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호 나페스] 별바라기

8화. 그냥 안건호

“조금만 더 있다가.”

 

내 말에 건호는 더 묻지 않았다.

그냥 내 옆에 서서, 같은 하늘을 봤다.

 

바람은 계속 불었다. 손에 쥔 코코아는 조금씩 식어갔고, 건호가 건네준 겉옷 소매는 손등을 거의 다 덮고 있었다.

바람 소리가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귀 옆을 스쳐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듣다가, 문득 아까 건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배우이기 전에 난 …'

 

거기서 끊긴 말.

나는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말하다 만 거.”

“뭐?”

“배우이기 전에 뭐 말하려던거. 뭐야?”

“…….”

 

건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안이 비어서 식어버린 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기다렸다.

 

“또 말하다 말면 진짜 짜증낸다.”

 

건호가 작게 웃었다.

 

“알아.”

“알면 말해.”

 

건호는 손에 들고 있던 캔을 난간 위에 올려두곤, 멋쩍은듯 볼을 긁적였다. 어두워서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한텐 그냥 안건호였으면 해서.”

 

나는 잠깐 말을 잃었다.

건호는 하늘이 아니라 나를 보고 있었다.

 

“화면에 나오는 사람 말고.”

“…….”

“사람들이 아는 안건호 말고.”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

 

“그냥 네가 알던 애.”

 

뭔가 속이 조금 간지러운 그런 느낌이 든다. 멀뚱히 그 이야기를 듣다가, 별생각 없이 말했다.

 

“…너는 이미 그냥 안건호잖아.”

 

건호가 나를 봤다.

 

“내가 네 작품 본다고 네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

“촬영장에서 보니까 신기하긴 했는데.”

 

나는 잠깐 말을 멈췄다.

좋은 말을 너무 많이 하면 또 이상하게 받아들일 것 같았고, 그렇다고 일부러 비틀어 말하자니 그건 또 싫었다.

 

“그래도 너더라.”

 

건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이 조금 어색해서 다시 하늘을 봤다. 별은 분명 위에 있는데, 자꾸 옆에서 오는 시선이 더 신경 쓰였다.

 

“왜 또 그렇게 봐.”

“아니.”

“아닌 얼굴 아닌데.”

“그 말도 좋네.”

 

건호가 웃었다. 나는 어이없어서 대답하지 않았다.

더 차가워진 바람이 볼을 쓸었다. 음, 이젠 내려갈 때인가. 슬슬 내려가자고 입을 열려고 하는데 건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사고가 멈추고, 나는 천천히 건호를 돌아봤다.

 

 

“나.”

“…….”

“너 좋아해.”

 

말은 짧았다.

그래서 한 박자 늦게 들어왔다.

 

나는 멍하니 건호를 보았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있는지도 모르겠다. 건호는 손을 뻗어 내겐 품이 큰 겉옷을 더 여며주었다.

 

“이번엔 말하고 싶었어.”

 

건호가 덧붙였다.

나는 시선을 거두어 손에 든 코코아 캔을 내려다봤다. 이미 다 비어서 식어버린. 그런데 손끝은 이상하게 뜨거웠다.

쿵-쿵- 가슴께에서부터 귀까지 심장소리가 타고 올라왔다. 그 심장소리는 너무 커서 더 이상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마치 내가 알아채지 못한 마음을, 심장은 이미 다 안 다는듯이.

 

“대답은 지금 안 해도 돼.”

 

나는 바르게 고개를 들어 건호를 쳐다봤다.

 

“누가 안 한대.”

 

건호는 내 대답에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나는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이 비어버린 건 아닌데, 그렇다고 딱 맞는 말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좋아해.

 

그 말에 같은 말을 돌려주는 건 아직 어려웠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척 넘기는 것도 싫었다.

나는 우물쭈물 거리다가 한참 뒤에야 말했다.

 

“나 아직 잘 모르겠는데.”

“응.”

“근데 계속 봐도 될 것 같아.”

 

건호는 조용히 나를 봤다.

 

“뭘.”

 

말하고 나니 괜히 민망해서, 나는 급하게 하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작품도 보고.”

“…….”

“별도 보고.”

“…….”

“그냥 너도.”

 

건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숨을 작게 내쉬었다. 오래 참고 있던 걸 조금 놓는 사람처럼.

 

 

“그거면 충분해.”

 

내 머리에 겉옷의 모자를 씌워준다. 바람을 막아주니 한결 따뜻해졌다. 얼굴이 어쩜 붉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두운 날에는 별을 많이 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감정으로 혼란스러운 내 표정이나 붉어진 얼굴도 안 보여줄 수 있으니까.

들어가자. 내게 모자를 씌워준 건호가 먼저 발걸음을 차로 옮겼다. 나도 총총, 그 뒤를 따라갔다.

주차장 쪽 가로등 불빛이 가까워질수록 어둠이 물러나면서 별은 조금씩 옅어졌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말이 많지 않았다.

산길을 내려오자 시내의 불빛이 순식간에 퍼졌다. 이렇게 한 밤 중인데도 참 밝았다.

 

얼마 되지 않아 대문 앞에 차가 멈췄다. 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문을 열려다 말았다.

 

 

“건호야.”

“응.”

“드라마 재밌게 보고있어.”

“…….”

“그러니까, 재밌게 보고있을 내 생각 하면서 연기 열심히 해.”

“…….”

“조심히 들어가.”

 

안건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벙찐 표정을 하고 있었을지, 아니면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을지. 지금의 나로서는 이 정도가 최선의… 최선의 표시였다.

나는 빠르게 차에서 내려 대문으로 뛰어갔다.

 

대문을 열 때 쯤이 되어서야 뒤에서 차가 천천히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별을 보고 온 게 아니라 안건호를 보다 온 것만 같았다. 그래, 별보다는 … 건호만 기억에 남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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