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 빙의글] 그 집 남자들

2화. 기억의 조각

“진짜 기억 못 하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여주는 숨을 멈췄다. 문고리를 잡은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들으면 안 되는 말이었다. 분명히 자신이 들을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발은 그 자리에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기억 못 하네. 대체 뭘. 누가. 왜. 머릿속에서 질문들이 한꺼번에 떠올랐지만, 그중 어떤 것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거실은 잠깐 조용해졌다. 정국이 낮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형, 근데 이건 너무 이상하잖아. 사람 얼굴을 보고도 어떻게 우리를 하나도 기억 못 해?” “그만해.” 석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지금 여주 방에 있어.” “자고 있겠지.” “아니.” 이번에는 태형의 목소리였다. “듣고 있을지도 몰라.”

 

 

여주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들킨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들킨 걸지도 몰랐다. 급하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려던 순간, 문 너머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여주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 그런데 손이 떨렸다. 담요를 붙잡고 침대에 앉은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주 씨.”

석진이었다. 여주는 일부러 잠에서 막 깬 사람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네.” “혹시 불편한 거 있나 해서요.” “아니요. 괜찮아요.” 문밖에서는 잠깐 대답이 없었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여주는 침을 삼켰다. 석진은 결국 더 묻지 않았다. “그래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불러요.” “네.”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여주는 천천히 숨을 뱉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그런데 더 이상 혼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이 집 전체가 자신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여주는 방금 들은 말을 계속 곱씹었다. 사람 얼굴을 보고도 어떻게 우리를 하나도 기억 못 해. 그 말은, 자신이 예전에 이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말이 되지 않았다. 석진도, 정국도, 태형도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이었다. 이름도 오늘 처음 들었다. 그런데 왜 태형이 준비해둔 물병의 메모는 이상하게 익숙했고, 왜 담요 냄새는 오래전부터 알던 것처럼 느껴졌을까. 여주는 잠을 자는 대신 가만히 침대에 앉아 새벽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거실에서는 된장찌개 냄새가 났다. 여주는 눈을 거의 붙이지 못한 채 문을 열었다. 부엌에서는 석진이 국자를 들고 있었고, 정국은 식탁에 엎드린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태형은 창가 쪽에 앉아 컵을 들고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여주가 나온 순간 아주 짧게 시선을 멈췄다. 그 짧은 정적 때문에 여주는 더 확신했다. 뭔가 있었다.

 

 

“잘 잤어요?” 석진이 먼저 물었다. 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거짓말이었다. 정국은 졸린 얼굴로 고개를 들더니 눈을 비볐다. “표정은 하나도 못 잔 사람 같은데.” 여주는 순간 대답을 잃었다. 정국은 장난처럼 말했지만, 시선은 의외로 진지했다. “낯선 데라 잠 안 왔죠?” “조금요.” “그럼 며칠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우리 집 적응하면 은근 편해요.”

 

 

우리 집. 또 그 말이었다. 여주는 식탁에 앉으며 물었다. “여기 원래 세 분이 같이 사셨어요?” 석진이 국그릇을 내려놓던 손을 잠깐 멈췄다. 정국은 태형 쪽을 흘끗 봤고, 태형은 아무 말 없이 컵만 내려놨다. 대답은 석진이 했다. “오래됐어요. 셋이 같이 산 지.” “가족이세요?” “가족 같은 사이죠.” 석진은 웃었지만, 그 웃음이 어딘가 조심스러웠다.

 

 

여주는 숟가락을 들고도 쉽게 밥을 먹지 못했다. 어제부터 궁금했던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저를 아세요? 예전에 만난 적 있어요? 그런데 물어보는 순간 이 집에 더는 머물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이상하게 그게 겁났다. 정국은 그런 여주 앞에 달걀말이 접시를 밀어줬다. “이거 먹어요. 형이 제일 자신 있어 하는 거.” 석진이 바로 정색했다. “제일은 아니야.” “그럼 제일 자신 없는 건 뭐예요?” “너 아침에 깨우는 거.” 정국은 억울하다는 듯 입을 벌렸고, 여주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 순간 태형의 시선이 닿았다. 여주는 웃음을 멈췄다. 태형은 여주를 보고 있었다. 어제처럼 조용하게, 하지만 피하지도 않고. 여주는 그 눈빛이 불편했다. 자신에게서 뭔가를 찾는 사람의 눈이었다. 결국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여주였다.

