纸上的家庭

爱情迷宫 02

“여주야, 혹시 그⋯ 나랑 자리 좀 바꿔주면 안 돼?”

여주

“⋯?”

“아, 뭐 다른 건 아니고⋯ 태형이한테 할 말이 있어서⋯!”

여주

“쉬는 시간에 하지, 왜?”

“쉬는 시간은 너무 짧잖아⋯.”

졸부라 칭해진 그 여학생이었다. 명찰을 보니, 이름은 진예나. 속이 훤히 다 보이는 질문을 하는데도 진예나는 창피한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괜히 귀찮게 말다툼을 이어가고 싶지 않아, 나는 책과 필통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얼굴색이 환해지는 진예나를 보니, 한심함에 헛웃음이 나왔네. 또 우는 애가 생기겠네.

“고마워, 여주야!”

‘내가 고마워해야지. 뒤통수 뚫리는 줄 알았는데.’

진예나의 자리는 복도 쪽 맨 뒷자리였다. 문 바로 앞이라 시끄럽긴 했지만, 김태형의 시선에서 벗어난다는 것만으로도 꽤 만족스러웠다.

“뭐야, 자리 바꿨어?”

여주

“응. 저 친구가 부탁해서. 불편하면⋯ 내가 다른 자리로 갈까?”

“아니야. 여기 앉아. 역겨운 냄새 풀풀 나서 기분도 좆같았는데, 훨씬 낫네.”

여주

“⋯응?”

하마터면 그냥 넘어갈 뻔했다. 무슨 욕을 저렇게 ‘나 오늘 아침에 토스트 먹고 옴’ 식으로 가볍게 웃으면서 하냐고.

놀란 눈으로 한 번 쳐다보다가 빨리 표정 관리를 하곤 볼펜을 잡으니, 옆에서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레이저를 한 듯 오른뺨이 따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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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너 김여주지? 난 박지민이야. 같은 반인데도 한 번도 대화를 못 해 봤네.”

여주

“어⋯ 그래?”

사실 관심 없었다. 졸부인 진예나를 싫어하든, 나와 대화를 안 해 봤든 그 모든 게 다 말이다. 영양가 없는 말에 계속 대꾸해 주기도 귀찮아서 나는 대충 반응했다.

심심한 내 반응에 할 말이 없는 건지 박지민도 바로 다른 말을 묻지 않았다. 이제 공부하면 되는 건가? 나는 박지민의 시선을 무시하며 볼펜을 고쳐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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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너 공부 잘하지? 부반장은 계속 너한테만 모르는 거 물어보던데.”

여주

“잘하진 않아. 애들 하는 만큼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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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오⋯ 방금 좀 재수 없었던 거 알지? 다른 애들이 들으면 욕하겠다. 나라서 봐 준 줄 알아-.”

‘⋯여기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능글맞은 박지민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주위에 대부분 사람들이 과묵해서 그런가, 이렇게 끊임없이 말을 거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 장난 섞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말을 안 걸 줄 알았던 것은, 내 착각이었다. 박지민은 내가 책으로 눈을 돌리기도 전에 계속해서 내게 말을 붙였고, 그 말들은 모두 쓸모없는 말들이었다. 물론, 얘 반응을 보니 내게만 그런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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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너희 부모님은 무슨 일 하셔?”

여주

“⋯그게 왜 궁금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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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왜 궁금하냐니. 화양고에서 부모님 직업 안 궁금해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여주

“⋯.”

박지민의 말이 맞았다. 온갖 귀한 집의 자제들만 모이는 이곳, 화양고등학교. 부모님의 직업이 곧 계급이었고, 그것들은 아이들 간의 계급으로 이어졌다.

나는 박지민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대답을 얼버무렸다. 한성 그룹은 단연코 대한민국 내 1위였지만, 여기서 한성 그룹이라고 말하면 그 형제들과 가족이라는 것을 까발리는 꼴이다.

당연히⋯ 친가족은 아니라는 사실도 발목을 붙잡았다.

여주

“⋯그냥, IT 사업 하셔. 평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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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해지네. 기업 이름은 안 알려줄 거야? 딸이 있는 기업들이 어디 있었더라⋯. 금화? 제레?”

여주

“다 아니야. 그러는 넌⋯ 부모님께서 무슨 일 하시는데?”

생전 이 질문을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어떻게 포장해 봐도 급을 나누려는 의도가 명백하게 보이는 질문. 나는 말을 돌리려 말을 꺼냈지만, 이 질문을 내뱉은 즉시 후회했다.

애써 시선을 피하려는 내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지, 박지민은 끈질기게 내 눈을 따라붙었다. 빛에 비쳐 반짝이는 두 눈동자가 마냥 맑은 것 같지만은 않아, 조금 긴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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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우리 부모님도 그냥 의류 사업 하셔. 평범하게.”

데자뷔가 느껴지는 건 기분탓일까.

여주

“기업 이름이 뭔데?”

내 질문에 박지민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입술 위에 검지를 갖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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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비-밀.”

이전에 올렸던 화들은 잊어버리십쇼… 이제 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