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弱者英雄虛擬續作】因為你太漂亮,我讓你哭了。

시은을 빤히 바라보던 수호가 그대로 발에 힘을 실어 이어폰을 짓눌렀다.

 

‘드득.’

 

신발 밑창과 바닥 사이에 낀 이어폰이 비명이라도 지르듯 기분 나쁜 마찰음을 냈다. 그 소름 끼치는 소리에 시은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바닥에 깔린 이어폰 위로 시은의 시선이 느릿하게 머물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수호의 무심하고도 나른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수호는 웅성거리는 주변 아이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오직 시은의 흔들리는 눈동자만을 눈에 담으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 낯선 반응에, 수호는 문득 궁금해졌다. 

 

시은의 저 고요한 세상에 나라는 물방울이 서서히 번져가게 될까. 아니면, 결국 참지 못하고 그 평온함을 내 손으로 온통 휘저어 놓게 될까.

 

수호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느릿하게 달싹이며, 오직 시은만이 읽을 수 있는 물음을 그려냈다.

 

‘……왜?’


그 짧은 입모양 속엔 시은의 단단한 벽을 헤집어보고 싶은, 수호의 얄궂은 호기심이 가득 고여 있었다.

 

 

 

 

 

 

 

 

 

제3화. 뒤바뀐 진심

 

“발.”

 

시은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자신의 이어폰이 수호의 신발 아래 깔려 있음에도, 시은은 비명이나 당혹감 대신 서늘한 정색을 택했다.

 

그 반응이 꽤나 흥미롭다는 듯 수호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수호는 발밑의 이어폰을 툭 차듯 건드린 뒤, 아주 느릿하게 허리를 숙여 그것을 주워 올렸다. 손가락 끝으로 흙먼지를 털어내는 시늉을 하며, 수호는 시은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 속을 파고들 듯, 집요하고도 고요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아, 이거?”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수호가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사과라기보다는 상대를 느긋하게 감상하는 법을 아는 포식자의 웃음이었다.

 

“미안. 워낙 작아서, 내 눈엔 잘 안 띄더라고.”

 

수호는 흙먼지가 잔뜩 묻은 이어폰을 시은의 코앞까지 가까이 내밀었다. 그러고는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 낮게 읊조렸다.

 

“자, 여기.”

 

하지만 시은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수호의 손에 들린 이어폰을 거칠게 낚아채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가 앉을 뿐이었다.

 

시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수호는 허공에 멈춘 손가락을 가만히 매만졌다. 거절당한 민망함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는 듯, 자신을 뿌리치고 돌아선 시은의 건조한 뒷모습 위로 묘한 흥미가 서린 시선이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그제야 뒷문 근처, 짙은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이 모든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강우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우영의 머릿속에는 방금 전 선생에게 끌려 나간 이한의 뒷모습이 스치듯 지나갔다. 명색이 제 밑에 둔 친구라지만, 상황 파악 못 하고 앞뒤 재지 않은 채 들이받는 그 무모함은 우영이 보기에 참 멍청하고도 가소로운 짓이었다. 제 성질 하나 못 이겨 판을 망쳐버리는 꼴이, 오늘따라 유독 한심하게 비쳤다.

 

우영은 그런 하찮은 생각은 이내 털어버리고, 시은의 이어폰을 짓밟고 선 전학생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소매 끝에서 은은하게 빛을 내는 시계와 지나치게 여유로운 태도. 우영은 본능적으로 저 전학생이 가진 '무게'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결이 좀 다르네. 잘만 엮으면 꽤 재미 좀 보겠어.’

 

나쁘지 않은 판이 짜일 것 같다는 계산이 서자, 우영의 매끄러운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우영은 주머니에 깊숙이 손을 찔러 넣은 채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수호의 시선이 머물던 시은의 어깨 위로 팔을 툭 걸치며, 보란 듯이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시은아, 우리 담배 피우러 가기로 했잖아~ 그치?”