 

 

 

 

아침을 먹고 난 뒤, 여주는 잠깐 밖에 나가겠다고 했다. 짐 정리도 거의 끝났고, 근처 편의점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 올 생각이었다. 석진은 바로 일어나려고 했다. “같이 갈까요?” “아니요. 혼자 다녀올게요. 길도 익힐 겸.” 정국이 현관 쪽에서 신발을 신다 말고 말했다. “비 온다는데 우산 챙겨요.” “오늘 비 와요?” “아침 예보엔 온다던데.”

 

 

여주는 문득 어젯밤 메모가 떠올랐다. 비 오는 날엔 창문 너무 오래 열어두지 마요. 아직 비는 오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그 문장이 마음에 걸리는지 알 수 없었다. 현관 앞 우산꽂이에는 검은 우산, 투명 우산, 그리고 낡은 남색 우산 하나가 꽂혀 있었다. 여주는 이상하게 그 남색 우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거 써요.” 태형이 말했다.

여주는 고개를 돌렸다. 태형은 복도 끝에서 여주를 보고 있었다. “오래된 거지만 튼튼해요.” 여주는 우산 손잡이를 잡았다. 손에 닿는 감각이 묘하게 익숙했다. 가슴이 갑자기 답답해졌다. “이 우산…” “네.” 태형이 아주 천천히 대답했다. “예전에 누가 두고 간 거예요.”

 

 

“누가요?”

태형은 잠깐 침묵했다. 그 사이 석진이 부엌에서 나와 둘 사이를 봤다. 공기가 또 이상하게 굳었다. 태형은 결국 대답 대신 시선을 내렸다. “모르는 사람이요.”

 

 

거짓말. 여주는 이상하게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서는 순간, 등 뒤에서 정국의 목소리가 들렸다. “길 헷갈리면 전화해요.” “제가 번호를 모르는데요.” 정국은 잠깐 멈칫하더니 멋쩍게 웃었다. “아. 그러네.” 여주는 그 모습에 작게 웃고 말았다.

 

 

밖으로 나오자 하늘은 잔뜩 흐려져 있었다. 여주는 빌라 앞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낯선 동네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발이 익숙한 방향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편의점으로 가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골목 끝의 작은 놀이터 앞에 서 있었다. 오래된 미끄럼틀과 낡은 벤치. 그리고 벤치 옆에 심어진 작은 나무 하나.

 

 

그곳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장면 하나가 번쩍 스쳤다.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어린 자신이 벤치 아래에 웅크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앞에 서서 우산을 기울여주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낮은 목소리만 들렸다. “괜찮아. 여기 있으면 돼.” 그리고 또 다른 목소리. “형, 얘 데려가자.” 마지막으로 조금 더 어린 목소리. “감기 걸리면 어떡해.”

 

 

여주는 손에 든 우산을 떨어뜨렸다. 금속 손잡이가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숨이 가빠졌다. 기억인지, 상상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눈물이 먼저 차올랐다. 대체 뭐야. 나 왜 이래.

 

 

그때 뒤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여주야.” 이번에는 씨도, 님도 붙지 않았다. 여주는 천천히 돌아섰다. 태형이 서 있었다. 뛰어온 듯 숨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떨어진 우산을 주워 들고, 여주 앞에 섰다. “왜 따라왔어요?” 여주의 목소리가 떨렸다. 태형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여주의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그 눈빛이 너무 아파 보여서, 여주는 순간 화가 났다. 왜 저런 눈으로 보는지. 왜 자신보다 더 오래 기다린 사람처럼 서 있는지.

 

 

“저 알아요?” 여주가 물었다. “세 분 다 저 알아요?” 태형의 손끝이 우산 손잡이를 세게 쥐었다. 여주는 한 걸음 다가섰다. “어제 들었어요. 진짜 기억 못 하네, 그 말.” 태형의 표정이 굳었다. “여주야.” “대답해요.” “지금은…” “지금은 뭐요? 또 기다리라고요?”

 

 

 

 

태형은 한참을 말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었고, 흐린 하늘에서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여주의 볼 위로 차가운 감각이 스쳤다. 태형은 우산을 펼쳐 여주 쪽으로 기울였다. 그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여주는 또 숨이 막혔다. 그리고 태형이 말했다.

 

 

“우리가 널 버린 게 아니야.”

 

 

여주는 그대로 굳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그 말 하나가 너무 아프게 박혔다. 마치 오래전부터 듣고 싶었던 말처럼. 태형은 여주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네가 우리를 잊은 거야.”

 

 

다음 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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