作者正在觀察
你願意留在我身邊嗎?


나는 김태형에게 종이와 펜까지 빌려가면서, 바닥에 앉아 침이 다 마르도록 「악녀 자립하기 작전」에 대해 설명하였다.

설계는 간단했다. 도안도 간단하고, 내가 설명해야 할 내용도 하다 못해 굉장히 간단했다.


한예화
대충 어떤 내용인지 한 번 설명해보자면…….


한예화
우선 처음부터 시작하자. 그러니까 등장인물 소개부터 시작하겠다 그 소리지.


한예화
너 이여주랑 나, 알지?


김태형
니네 둘이야 당연히 알지. 이여주는 초록 눈에 갈색 머리, 너는 한예화고.


한예화
아니 병신아…. 우리 둘의 관계를 아냐고. 우리 둘이 무슨 사인지 아느냐 이 말이야.

내가 이 잘생긴 미친 놈에게 설명을 해 주기가 힘들어서 머리를 한 번 쓸어넘기자 김태형이 가만히 눈을 끔벅거리며 바라보고 앉아 있다.


한예화
그러니까, 무슨 사인지 알지?


김태형
…친구가 아니라는 거 정도야 알고 있지. 그냥 스쳐가는 사람이 아닌 것도, 물론 알고.


한예화
조금만 도와줘. 여기에서 난 천하의 개쓰레기로 보여야만 해. 오케이?

나는 펜을 슥슥 놀리며 대략적인 구도를 그렸다.

【 이여주=여주인공, 한예화 나=악역 김태형=완전 개멋진 남주인공 】


김태형
남주인공이라는 건, 무슨 뜻이야?


한예화
남주인공이라는 건 여주인공이 뚜다리 맞고 있을 때마다, 파워레인저처럼 짠 하고 나타나서 이 구닥다리 새끼들 플래그 좀 똑바로 세워라! 하고 구해준다는 뜻이야.

김태형은 굉장히 당황한 표정이었다. 무슨 이유였는지야 간단히 알 수 있었다.


한예화
파워레인저는 내가 살던 곳에서 영웅이라는 뜻이야.


김태형
…그으렇구나. 실런에 살다 오지 않았어?


한예화
응? 응, 그야 그랬지.


김태형
실런이 티브루아 대륙에서 그나마 가장 표준어를 구사하는 곳 아니야?

티브 뭐라고?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김태형을 바라보았다. 물론,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그래, 뭐가 자연스러울까 한 번 생각해보자.

아, 그러냐. 내가 대륙이고 뭐고 그런 설정을 안 잡았는데 이 세계 와 보니까 있더라고. 깔깔. 뭐 그런 거.

난 최대한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둘러댔다.


한예화
빈민가 속어야, 내가 그런 데서 자랐거든. 판자촌 있잖어.

몸의 주인한테는 좀 미안하게 됐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 둘러댈 것도 없고. 엄청 슬프게도 사실이니까.


한예화
풍족하진 않았지만 빌어먹고 살진 않았으니 걱정은 하지 말고.

반 농담으로 던진 마지막 말에 김태형이 크게 동요한다. 우왕, 눈알에서 막 지진이. 우왕.


김태형
내가 너 걱정한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


한예화
아, 걱정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남주인공이 악역을 걱정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스토린데. 이 상황에서 개쓰레기 악역 역할이 나올 수라도 있을라나.

꿋꿋이 헛기침을 한 내가, 한예화의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비장하게.


한예화
뭐 그냥 신경쓰지 말고, 나는 이여주를 괴롭힐 거야.


김태형
응.


한예화
…….


김태형
왜?


한예화
신경 안 쓰여?


김태형
뭐가?


한예화
내가 방금 이여주를 괴롭힌댔잖아.


김태형
그런데?


한예화
이여주라니까?


김태형
나도 알아들었어. 이여주라며?


한예화
이여주가 나한테 괴롭힘을 당하게 될 거라니까?