 

말은 다정하게 흘러나왔으나, 시은의 어깨를 감싸 쥔 우영의 손등 위로는 핏줄이 도드라질 만큼 힘이 들어갔다. 투박한 손가락 끝이 시은의 어깨뼈를 으스러뜨릴 듯 꽉 움켜눌렀다.

 

우영은 그 상태로 고개를 까닥이며 수호를 향해 눈인사를 건넸다. 굽신거리는 기색 따위는 전혀 없는, 서글서글하지만 묘하게 오만한 포식자의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비릿하게 웃으며 짧게 덧붙렸다.

 

“시선 좀 거두지? 우리 애가 낯을 좀 가려서.”

 

우영은 수호를 향해 싹싹하게 웃어 보이며, 제 품에 갇힌 시은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마치 대화의 주도권이 완전히 자기에게 있다는 걸 과시하려는 듯, 여유로운 태도로 수호의 동의를 구하는 척 말을 이었다.

 

“얘, 잠깐만 빌려 갈게. 전학생.”

 

잠시 장난감을 빌려 가겠다는 듯 가벼운 말투였지만, 시은을 옭아맨 손아귀에는 풀릴 기미가 없는 위압적인 힘이 실려 있었다. 돈 냄새가 짙은 전학생에게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는 척하면서도, 시은이 제 소유물임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영악한 태도였다.

 

그 노골적인 취급에 시은이 불쾌한 듯 고개를 돌렸다. 제 어깨를 짓누르는 우영의 손길이 오물이라도 되는 양, 시은은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리며 낮게 쏘아붙였다.

 

“……놔.”

 

그 무심한 대꾸에는 구걸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상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서늘한 거부감만이 공기 중에 낮게 깔렸다.

 

예상치 못한 단호함에 우영의 눈매가 보기 좋게 뒤틀렸다. 싹싹하게 웃고 있던 입꼬리가 순식간에 굳어 내리며 교실 안으로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전학생 앞에서 보란 듯이 과시하려던 주도권이, 시은의 덤덤한 태도에 형편없이 일그러진 탓이었다.

 

우영은 시은의 어깨에 걸쳤던 팔을 느릿하게 빼냈다. 대신, 그는 시은의 귓가로 몸을 낮게 숙였다. 겉보기엔 마치 다정한 귓속말이라도 나누는 듯한 은밀한 각도였지만, 우영은 시은의 손에 꼭 쥐어져 있던 낡은 단어장을 손끝으로 가볍게, 그러나 위협적으로 툭 건드렸다.

 

수호의 시선이 닿지 않을 교묘한 각도를 유지하며, 오직 시은에게만 들릴 만큼 숨을 섞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닥치고 따라와. 다 찢어버리기 전에.”

 

우영의 낮은 경고가 떨어지자, 시은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미세하게 흔들렸다. 짧은 침묵 끝에 시은은 입술을 피가 맺힐 듯 세게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굴복을 확인한 우영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호선을 그렸다. 마치 탐나는 전리품을 챙기듯, 우영은 승리감에 취해 시은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쥔 채 교실을 나섰다.

 

수호는 팔짱을 낀 채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느릿한 시선으로 쫓았다. 소란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 홀로 남겨진 수호의 입가에는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소가 고요하게 머물러 있었다. 그것이 단순한 조롱인지, 아니면 아주 흥미로운 유흥거리를 발견한 자의 즐거움인지, 그 깊이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교실을 나선 두 사람은 말없이 복도를 가로질러 학교 뒤편으로 향했다. 사람의 발길이 뚝 끊긴, 소각장 근처의 외진 공터.

 

건물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그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우영은 시은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팔을 거칠게 내던지듯 떼어냈다. 그리곤 반동을 이용해 시은의 가슴팍을 벽 쪽으로 세게 밀어붙였다.

 

“너, 전학생이랑 되게 즐거워 보이더라? 전학 오자마자 새 주인이라도 찾은 거야?”

