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바투 범규] 아리도록

16화. 무너지는 그림자

떠나는 날 아침, 대문 앞에 온 가족이 나란히 나와 섰다.

 

"…부디 몸조심하세요."

 

여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번엔 반드시, 웃는 얼굴로 돌아오겠습니다."

 

범규는 여주의 손을 잠시 맞잡았다가, 이내 놓고 몸을 돌렸다.

김유형이 그런 범규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부디, 살아서 돌아오게. 무슨 일이 있어도."

"명심하겠습니다, 어르신."

 

부인도 다가와 범규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부디 몸 성히, 다치지 말고 돌아와주게."

 

김유형이 내어준 사병들이 이미 대오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고, 그 맨 앞에는 연준이 서 있었다.

 

"이번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나리."

 

"…자네가 함께해준다니, 든든하네."

 

 

 

*

 

 

 

마을 어귀에는 태현을 비롯한 동료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오랜만이군, 태현."

"살아 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구나."

 

태현이 씩 웃으며 범규의 어깨를 두드렸다.

 

"밀서는 챙겼는가?"

 

범규는 품속의 서찰을 조용히 다독였다.

 

"이걸로, 십 년을 끝낼 수 있을 걸세."

 

태현의 뒤로 늘어선 열댓 명의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조승학에게 무언가를 빼앗긴 이들이었다.

 

"다들, 오래 기다려온 날일세. 살아서 끝을 보세."

 

낮은 함성이 사방에서 일제히 터져 나왔다.

한양까지, 아흐레에 걸친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

 

 

 

한양에 다다른 그들은 곧장 격쟁을 준비했다.

임금의 행차 앞에 나아가 북을 울리는 것만이, 조승학의 손이 닿지 않는 유일한 통로였다.

 

"…멈추어라! 누가 감히!"

 

호위 무사들이 창을 겨누며 막아섰지만, 범규는 이미 목숨을 내놓은 각오였다.

이대로 물러선다면, 십 년의 세월도, 부모의 억울함도 다시 어둠 속에 묻힐 뿐이었다.

 

"전임 도총관 최시헌의 아들, 최범규이옵니다! 십 년 전 억울하게 뒤집어쓴 역모의 진실을, 이 자리에서 밝히고자 하나이다!"

 

북소리가 대궐 앞마당에 울려 퍼졌다.

지나던 대신들이 걸음을 멈추고 술렁였다. 십 년 전 사라졌던 이름이 다시 세상에 나선 순간이었다.

 

 

 

*

 

 

 

곧 임금 앞에 나아가라는 명이 떨어졌다.

이윽고 어전에서, 밀서 두 통이 낱낱이 읽혔다.

 

하나는 최시헌을 역모로 엮을 계획을 미리 알리며 침묵을 강요한 서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병장기를 심을 날짜와 방법을 구체적으로 지시한 서신이었다.

조승학의 인장이 찍힌 그 서신 앞에서, 좌중은 술렁였다.

 

"…이, 이것은 조작된 문서이옵니다! 신을 모함하려는 수작이 분명하옵니다!"

 

조승학이 핏발 선 눈으로 소리쳤지만, 목소리에는 이미 힘이 없었다.

 

"그렇다면 병조참판을 지낸 김유형을 불러 대질하시지요. 이 서신이 어찌 그의 손에 십 년이나 있었는지."

 

범규의 담담한 대답에, 조승학의 낯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게다가 이 서신의 필체와 인장을, 조정의 그 누구보다 대감께서 잘 아실 겁니다. 대감의 것이니까요."

 

좌중에서 나직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임금은 한참을 말없이 두 서신을 번갈아 살펴보다, 이윽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당장 조승학을 국문하라."

 

궁지에 몰린 조승학이 옆에 선 무사의 검을 낚아채, 범규를 향해 달려들었다.

 

"네놈이…… 감히 다 된 밥에 재를 뿌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태현이 몸을 던져 그 칼을 막아섰다.

곧이어 연준을 필두로 한 사병들이 조승학을 둘러싸 제압했다.

 

"…이거 놓아라!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느냐!"

 

발악하는 목소리도 잠시, 조승학은 결국 오라에 묶여 끌려나갔다.

십 년을 짓눌러온 그림자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범규는 그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후련함보다는, 텅 빈 듯한 허탈함이 먼저 밀려들었다.

 

"…끝났군."

 

태현이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제야, 두 분 넋도 편히 쉬시겠지. 자네도, 이제 그만 자신을 놓아줘도 돼."

 

 

 

*

 

 

 

같은 시각, 여주는 마당에 서서 하염없이 한양 쪽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뒤, 파발이 당도했다.

 

"조승학이 처단되었다는 전갈입니다! 최 대감의 누명도, 완전히 벗겨졌다고 합니다!"

 

여주는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아, 한참을 소리 내어 울었다.

원망도, 그리움도, 그 모든 물음도 — 이제 정말로 끝을 맺은 것이다.

 

김유형과 부인도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눈물을 흘렸다.

이제 남은 건, 그가 무사히 돌아오는 일뿐이었다.

 

여주는 나무 패를 두 손에 꼭 쥔 채,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맑고 고요한 밤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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