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79화. 플러팅





기운 빠지는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허기가 졌다.




"줄리앙은 배 안 고파요?

 나는 좀 출출한데...뭐 먹을 거 없나 볼게요."




주방 서랍장을 열어 보니

아직 먹지 않은 한국 라면이 몇 개 남아 있었다.

그 중 두 개를 꺼내며 줄리앙에게 물었다.




"라면 먹고 갈래요?"




줄리앙은 반색하며 말했다.




"어? 그거 한국식 플러팅 아니에요?

 라면만 먹고 가라는 뜻은 아니라던데요?"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요?

 프랑스에 살아도 한국 문화를 꽤 잘 아는데요?"





"내 말이 맞죠?

 유튜브에서 본 거 같기도 하고...

 한국 친구가 얘기해 준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예전에 어떤 한국 영화에서 나온 뒤로

 한국식 플러팅이 됐다고 하던데요."





"플러팅..."


"...맞아요."


"내가 지금 줄리앙한테 플러팅하고 있는 거에요."





나는 줄리앙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줄리앙은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이리로 나와서 쉬고 있어요.

 내가 끓일께요.

 나도 집에서 가끔씩 끓여 먹어서

 어떻게 요리하는지 알거든요."





줄리앙이 냄비에 물을 받는 동안,

나는 식탁에 앉아 말없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줄리앙은 어떤 한국 음식을 가장 좋아해요?

 어머님도 안 계신데,

 어려운 요리가 아니면
 
 내가 해 줄께요.

 그렇다고 기대는 하지 말구요."





"와...지금 엄청 감동스러운 거 알아요?"





"왜요?

 요리해 준다고 해서요?"





"그동안 정아씨가 나한테 처음으로 한 질문이에요.

 그거 몰랐죠?"





"정말요?

 내가 줄리앙한테 처음으로 한 질문이라구요?

 거짓말...

 우리 벌써 몇 달이나 만났는데..."






"몇 달이나 됐는지는 알아요?"






"한...석달 정도?"





줄리앙은 잠시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진짜 섭섭하다.

 주위에 한국 커플들 보면 100일도 챙기고,

 1년 기념일도 챙기고 하던데

 정아씨는 원래 그런 걸 안 챙기는 성격인 거에요?

 아니면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거에요?"





"미안해요...

 반성할께요.

 그동안 정말 내가 너무 무심한 여자친구였네요."





나는 그의 등 뒤로 가

허리를 감싸 안았다.





"라면 먹고,

 오늘은 여기서 자요.

 호텔로 가지 말고..."




.
그는 한참을 뜸을 들인 후에 대답했다.





"오늘... 그 플러팅은 참을게요."





그가 라면을 그릇에 옮겨 담았다.





"왜요?"




예상 밖의 대답이었지만

나는 그가 농담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라면 두 그릇을 무심한 듯,

식탁 위에 옮겨 놓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나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날.

 그날 당신과 함께 있을게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온전히 당신과 나 둘만 있다고 느껴질 때.

 3명이 아닌 둘만 있을 때.

 그 때요..."




"줄리..."




나는 그의 말이 어떤 의미라는 걸

너무나 잘 알기에

뭐라고도 변명할 수가 없었다.





그가 그동안 느꼈을 외로움을 떠올리자,

미안하다는 말조차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와 라면을 먹는 동안

내가 또 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미안한 만큼 그를 더 배려하고,

그의 기분을 맞춰 주고 싶었다.




"다음 주 주말에 어떻게 입으면 좋을까요?

 부모님이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세요?"




"정아씨 스타일 그대로 해요.

 일부러 꾸밀 필요 없어요.

 우리 부모님은...

 지금의 정아씨 모습 그대로 좋아하실 거에요."






"그러실까요?

 나...사실은..

 남친 부모님 뵙는 게 처음이라서

 엄청 떨리고 긴장돼요.

 내가 너무 얼어 있으면

 살찍 손잡아 줘요.

 줄리 믿고 용기를 내 볼께요."





"혹시나 부담되면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나한테는 솔직히 얘기해 줬으면 좋겠어요."





"줄리...

 왜 그렇게 얘기해요?

 내가 줄리 부모님 만나기 싫어하는 것 같아요?

 내가 그렇게 보였어요?"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솔직히 얘기해도 된다고 말한 거에요."





"좀 당황스러운 건 맞아요.

 아직 우리가 만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한국에서부터 오신다니까

 내가 두 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될 거 같기도 하고..."





"다음에 기회 될 때 그 때 뵙자고 할까요?"





"줄리는 내가 부모님과 뵙으면 하지 않아요?"






"나야...그렇기는 하죠.

 그런데 이건...

 상대에게 부담을 줘서 되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줄리가 원하면 만나 뵐께요."





나는 그 말을 하면서

훈지씨의 누님을 만나 뵌 날이 문득 생각났다.

그 날 얼마나 긴장했는지 떠올랐다.




그래도 지금은...

그 때처럼 마치 내가 뭔가 잘못 하고 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덜 두려웠다.




"내가 점점 자신이 없어져요..." <80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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