 

비릿한 조소가 섞인 목소리였다. 우영은 낄낄거리며 시은의 짓눌린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수호에게 휘둘리던 시은의 모습이, 우영에게는 그저 주제 파악 못 하고 꼬리 치는 우스운 꼴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손길이 닿을 때마다 고개가 무력하게 꺾이는 와중에도, 시은은 입술을 짓이기며 우영을 꼿꼿이 노려봤다. 짐승 같은 눈엔 서슬 퍼런 독기가 서려 있었다.

 

“내가 그 눈깔 치우라고 했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영의 투박한 손바닥이 시은의 머리를 거칠게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둔탁한 충격이 이어질 때마다 시은의 고개가 맥없이 꺾였지만, 그 기세만큼은 좀처럼 죽지 않았다. 오히려 시은은 입안이 터진 듯 비릿한 피 맛을 삼키며, 더욱 살벌한 독기로 우영을 쏘아보았다.

 

그 독기어린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우영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듯 낮게 중얼거렸다.

 

“왜, 한 대 치게? 쳐봐. 쳐보라고, 씨발.”

 

도발 섞인 명령에 참다못한 시은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우영은 기다렸다는 듯 가볍게 손을 뻗어 시은의 가느다란 손목을 낚아챘다.

 

 

“하, 야, 봤냐? 이 새끼가 진짜 날 치려고 하네?”

 

주변에 몰려든 아이들과 함께 비릿한 폭소를 터뜨리던 우영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지워졌다. 서늘하게 식은 눈동자가 시은을 훑는가 싶더니, 우영은 그대로 시은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바닥을 향해 내던지며 말했다.

 
"확실하게 밟아."

 

우영의 서늘한 명령과 함께 무자비한 발길질이 쏟아졌다. 시은은 차가운 흙바닥에 웅크린 채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퍽' 둔탁한 타격음이 공터를 울릴 때마다 시은의 몸이 거칠게 들썩였다. 하지만 짓눌린 팔 사이로 드러난 눈빛만큼은 끝까지 꺾이지 않은 채 타오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촥, 촥—.’

 

정적을 찢고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려왔다. 몇 번의 마찰 끝에 라이터 불꽃이 일렁였고, 곧이어 매캐한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길게 흩어졌다. 연기 너머로, 수호가 느릿하게 공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와, 여기 되게 재밌게 노네. 나만 빼놓고.”

 

수호는 한 손을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은 채,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를 느릿하게 빨아들였다. 하얀 연기를 허공으로 길게 내뱉는 그의 눈길은 마치 흥미로운 연극이라도 관람하듯 무심했다.

 

난장판이 된 공터를 구석구석 살피며 걷는 걸음걸이엔 서두를 것 하나 없는 여유가 넘쳤고, 일말의 당황조차 서려 있지 않은 그의 얼굴에는 오히려 잘 짜인 유흥거리를 마주한 자 특유의 고요한 즐거움마저 감돌았다.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수호의 시선이, 마침내 흙바닥에 처박힌 채 독기를 내뿜는 시은의 눈동자에 멎었다. 우영과 주변에 있던 무리가 일시에 멈칫하며 수호를 노려봤다. 그중 하나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가래 끓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씨발, 저건 또 뭐야?”

 

수호는 신발 끝으로 담배꽁초를 지그시 비벼 끄더니, 마치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도 받은 양 고개를 설핏 까딱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텅 빈 공터와 씩씩거리는 우영 일행을 느릿하게 훑던 시선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

 

수호는 한 손으로 제 가슴팍을 툭툭 가리키며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렸다. 그리곤 마치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아주 나른하고 뻔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시은이 수호천사… 뭐, 그런 거?”

 

말을 마친 수호는 가증스럽게 양쪽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씩 웃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사를 뱉으면서도 눈동자만큼은 상대를 벌레 보듯 비웃었다. 수호의 헛소리에 공터에는 기괴한 정적이 감돌았다. 우영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며 낮게 읊조렸다.

 

“……저 시발새끼가 진짜. 야, 뭐 해? 안 패고!”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들이 시은을 내팽개치고 일제히 수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주먹과 발길질이 사방에서 쇄도하는 일촉즉발의 상황. 하지만 수호는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바닥에 웅크린 시은을 힐끗 내려다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 짐짓 울먹이는 시늉을 했다.

