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나는 원빈을 조금씩 피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피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그냥 마주치면 괜히 신경 쓰여서 먼저 자리를 피하게 됐다.
원빈이 연락하면 답장은 했다.
누나 뭐 해요?
과제.
힘들어요?
좀.
도와줄까요?
괜찮아ㅋㅋ
예전처럼 대화도 했다.
그런데 만나면 달랐다.
눈이 마주치면 괜히 심장이 뛰고, 원빈이 가까이 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었다.
특히 그 여자 동기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본 뒤부터는 더 그랬다.
나한테는 그렇게 서툴면서.
다른 사람들과는 웃고 떠드는 게 괜히 얄미웠다.
*
오늘도 수업이 끝나자마자 친구들과 먼저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강의실 문을 나서는 순간 원빈과 눈이 마주쳤다.
원빈은 동기들과 같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 여자애도 있었다.
"원빈아, 너 이번 주말에 진짜 안 갈 거야?"
"아직 모르겠는데."
"너 없으면 재미없는데."
여자애가 웃으면서 원빈의 팔을 가볍게 건드렸다.
원빈은 별다른 반응 없이 웃었다.
그걸 본 순간.
또 마음이 이상해졌다.
나는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나 먼저 갈게."
"어? 같이 가."
"괜찮아."
친구에게 대충 대답하고 빠르게 걸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누나."
못 들은 척했다.
"누나."
이번에는 바로 뒤였다.
결국 멈춰 섰다.
"왜 따라와?"
원빈이 나를 바라봤다.
"누나가 갑자기 가길래."
"나 친구들이랑 가려고."
"알아요."
"그럼 너도 쟤네랑 놀러 가는 거 아니었어?"
원빈은 잠깐 뒤를 돌아봤다.
친구들이 아직 강의실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다시 나를 봤다.
"안 가려고 했어요."
"왜?"
원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누나랑 같이 가려고."
"...뭐?"
"아까 누나 봐서 바로 왔어요."
나는 순간 아무 말도 못 했다.
원빈은 내가 이상하게 보는 게 민망한지 시선을 내렸다.
"저 오늘 누나랑 놀고 싶어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너무 진지하게 말해서 더 설렜다.
"나랑?"
"네."
"왜?"
"그냥."
원빈이 잠깐 고민했다.
"보고 싶었어요."
나는 결국 시선을 피했다.
"...너 요즘 말 잘한다."
"아닌데."
"잘하잖아."
"누나한테만 그런 말 하는 건데."
이번엔 정말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는 괜히 먼저 걸었다.
"가자."
"어디요?"
"집."
원빈이 바로 따라왔다.
*
집으로 가는 길.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원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나."
"응."
"요즘 저 피하는 거 맞죠?"
나는 걸음을 멈췄다.
"아니."
"맞는데."
"아니라니까."
"그럼 왜 자꾸 저 보면 가요?"
"..."
대답할 수가 없었다.
원빈이 내 앞에 서서 나를 바라봤다.
"제가 뭐 잘못했어요?"
"아니."
"그럼요?"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결국 말했다.
"그냥 네가 다른 여자랑 있는 게 싫었어."
말하고 나서 내가 제일 놀랐다.
원빈도 눈을 크게 떴다.
"...진짜요?"
"몰라."
"누나."
"왜."
"그거 질투한 거예요?"
"아마."
원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지 마."
"미안해요."
전혀 안 미안한 얼굴이었다.
"근데..."
원빈이 한참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좋아요."
"...뭐가."
"누나가 질투하는 거."
나는 괜히 원빈 팔을 한 번 때렸다.
"진짜 얄미워."
원빈이 웃었다.
그러다 웃음이 조금씩 사라졌다.
"그럼."
"응?"
"저한테 조금이라도 마음 있는 거예요?"
이번에는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원빈의 얼굴을 바라봤다.
처음 만났을 때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던 애였다.
차갑다고 생각했고.
까칠한 귀공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누구보다 낯을 많이 가리고.
내 앞에서만 조금씩 편해졌고.
나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계속 나를 좋아해주고 있었다.
그런 원빈을 생각하니까.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내가 왜 자꾸 원빈을 찾았는지.
왜 연락을 기다렸는지.
왜 다른 여자와 있는 게 싫었는지.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원빈이 숨을 멈춘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나도 너 좋아하는 것 같아."
"...진짜?"
"응."
원빈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원빈?"
"잠깐만요."
"왜?"
"지금 너무 좋아서."
원빈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목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웃음이 났다.
"너 아직도 뚝딱거리네."
"누나가 좋아한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그걸 어떻게 안 떨려요."
그 말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
잠시 후 원빈이 조심스럽게 내 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다 멈췄다.
"잡아도 돼요?"
나는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원빈이 내 손을 잡았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마치 조금만 세게 잡아도 내가 사라질 것처럼.
나는 괜히 손가락을 움직여 원빈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원빈이 나를 바라봤다.
"누나."
"응."
"이거 꿈 아니죠?"
"아니."
"그럼..."
원빈이 아주 작게 웃었다.
"우리 사귀는 거예요?"
나도 웃었다.
"응."
"진짜?"
"응."
원빈이 다시 한번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한참을 걷다가 말했다.
"나 진짜 잘할게요."
"뭘 잘해."
"남자친구."
나는 웃음을 참으며 원빈을 바라봤다.
"기대할게."
그 말에 원빈의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처음에는 그렇게 어려웠던 박원빈이.
이제는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손을 놓고 싶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