김태형
좋아. 이해했어. 넌 이여주를 괴롭힐 거고, 걘 괴롭힘을 당할 거다. 근데 그게 뭐? 그렇게 상세하게 설명해줘야 할 일이야?

시발 좆됐다.

얘는 내가 이여주를 괴롭히고 말고 아무런 신경을 안 쓰고 있다.


한예화
그니까 말이야, 김태형. 남주인공은 보통 여리고 연약한 여주인공이 쳐맞는다고 그러면 구하려고 나타나는 게 정상이거든?


김태형
그럼 민윤기 그 새끼가 남주인공 하겠네.


한예화
좋아, 됐네. 너 민윤기 질투하지? 이여주 곁에 있어서 말이야, 그러니까 그 감정을.


김태형
내가 이여주 옆에 있는 애를 왜 질투해? 걘 그냥 별로잖아. 희멀개서는.


한예화
아니 내가 얘를 진짜,

주먹을 꾹 쥐고 부들거리고 있으려니까, 짜증이 치밀어서 다시 한 번 말했다.


한예화
니가 해. 니가 해야 돼.


김태형
그러니까 그거,


한예화
그냥 좀 하라면 해라, 자식아.

김태형은 가만히 내 손을 잡는다, 전깃줄에 손이 닿은 거 같은 느낌에 움찔 뒤로 물러서려는데 김태형이 손을 매만진다.

핸드크림을 발라주는 거 같은 손길이지만 크림 같은 건 없다.


김태형
좋아.

아니, 갑자기 순순히?

나는 당황해서 살짝 찌푸린 눈으로 김태형을 바라보았다.

김태형은 나에게 살짝 미소짓더니 입을 연다.


김태형
니가 만드는 모든 작전에 내가 참여할게.


김태형
또, 뭐든 시키면 들을게.


한예화
…….

김태형이 파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앞으로 숙인다. 한예화의 작은 체구가 티가 나도록.


김태형
대신 다 끝나고 나면, 소원 하나를 들어줘. 딱 하나야.

약속하자는 듯이 새끼손가락을 들어보이는 태형에 나는 검지를 들었다. 설명하는 모양새로.


한예화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안 되는 예시도 좀 넣어줄게, 뭐 예를 들면 무지막지한 금은보화 같은 거 말이야.


한예화
아니면 노예계약이라든가.

남의 몸 막 쓸 수도 없을 뿐더러, 한예화한테 있는 돈이라고는 벨라가 열심히 일해서 돌아다니며 맛있는 음식이라도 사 먹으라고 쥐여준 쌈짓돈뿐이니까.

그것도 한예화가 막 못 쓴다고 캐리어 맨 밑 칸에 넣어놓고…. 아, 눈물 나는 스토리네.

김태형은 자연스럽게 내 검은 머리카락을 만진다.

그만 해, 이 새끼야! 심장 뛰잖아! 남의 몸으로 내가 짜식아 심장이 막 뛰고, 어 그렇다고!



김태형
그런 건 아니지만, 노예계약하고… 조금 비슷할 수도 있겠네.


한예화
뭐, 장기 적출?


김태형
…넌 무슨 말을, 내가 그럴 거 같아?

김태형이 진심으로 상처받은 듯이 버려진 멍뭉이 표정을 짓는다. 헐, 귀여워.


한예화
아니, 아니야. 알았어. 좋아. 작전 설명할게.

나는 종이에 누가 봐도 발로 그려놓은 것만 같은 동그라미 몇 개를 슥슥 그렸다.


한예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러니까. 정확히는 네가 해야 할 일이지.


한예화
나는 이여주를 괴롭힐 거야. 때리진 않고, 뭐 그냥 어느 정도 욕이라든가 뭐 아무튼. 뒷담을 옮겨온다거나 그런 거 있잖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김태형
…그래.


한예화
나는 저, 음, 어디가 적당할까. 그래. 삼 층에 좁은 계단 알지? 그 스테인드글라스 막 있고, 아무튼 거기.


한예화
거기로… 내일 점심시간 쯤이 적당하겠네. 내일 점심 때 이여주를 끌고 가서 거기서 싸울 거야. 그 때 마침 니가 올라오는 거지.