 

“어떡해, 시은아! 나 너무 무서워……!”

 

수호의 가증스러운 엄살이 이어지는 사이, 까불거리던 그의 왼쪽 뺨으로 묵직한 주먹이 날아들었다.

 

‘퍽!’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수호의 고개가 옆으로 거칠게 꺾였다. 짧은 정적. 수호는 그 상태 그대로 멈춰 선 채, 느릿하게 손을 올렸다. 얼얼하게 달아오른 뺨을 쓸어내리는 손길엔 당황보다 묘한 고양감이 서려 있었다. 수호의 입술 사이로 억누르지 못한 웃음이 비죽 새어 나왔다.

 

“……나 진짜 맞았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머금은 채, 수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바닥의 시은에게로 흘렀다. 하지만 가까이서 마주한 시은의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처참했다. 터진 입술과 피멍으로 부어오른 뺨. 원래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진 시은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수호의 눈동자에서 일렁이던 장난기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찰나의 침묵. 무언가 뜨거운 것이 속을 긁고 지나가는 것과 동시에 수호의 몸이 튀어 나갔다.

 

‘퍽-!’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놈의 안면으로 수호의 주먹이 가차 없이 박혔다. 비명 지를 틈도 주지 않는, 망설임 없는 일격이었다. 첫 번째 놈이 바닥으로 고꾸라지기도 전에 수호의 몸이 회전하며 옆에 있던 놈의 턱을 걷어찼다. 이어지는 복부, 다시 안면.

 

단 한 동작도 끊이지 않는 유려하고도 잔인한 폭력이 숨 쉴 틈 없이 이어졌다. 방금까지 "무서워"라고 칭얼대던 소년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오직 효율적으로 상대를 부숴나가는 짐승만이 남았다.

 

비명 소리가 공터를 가득 메우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무리는 이제 바닥을 꼴사납게 나뒹굴며, 으깨진 자존심과 안면을 부여잡은 채 밭은 신음을 내뱉을 뿐이었다. 수호는 마치 가벼운 운동이라도 마친 사람처럼, 거칠어진 숨 하나 없이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툭툭 털어 정리했다.

 

“아, 시시해.”

 

툭 내뱉는 목소리엔 진한 지루함이 묻어났다. 방금까지 안광을 번뜩이며 상대를 사냥하던 포식자의 기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느덧 수호의 눈빛은 다시 특유의 나른하고 몽롱한 상태로 돌아와, 마치 이 모든 난장판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무심하게 허공을 유영했다. 수호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바닥에 쓰러진 시은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툭 하고 무심하게 손을 내밀었다.

 

 

“시은 씨, 언제까지 누워 있을 거야? 나 팔 아픈데.”

 

농담 섞인 말투였지만 시은의 반응은 차가웠다.

 

‘짝—!’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시은이 수호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바닥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킨 시은은 중심을 잃고 휘청이면서도, 끝내 수호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엉망이 된 몰골로 절뚝거리며 교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수호의 손이 허공에서 천천히 움켜쥐어졌다. 거절당한 온기가 손바닥 안에서 차갑게 식어갔다. 수호는 자신의 빈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이내 멀어져 가는 시은의 등 뒤로 크게 소리쳤다.

 

“……와, 연시은! 너 진짜 너무해, 나 지금 상처받았어!”

 

가슴팍에 손까지 얹고 짐짓 서운한 표정으로 외쳐 보았지만, 시은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대답 대신 돌아온 건 멀어지는 절뚝거림뿐. 시은이 완전히 건물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수호는 그 자리에 서서 빤히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시은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수호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보통 이럴 땐 고맙다고 해주지 않나? 사람 성의를 이렇게 무시하네.”

 

입가에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수호의 눈동자에는 전보다 더 짙은 호기심과 알 수 없는 고요함이 내려앉아 있었다. 수호는 거절당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깊숙이 쑤셔 넣었다. 제 호의를 가차 없이 짓밟고 사라지는 저 독종 같은 뒷모습이, 수호에게는 그 어떤 싸움보다 신선하고 즐거운 자극이었다.

