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90화. 인정

sophie97
2026.07.31浏览数 28
"줄리가 한 말 다 맞아요.
변명하고 싶지 않지만,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파리로 가기로 한 전날,
가방을 다 싸 놓고
출판사에 이메일을 보내려다가
줄리가 본 기사를 나도 보게 됐어요.
그 이후로는 어떤 정신으로
한국까지 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요.
줄리 생각조차 못 했고,
줄리 부모님이랑 뵙기로 한 약속도
완전히 잊고 있었어요.
한국에 도착해서
그 사람이 무사한 걸 확인하고 나서야
줄리와 한 약속이 생각났어요."
내가 말하는 동안,
줄리앙은 미동도 없이 내 말만 듣고 있었다.
나는 오늘이 줄리앙을 만나는
마지막 날이라는 심정으로,
보태지도 줄이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말했다.
내 말을 끝까지 들은 줄리앙은
한동안 찻잔만 만지작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약속을 못 지킨 거네요.
내가 당신한테
그 사람을 잊게 해 주겠다고 했었잖아요."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줄리 잘못이 아니라...이건 모두 내 잘못이에요.
그 사람을 잊지 못한 상태에서
당신을 만나는게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요?"
"네..."
"그렇게까지 잊지 못하면서 왜 헤어졌어요?
그 사람이 끝낸 거에요?
아니면 당신이 끝낸 거에요?"
"미안한데...
그 사람과의 일이니까
그 부분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그건 왜 물어요?
이제 와서 그게 왜 궁금해요?"
"그 관계를 누가 끝냈느냐가 나한테는 중요해요.
왜냐하면...내가 이렇게 물어볼 거거든요.
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덮는다면..
당신도 그렇게 해줄 수 있어요?"
"줄리..."
나는 그의 질문에 할 말을 잃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건...줄리가 말한 지금 그 이야기는
말이 안 되는 거에요.
우리 관계는 더 이상은 무리에요."
"지금 말한 그 우리는 나랑 당신이에요?
아니면 그 엑스랑 당신인 거에요?"
"나랑 당신이요.
내 밑바닥까지 다 보였는데
내가 당신과 동등한 관계에서
우리 사이를 유지할 수 있겠어요?
나는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당신을 대하게 될 거고,
당신은 어느 때든 불쑥
지금 나한테 느낀 배신감을 떠올릴 거에요."
"그러니까...
나는 오히려 당신 밑바닥까지 다 봐서...
그래서 우리 관계를 다시 원점에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에요."
내가 지금까지 본 줄리앙은 차분하고,
다정하며, 배려심 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건 빙산의 일각이었던 것 같다.
그는 우리의 관계조차도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판단하고
결론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 간의 관계를...
더군다나 이성 간의 관계를
저렇게 단순하고, 명쾌하게
정의할 수 있다는 게
내게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나는 그 시작...
다시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나는 이제... 사랑 같은 거 안 하려고..."
<91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