한예화
넌 마치 내가 걔를 죽이기라도 하려던 것마냥 막 무지막지하게, 물론 나 한예화한테 화를 내면서.


한예화
자연스럽게 이여주를 아기처럼 데리고 내려가야 해.


김태형
그게 끝이야?


한예화
그럴 리가, 한 번으로 끝나면 그냥 재수만 없지. 또 있어.


한예화
언제가 적당할까. 그래. 삼 일 있다가, 그러니까 오늘이 일요일이니 수요일에, 네가 나와 싸우는 거야.


한예화
그리고… 아마 이여주는 민윤기랑 같이 있을 테니까, 우리한테 와서 싸움을 말리겠지.


한예화
그러면 너는 떨어져주는 척 하면서 내가 했던 짓을 거짓으로 막 만들어내. 이여주의 더러운 욕을 했다든가, 뭐, 네 혈통 욕을 했다든가.


한예화
아무튼 뭔가 엄청 쓰레기같은 걸 하나 만들어내는 거야. 악마들도 아, 얘는 좀…. 하고 갈 수 있을 만큼 존나 개 쩔면서 쓰레기같은 거.


김태형
…….


한예화
야, 듣고 있지?

잠깐 고개를 옅게 끄덕이는 게 이상해서 바라보니, 김태형은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뭐지, 어디 아픈가? 그보다 갑자기?

나는 김태형의 볼을 두 번 톡, 톡 쳤다.


한예화
야.

그는 나를 쳐다보기만 했지 아랫입술을 짓누른 앞니는 뗄 생각을 않았다.

아휴, 이 새끼 참. 내 악력을 또 자랑할 때인가.

예쁘고 간결하게 정리된 손톱, 한예화의 손으로 김태형의 하얀 코를 쥐었다.


김태형
……!


한예화
입술 깨물면 막 피 터지고 그런다, 야. 여기는 립밤도 없는데 왜 자꾸 깨물고 지랄이야, 지랄이.


김태형
립, 밤?


한예화
바르면 입술 보들해지는 그거 있잖냐. 여기는 안 파나, 화장품 말이야.

복숭아 향도 있고 사과 향, 민트 향….


김태형
…한예화.

김태형이 낮은 목소리로 몸의 주인의 이름을 부른다. 이 이름도 박지민 때문에 익숙해졌다.

원래 세계 돌아갔을 때, "저 한예환데요?" 하면 어쩌냐.


한예화
왜. 물어볼 거 있음 말해.

립밤에 관한 질문일 줄 알았는데, 은근히 사적인 질문이다.


김태형
왜… 스스로를 악역으로 만드는 짓을 하는 거야?

거짓말도, 완전한 진담도 조금 그러니. 살짝 에둘러서 진담을 말하려고 깊이 생각했다.


한예화
으음,


김태형
말, 못 하는 사정이야?


한예화
아니. 할 수 있어.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고 그래.

내가 만약 여기서 한예화의 몸을 나갈 수 있다면 그야말로 다행이지만, 평생 여기 갇혀 산다고 하면 우선 유토피아부터 나가야 한다.


한예화
그러기 위해선 퇴학당하려고 막 살아야지 뭐. 벌점 막 받고.


김태형
…원래 자리?


한예화
뭐, 돌아가지 못 하면 강제로라도 학교를 때려치려고.


김태형
원래 자리라면, 실런으로?


한예화
나 아직은 비아에 살긴 하는데, 으음. 이사 갈 생각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이민이겠네.


김태형
어디로.

어차피 향후에 계속 한예화로 살아야 한다면 신분 체인지가 가장 중요하겠지.


한예화
다른 대륙으로 갈 거야. 티브루아 말고, 어딘가 먼 곳으로.


김태형
알아봐둔 곳이라도 있어?


한예화
글쎄.

내가 다른 대륙들을 알 리가 있나, 티브루아도 뭔지 잘 모르는데.