 

한편, 교무실에서는 담임의 지루한 훈계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한의 신경은 온통 복도 너머, 아까 제 눈앞에서 우영 일행에게 끌려가던 시은의 뒷모습에 쏠려 있었다.

 

당장이라도 담임의 말을 끊고 튀어 나가고 싶었지만, 하필 사고를 친 직후라 꼼짝없이 붙들려 산더미 같은 깜지 숙제까지 떠안아야 했다. 펜을 쥔 손가락 끝이 초조하게 떨렸다. 교무실에 갇혀 억지로 글자를 채워넣는 내내, 이한의 머릿속에는 시은의 무심하고도 단단했던 뒷모습이 잔상처럼 박혀 떠나지 않았다.

 

겨우 풀려나 복도로 나온 이한의 발걸음이 시은이 끌려갔던 방향에서 잠시 멈춰 섰다. 지금이라도 가봐야 하나. 하지만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부로 끼어들 수 없는 시은의 서늘한 성격을 알기에 이한은 입술을 짓씹으며 교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이한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시은의 자리를 훑었다. 주인 없는 책상의 서늘한 기운이 자꾸만 마음 한구석을 죄책감으로 찔러댔다. 결국 자리에 앉지 못한 이한은 보건실에 들러 밴드 하나를 받아왔고,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시은의 책상 위에 조용히 올려두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앞문이 거칠게 열리며 시은이 들어섰다.

 

그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 이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교실 안으로 들어온 시은의 얼굴은 처참했다. 터진 입술 사이로 맺힌 핏방울과 눈가에 번진 시퍼런 멍자국. 보는 것만으로도,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아도 그간의 참혹함을 짐작게 했다.

 

그 몰골을 마주한 이한의 책상 위 손등에 파르르 힘이 들어갔다. 지켜주고 싶었는데,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뒤늦게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지독한 무력감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한의 전신을 짓눌렀다.

 

자리에 앉은 시은이 책상 위에 놓인 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뒤따라 들어온 수호가 아무렇지 않게 시은의 옆자리에 앉았다. 시은은 한참을 망설이다, 시선을 책상에 고정한 채 나직하게 물었다.

 

“……이거, 너야?”

 

수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 것이 아니라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수호는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밴드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제 뒤에 서 있는 이한을 힐끗 살폈다.

 

딱딱하게 굳은 채 시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한의 절박한 눈빛. 수호는 그 찰나의 찰나에 모든 상황을 읽어냈다. 이 밴드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주인이 지금 얼마나 한심하게 입을 꾹 다물고 있는지까지.

 

수호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그는 보란 듯이 이한을 향해 씨익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응. 내가 의외로 좀 섬세해.”

 

찰나의 침묵이 흐르고, 시은은 고개를 숙인 채 아주 작고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마워.”

 

그 짧은 한마디에 수호의 눈이 잠시 크게 뜨였다가, 이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수호의 입가엔 금세 특유의 장난기 어린 미소가 번졌다.

 

“연시은.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그 모든 대화를 바로 뒤에서 듣고 있던 이한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준 건데.’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한마디가 뜨겁게 혀끝을 데웠다. 사실은 내가 보건실까지 뛰어가서 가져온 거라고, 너 걱정돼서 놓아둔 거라고.

 

당장이라도 수호의 멱살을 잡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교실 안을 가득 채운 반 아이들의 서늘한 시선들이 족쇄처럼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결국 이한은 짓무른 입술만 짓씹을 뿐,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망연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애써 가져온 진심이 수호의 가벼운 농담 한마디에 형체도 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제 눈앞에서 보란 듯이 진실이 뒤바뀌는 현장을, 그저 비겁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이 초라했다.

 

이한은 책상 밑으로 감춘 주먹을 손톱이 살을 파고들 만큼 거칠게 움켜쥐었다.

 

비겁한 침묵 속에서, 시은이 처음으로 내비친 온기는 엉뚱한 곳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이한은 그저 멀어지는 그 온기를 지켜보는 것 외엔.

정말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