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한 팬이었을까. 현생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들의 뒤를 따랐다. 콘서트, 팬싸는 물론 행사까지도 따라가 홈마의 역할을 완수했다. 하지만... 이젠 이 생활도 끝낼 때가 온 것 같다.
악화되는 건강은 물론, 현생을 버리면서까지 아이돌에게 내 인생을 받치기엔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분명 내가 좋아서 하던 일이 내 모든 걸 망쳐가고 있었던 거다.
혹여나 마음이 흔들릴까... 팬계정부터 시작해 모든 걸 지웠다.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홈마로 살아서면서 많은 인연들도 있었지만 그 인연들도 놓아버리기로 했다.
많은 팬분들이 붙잡았지만 나는 붙잡혀줄 수가 없었다. 이제 정말 누군가의 팬이 아닌 사람이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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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이 지났을까. 초반에는 덕질 없는 삶이 너무 무기력하고 힘들었지만, 꽤나 시간이 지난 지금은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다. 괜찮은 회사에서 일도 하고 있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다 보니 덕질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틈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서 친해진 동료가 내게 부탁을 하나 했다.
"제발요 ㅠㅠ"
"안돼. 나 바빠."
"저 진짜 처음으로 당첨된 거란 말이에요... 저도 꼭 가고 싶은데, 출장이 잡혀서ㅠㅠ"
"왜 하필 나야..."
이게 무슨 경우인 건지. 방탄소년단 팬인 동료가 대신 팬싸에 다녀와 달란다. 동료는 모르겠지만, 한때 내 인생을 받쳤던 그들을 다시 볼 자신이 나는 전혀 없다.
"진짜 제발요ㅠㅠ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제가 꼭 크게 쏠게요..."
진짜 환장하겠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난 고작 한 끼 쏘는 거 거지고 안 되거든?? 목숨 걸고 가야 되는 수준이라고 난...
"그리고 이번 @@ 미팅 제가 할게요..."
"톡으로 보내. 장소랑 이것저것."
절대 하기 싫었던 미팅을 대신해준다? 아 이건 못 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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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싸 장소에 도착하니 마음이 이상했다. 한두 번 오는 것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떨리는지.
난 혹시 몰라서 새로운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타날 예정이다. 팬을 잘 기억해 주는 그들이 날 기억해 내지 않길 바라거든.
솔직히 말하면 기억 못 할 수도 있으려나. 8개월이 넘게 지났고, 그렇게 많은 팬들이 있는데... 나 하나를 어떻게 기억하겠어.
큰 걱정 없이 내 자리에 앉아 그들이 오길 기다렸다. 두려움과 설렘이 같이 공존했을까. 괜히 떨리는 손을 꽉 쥔 채 기다리다 보니 그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미~!!"
손을 방방 흔들며 들어오는 7명. 특히나 최애였던 정국을 발견하자마자 눈물이 맺힐 뻔했다.
이런 저러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벌써 사인을 받을 시간이 되고 말았다. 순서가 다가오기 시작할 때마다 내 심장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다음 분 올라가세요~"
내 차례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
"...?"

"어디 갔다가 이제 왔어요."
"네...?"
미친 듯이 흔들리는 동공. 뭐야, 어떻게 안 거야...?
"...보고 싶었어요. 하도 안 보이길래 제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그게..."
"이ㅇㅕ..."
"잠깐만요...!"
내 이름도 기억하고 있었는지, 내 이름으로 사인을 하려는 석진을 불렀다. 나는 오늘 팬으로서 이곳에 온 게 아니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윤지아로 해주세요."
"...?"
"대신 온 거예요. 팬으로 온 게 아니라."
왜 이렇게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픈지 모르겠다.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 때문이었을까. 억지로 올리고 있는 그의 입꼬리가 약간은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왜요. 나 이제 안 사랑해요?"
"...현생 살려고요. 이때까지 고마웠어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는 김석진의 손을 잡았다. 내 손을 꽉 잡는 그가 왜 이렇게 불쌍해 보이는 건지...
"가지 마."
"...안녕."
누가 보면 헤어지는 연인 사이인 줄 알겠다. 나는 애써 미소 지어 보이며 옆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안녕하세요."

