무자. 후원자들은 집안이 대단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부모님에 대해 묻는 것은 결코 실례가 되는 질문은 아니었다. 후원자의 경우에는 집안의 자산 규모라던지, 제계에 미치는 영향력같은 것들이 중요한 평가 대상이었다. 지금 곽진수와 같이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면, 내가 이 곳에 후원자로 온 게 아니라 실무자 역할로 오려고 한 걸 알 수 있을 테니 그닥 필요한 질문이 아니었을 텐데.. 일단 대답은 해야겠지...?



"저는 부모님은 안 계십니다. 오래 전에 돌아가셨어요.."


"아이고 이런이런, 어디 아프셨나보지?"



김태형이 갑자기 흥미롭다는 듯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아뇨.. 살해 당하셨는데요?"



다소 반항기 어린 눈빛으로 대답했다. 더이상 말걸지 말란 의미였다.



"살해당하셨다고...? 범인은 잡았나...?

 오래전이라면 어렸을 때 였을텐데 많이 힘들었겠군~"


"범인은 모릅니다. 힘들었지만,
 정말 절박하게 공부해서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은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사실이
 딱히 불행하다거나 괴롭진 않습니다. "



나는 살며시 미소를 띄고 대답해주었다. 제발.. 더이상 말하지 말고 지나갔으면.. 싶었는데, 내 대답에 김태형은 뭔가 관심이 간다는 듯 눈빛이 반짝였다.



"호오.. 그래, 어린 딸이 이제는 장성해서 우리나라의 가장 잘나가는 연구소에 다니고 있으니 하늘에 있는 부모님도 나름 뿌듯하시겠어.

해주씨, 그 패기가 맘에 드는 군..

 난 이만 실례하지.. 대화 즐거웠네"



김태형은 나와의 대화를 끝으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뭐지...? 뭔가 대화에 이상한 점이 있었나? 괜히 김태형의 기억에 남을 만한 말을 한 것 같아 조금 후회되었다.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하나둘 떠나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제 모임이 정리되고 있나보군.. 나도 서둘러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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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머릿속에 지진정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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