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 단편 모음

이제 더는 숨어 지내지 않아도 돼

평소라면 나는 궐의 안전한 담벼락을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웃 왕국과 우리 가문 사이의 긴장이 갑작스럽게 고조되면서, 나는 정략적인 평화의 제물로 멀리 보내지게 되었다. "너의 혼례만이 이 땅의 평화를 지킬 것이다." 아바마마의 무겁고 단호한 목소리가 여전히 머릿속을 사정없이 맴돌며, 내 영혼을 짓누르는 왕실의 의무를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도성 외곽의 대문을 무사히 통과할 때까지 내 신분을 숨기기 위해, 화려한 왕실의 깃발들을 의도적으로 전부 치워버린 고요하고 초라한 행렬이었다.

비단 커튼의 좁은 틈새를 통해, 나는 나의 전속 호위 무사인 지석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석이는 굳은 표정으로 속내를 전혀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채, 내가 탄 가마 곁에서 묵묵히 말을 몰았다. 그를 향한 내 마음은 가슴속에 납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나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했다. 낯선 이에게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가고 나면 지석이의 임무도 끝이 나고 궐로 돌아가 버릴 것임을, 나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울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타국 땅에 홀로 갇힌 죄수 신세가 될 터였다.

그때 갑자기, 무거운 침묵을 깨부수며 등골이 오싹해지는 거친 함성 소리가 사방을 찢어발겼다.

칼과 칼이 부딪히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우리 주변을 가득 채웠고, 가마 벽을 스치며 위험하게 가르는 날카로운 화살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말들이 공포에 질려 날뛰기 시작하자 가마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미처 위험을 인지하기도 전에, 한 낯선 사내가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살기등등한 눈빛을 한 사내는 가마 안으로 억지로 몸을 밀어 넣으려 들었다. 내가 겁에 질려 뒤로 움츠러든 순간, 어디선가 검 한 자루가 홀연히 나타나 치명적인 정밀함으로 그의 등 뒤를 그대로 관통했다. 사내는 가마 바닥 위로 무겁게 쓰러졌다. 나는 극한의 공포에 짓눌려 비명을 질렀지만, 열린 문틈 사이로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에 그가 서 있었다. 나의 구원자. 나의 지석이.

그는 피 묻은 검을 재빨리 검집에 꽂아 넣고는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내 손을 꽉 잡았다. 쓰러진 사내의 몸 위로 나를 조심스럽게 이끌어낸 그는, 갑옷을 두른 단단한 두 팔로 내 허리를 감싸 안더니 내 몸을 가뿐하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요란한 전장의 열기 속에서 나를 빠르게 구출해 냈다. 녀석은 타고난 무관답게 날렵하고 능숙한 몸짓으로 혼란을 뚫고 지나가더니, 본래의 왕실 행렬과는 완전히 따로 분리되어 대기 중이던 전혀 다른 가마 안으로 나를 기대듯 밀어 넣었다.

"괜찮아?" 지석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녀석은 따뜻한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다정하게 감싸 안았고, 혹시 어디 숨은 상처라도 없는지 샅샅이 살핀 뒤 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난 괜찮아. 이거 전부... 네가 계획한 거야?" 내 몸이 여전히 아드레날린으로 떨려오는 와중에, 나직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적들은 아니지만, 이 가마는 맞아." 지석이가 낮게 숨 가쁜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굳어 있던 녀석의 얼굴이 스르륵 녹아내렸고, 그는 내 이마에 다정하고 여운이 남는 입맞춤을 꾹 눌러 내렸다. "이제 더는 숨어 지내지 않아도 돼. 아무도 우리를 찾지 못할 아주 먼 곳으로 떠나자."

걷잡을 수 없는 안도감의 파도가 나를 집어삼켰다. 녀석이 나를 제 품 안으로 단단히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에 꼭 안아주자, 나 역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서서히 가라앉는 내 불안감을 가라앉히기라도 하듯 녀석의 품은 든든했다. 창밖으로 가짜 가마의 바퀴가 끼익거리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우리를 왕실이라는 거대한 감옥으로부터 멀리 이끌어내어 둘만의 미래로 데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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