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택 외곽 산맥 깊은 곳, 이끼 낀 암벽 사이에 새겨진 은빛 주술 인쇄는 핏빛 밤하늘 아래서 기묘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가문이 연준의 영역을 감시하고 수빈의 흔적을 쫓기 위해 마지막으로 남겨둔 최후의 추적 봉인이었다.
수빈은 암벽 앞에 서서 가만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문의 차가운 눈총 속에서 은장도 하나 제대로 쥐지 못해 떨던 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손 끝에 순혈의 피가 안겨준 붉은 마력이 자스민 향처럼 그윽하게 번져 나가고 있었다.
“내가 할까?”
뒤에서 걸어 나온 연준이 수빈의 어깨에 단정한 턱을 얹으며 물었다.
연준에게서 풍겨오는 짙은 장미 향이 수빈의 온몸을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아뇨, 제가 해요. 날 옭아매던 마지막 끈이니까.”
수빈이 차분하게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밀었다.
수빈의 손끝에서 시작된 붉은 마력이 암벽의 은빛 봉인을 부드럽게 감쌌다.
이어 연준이 수빈의 손 위에 제 기다란 손을 포개어 잡았다.
두 사람의 마력이 완벽한 파동을 이루며 하나로 얽혀들자, 수년간 단단히 닫혀있던 가문의 봉인이 소리도 없이 허공으로 산산조각 나며 날아갔다.
가문이 오랫동안 빌미로 삼던 마지막 흔적마저 완벽하게 소멸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그 누구도 연준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할 수 없었고, 수빈이라는 존재를 가문의 규율로 옭아맬 수도 없었다.
사스락-
산맥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3구역의 밤 숲은 밤안개 속에 휩싸여 이상하리만큼 조용하고 차분했다.
“진짜로... 전부 끝났네요.”
수빈이 밤바람을 맞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수빈의 붉은 눈동자에는 더 이상 과거 가문에서 느끼던 열등감이나 불우했던 기억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포식자의 품 안에서 비로소 완성된 단단함과 평온함만이 가득했다.
연준은 수빈의 어깨에 걸쳐진 겉옷을 가만히 추스려주며, 수빈의 마디 굵은 손을 찾아 손가락을 하나씩 얽어매었다.
차가운 촉감이 손가락 사이로 기분 좋게 스며들었다.
“기분이 어때, 최수빈.”
연준이 다정한 눈빛으로 수빈의 측태를 바라보며 물었다.
“생각보다 무덤덤해요. 평생 나를 괴롭히고 짓눌러온 괴로움이었는데...
이렇게 연준 씨랑 손을 잡고 있으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네요.”
“혼자였으면 계속 아팠겠지. 하지만 이젠 혼자가 아니잖아.”
연준의 말에 수빈은 참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이 3구역에 제 발로 들어왔을 때만 해도 자신의 목숨을 던져 인정받으려 했던 슬픈 열등생이었지만, 지금은 밤의 지배자 곁에서 가장 완벽하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연준 씨 말이 맞아요. 가문의 수치로 죽어가는 것보다, 연준 씨 옆에서 영원히 밤을 살아가는 게 제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어요.”
수빈의 진심 어린 고백에 연준의 입꼬리가 나른하고 우아하게 말려 올라갔다.
연준은 잡아쥔 손에 힘을 주며 수빈의 이마에 살포시 제 이마를 맞대었다. 두 사람의 붉은 눈동자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비추었다.
“뱀파이어의 영원이라는 시간이 생각보다 꽤 길고 지루하거든.”
연준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지루할 틈이 없게, 날 계속 즐겁게 해 줘야 해. 룸메이트이자, 내 유일한 반쪽으로서.”
“연준 씨가 심심하다고 느낄 겨를도 없게 해 드릴게요.”
수빈이 장난스레 대답하자, 연준은 피식 웃으며 수빈의 발그레해진 귀 끝을 손가락으로 다정하게 문질렀다.
두 사람을 가로막던 수많은 경계와 시련은 끝났고, 두 사람의 서늘한 체온은 밤공기 속에서 서로를 채워주며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멀고 조용한 길, 달빛은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 걸음마다 긴 그림자를 남겼다.
포식자와 먹잇감의 기묘한 대면으로 시작해, 헌터와 뱀파이어라는 극단적인 상극을 넘어, 마침내 서로의 유일한 구원이자 영원이 된 두 사람.
길고 차가웠던 방황의 밤은 막을 내렸고, 연준과 수빈이 함께 써 내려갈 영원한 평화가 비로소 깊고 아늑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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