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90화. 인정


"줄리가 한 말 다 맞아요.

 변명하고 싶지 않지만,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파리로 가기로 한 전날,

 가방을 다 싸 놓고

 출판사에 이메일을 보내려다가

 줄리가 본 기사를 나도 보게 됐어요.

 그 이후로는 어떤 정신으로

 한국까지 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요.

 줄리 생각조차 못 했고,

 줄리 부모님이랑 뵙기로 한 약속도

 완전히 잊고 있었어요.

 한국에 도착해서

 그 사람이 무사한 걸 확인하고 나서야

 줄리와 한 약속이 생각났어요."





내가 말하는 동안,

줄리앙은 미동도 없이 내 말만 듣고 있었다.





나는 오늘이 줄리앙을 만나는

마지막 날이라는 심정으로,

보태지도 줄이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말했다.





내 말을 끝까지 들은 줄리앙은

한동안 찻잔만 만지작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약속을 못 지킨 거네요.

 내가 당신한테

 그 사람을 잊게 해 주겠다고 했었잖아요."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줄리 잘못이 아니라...이건 모두 내 잘못이에요.

 그 사람을 잊지 못한 상태에서

 당신을 만나는게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요?"





"네..."





"그렇게까지 잊지 못하면서 왜 헤어졌어요?

 그 사람이 끝낸 거에요?

 아니면 당신이 끝낸 거에요?"





"미안한데...

 그 사람과의 일이니까

 그 부분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그건 왜 물어요?

 이제 와서 그게 왜 궁금해요?"





"그 관계를 누가 끝냈느냐가 나한테는 중요해요.

 왜냐하면...내가 이렇게 물어볼 거거든요.

 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덮는다면..

 당신도 그렇게 해줄 수 있어요?"





"줄리..."




나는 그의 질문에 할 말을 잃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건...줄리가 말한 지금 그 이야기는

 말이 안 되는 거에요.

 우리 관계는 더 이상은 무리에요."





"지금 말한 그 우리는 나랑 당신이에요?
 
 아니면 그 엑스랑 당신인 거에요?"




"나랑 당신이요.

 내 밑바닥까지 다 보였는데

 내가 당신과 동등한 관계에서

 우리 사이를 유지할 수 있겠어요?

 나는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당신을 대하게 될 거고,

 당신은 어느 때든 불쑥

 지금 나한테 느낀 배신감을 떠올릴 거에요."






"그러니까...

 나는 오히려 당신 밑바닥까지 다 봐서...

 그래서 우리 관계를 다시 원점에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에요."





내가 지금까지 본 줄리앙은 차분하고,

다정하며, 배려심 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건 빙산의 일각이었던 것 같다.

그는 우리의 관계조차도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판단하고

결론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 간의 관계를...

더군다나 이성 간의 관계를

저렇게 단순하고, 명쾌하게

정의할 수 있다는 게

내게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나는 그 시작...

 다시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나는 이제... 사랑 같은 거 안 하려고..."

 <91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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