"잘 지냈어요...?"
옆에서 나누는 얘길 들었나 보다. 누가 봐도 억지로 짓는 미소가 다 말해주고 있다. 그렇게 많은 팬들 둥 1명인 뿐일 내가 뭐라고 이렇게 슬퍼해 주는 걸까. 마음 아프게.
"이러다 다 들키겠다. 나 그래도 생각보다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던 헤메코를 하고 나타났는데... 왜 이렇게 쉽게 알아보는 거야. 열심히 숨긴 내가 뭐가 돼, 얘들아...
"숨길 걸 숨겨야죠.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겠는데."
"....."
"우리 데뷔 때부터 본 사이예요. 같이 성장한 사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왜 당신을 못 알아 봐요."
잘게 떨리는 손을 황급히 내리려고 했을까. 태형이는 따스하게 내 손을 잡아 왔다.

"고마워요. 진짜 정말로."
"너 그렇게 쳐다보는 거 유죄야."
"잡혀가죠 뭐. 감옥에 너도 있으면 좋고."
미친. 진짜 너 나한테 왜 그러냐... 얼굴 공격을 2차로 당해서 그런지 정신이 혼미했다. 그런데 무슨 말도 저렇게 사람 미치게 하는 말만 하는 건지.
빠르게 뛰는 심장을 달래기도 전에 난 옆으로 이동해야 했다.
"후... 안녕하···"

"왔어요? 지금 멤버들 전부 당신 보느라 바쁜 거 보여요?"
"에...?"
주위를 둘러보니 멤버들 모두 나를 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진짜 어떻게 안 거야...? 아직 말 한마디도 안 나눴는데...
"왜 이제 왔어요. 모두 다 여주 씨 걱정 많이 했어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닌가 해서."
"아... 금방 잊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중한 사람을 어떻게 잊어요.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니고."
"...잘 지내요. 뒤에서 응원하고 있을 게요."
"응원하고 있는지 안 하는지 어떻게 알아요."
"음...?"

"가끔씩 찾아와 줘요. 이런 말 이기적인 거 알지만, 이렇게라도 붙잡아 봐요."
"아..."
내가 생각보다 엄청난 유죄 남들을 좋아하고 있었구나. 어쩜 저리 사람 마음을 잘 흔드는 건지 모르겠다. 아, 어쩌면 얘네라서 흔들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잘 가요. 현생 응원할게요."
내 손을 마주 잡으며 따스하게 웃는 김남준. 넌 여전히 보조개가 이쁘구나. 참 예뻐.

"....."
옆으로 넘어갔을까. 인사를 건네기 전에 보이는 박지민의 표정에 입을 열수가 없었다.
굉장히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는 거 같은 표정. 우물쭈물 거리고 있는 걸 보다가 내가 먼저 입을 열기로 했다.
"안녕. 잘 지냈어?"
이왕 들킨 거 당당하게 인사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니, 지민아.
"누나... 어디 아픈 곳은 없어요? 잘은 지냈고요?"
"응응, 난 잘 지내고 있어. 너는?"
"누나 안 보이니까 슬펐죠, 쭉."
"하하... 미안하네."
내 손을 만지작거리는 지민. 여전히 애기처럼 귀엽다, 넌.
"누나 없으니까 허전해요."
"그 허전함 다른 팬들이 채워 줄 거야."
"누나는 누나뿐인데, 그걸 어떻게 다른 사람이 채워줘요. 누나만 채울 수 있는데."
말문 막히게 만드는 지민이에 곤란할 따름이다. 내가 생각보다 얘네한테 큰 존재였구나를 느끼게 되니 마음이 좋긴 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오랫동안 보긴 했지?

"기다리고 있을 게요. 우린 늘 이 자리에 있을 테니까."
예쁘게 웃는 너. 고작 나 하나를 기다려주겠다는 말이 내 눈물샘을 자극했다. 눈물 보이기 전에 빨리 끝나야 될 텐데...
눈물을 꾹 참고 자리를 옮겼다. 옮기자마자 보이는 건 잔뜩 시옷 입이 된 호석이었다. 이렇게 대놓고 티를 내고 있을 줄이야.
"시옷 입 여전히 귀엽네."