한예화
그게 안 된다면 유리 섬이라도 가지 뭐.

유리 섬은 작중에서 전정국이 살다 온 곳이다. 지금은 걔야 뭐 같이 비아에 살겠지만.

유리창 할 때 그 유리 같지만, 유리(Eurie) 섬이다.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이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조용함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막 고급 호텔들도 있고 그렇지만.

거기 가서 살면 한예화 말고 이름을 000으로 바꿔 내 본연의 모습으로 살 수 있을지도.

그런데 갑자기 김태형이 손을 뻗어, 제 코를 쥔 한예화의, 또 이질적인 나의 하얀 손을 잡는다.


김태형
…….

어이쿠, 잡고 있었는지 까먹었네. 세상.


한예화
뭔데, 손 잡지 말고 그냥 말해도 들어줄 거야.


김태형
그래도, 갈 거야?


한예화
잠, 뭐라고?

웅얼거리듯이 작게 말하는 김태형에, 나는 귀를 가까이 디밀었다.

조금 큰 목소리로 김태형이 말한다.



김태형
내 소원이, 네가 내 옆에 있어주는 거라고 해도 갈 거야?


한예화
…옆에, 뭐라고?

지금 뭐라고 이 시발? 옆에? 왜? 니가? 남주가? 갑자기?

내가 혼란에 빠져 있던 그 때, 문을 깨부수는 거 같은 소리가 들렸다.

박지민.

하필 이 때 도착을 해서, 어후, 같이 있는데.

나는 우선의 비책으로 김태형 앞에 서있었다. 보호하듯이. 금방이라도 눈에 힘을 줄 것만 같은 표정으로.

박지민은 생각보다는 정상적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새빨간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게 뻔한 나, 한예화와 눈을 마주친다.



박지민
…나와, 가짜.

지금 여기서 한예화가 아니라는 오해를 풀면, 그러면 그냥 평화롭게, 아니 박지민의 집착만 받으면서 잘 있을 수 있을런지.

박지민은 금방이라도 날 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그건 아마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서 기억하자, 기억하자. 시발 어제 봤잖아, 그 기억. 자암깐만.

난 내 기억력을 의심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린 한예화
- 황녀. 당신은 잘못되었어.


한예화
지민아.

어렸을 때의 그녀와 똑같은 톤의 내 목소리에 박지민은 살짝 뒷걸음질했다.


한예화
너는…, 잘못되었어.

최대한 한예화가 하듯이 수수한 목소리를 냈다. 얘가 평소에 강조하던 단어가 뭐였는지 생각하면서.


한예화
너를 좋아, 한다고까진 생각해보지 않았어.

박지민은 나에게로 한 발짝 다가왔다. 나는, 그래, 솔직히 겁을 지레 집어먹었다.


박지민
거짓말 말아, 돌려줘.

그렇다고 여기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나는 꿋꿋이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난 몰라 난 몰라 천번만번… 말해줘도 몰라 몰라…

자주 쓰던 단어. 한예화가 자주 쓰던 단어. 아악, 내 두뇌 일해라.


박지민
비키라고. 죽여버리게.


한예화
지민아.

아, 기억났다!


한예화
우리는, 친구잖아?

친구!

지민이는 친구라는 관계를 다이아몬드처럼 소중하게 여기면서, 카드로 만든 집을 짓듯이 더 위태롭게 대해요.

지민이가 원하는 카드 성이라는 건 사실 「한예화」에요. 당연한 말이지만, 조금 다른 면이 있죠.

「한예화」이지, 「한예화의 마음」이 아니잖아요. 지민이는 한예화 자체가 인형처럼 자신만 소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래요.

어떻게 보면 이 세계관에서 정상은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모두의 과거를 밝히는 때까지 열심히 달려가요 우리!

아, 그리고 태형이는 아시죠? (찡긋) 예화와, 예. 예에.

아참, 혹시나 이런 티브루아가 뭐야? 뭐 어떤 구조인 거야?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 대략적인 지도를 가져왔어요.



늘 더 좋은 작품을 가져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