"...귀여우면 자주 보러 와요. 뭐... 그래서 잘은 지냈어요?"
"...네. 잘 지내고 있어요."
"전 잘 못 지냈어요. 이유는 알 거라고 믿어요."
머쓱한 채로 있으니 조용히 사인을 해주는 호석이다.
"아, 내 이름으로 하면 안 되는데... 대신 온 거라."
"...온 건 여주 씨니까 여주 씨 이름으로 할래요."
곤란하다. 내 이름으로 해버리면 무슨 의미야... 내 것도 아닌데.
"우리 잊지 마요. 쉽게 잊기엔 우리 가벼운 사이 아니었잖아요."
"...안 잊어."

"꼭 다시 봐요. 알겠죠? 약속이에요."
"....."
약속할 수 없는 걸 약속해도 되는 걸까.
"약속한 거예요, 우리."
"...그래요."
이 약속을 내가 지킬 수 있을까, 호석아.

"더 이뻐졌네."
"거짓말 하나는 참 잘해."
"글쎄."
이거야 원... 윤기 역시 내 이름으로 사인을 해버렸다. 다시 써달라고 해도 안 해줄 거 같아서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왜 이제 왔어요"
"탈덕했는걸요"
"...우리가 싫어서 탈덕한 건 아니겠죠."
"아냐, 현생 사느라 그런 거예요."
"그럼 됐어요. 시간 나면 꼭 보러 와요. 보고 싶을 테니까."
아 진짜 민윤기마저 저런 얘기 하니까 너무 흔들린다. 이렇게 팬 한 명 한 명을 사랑해 주는 애들을 내가 어떻게 잊고 살아...
아직도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는데.
"아프지나 마요. 건강 챙기고."

"네가 우리 보러 오면 아픈 거 싹 나을걸."
"...미친."
순간적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늦었다는 걸 안다. 진짜 민윤기 고소해야 돼... 유죄 남을 이렇게 내 앞에 두지.. 아, 주접 어떨 거야...
"다시 봐, 이쁜아~"
진정해. 한 명만 더 버티면 돼. 견뎌... 이여주...
"...안녕, 정국아."
눈을 어디다 둬야 될까. 최애여서 그런지 제정신이 아닌 기분이다. 나 지금 쟤 얼굴 보면 울 거 같아.
"....."
"정국ㅇ..."
대답이 없길래 숙인 고개를 들었을까.

"왜 이제 왔어요..."
내 최애가 내 앞에서 울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 서럽게.
"ㅈ, 정국아?"
"내가 누나 얼마나 의지하는지 알면서 그렇게 말도 없이 가버리는 게 어딨어요..."
"내가 너무 나빴다...! 내가 미안해... 뚝해, 응?"
큰일 났다. 이렇게 뿌앵 울어 버리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여러분... 아니에요... 저 나쁜 짓 한 거 아니에요...
"보고 싶었어요. 아주 많이."
"...나도."
"늘 응원해 주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면 얼마나 무서운지 누나는 모를 거야..."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누나 데뷔하면 안 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럼 자주 볼 수 있을 텐데..."
"헛소리를 이렇게 하네..."
"나 진심이야. 오늘 이렇게 가버리면 다시는 못 볼 거 알아, 난."
"....."

"피해 끼치기 싫으니까 떼쓰지는 않을게요..."
"....."
이미 네 눈빛만 봐도 난 곤란하단다, 정국아...
정국이가 내게 의지를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봐온 사이이자, 서로 믿고 의지하던 사이였다. 난 늘 널 예뻐해 주고 응원해 줬다. 어떠한 일이 생겨도 널 믿어 줬고.
나 참 나쁘다. 그치? 그런데 내가 너희 곁에 남아 있기엔 내가 너무 힘들어. 내 삶이 아예 사라질 것만 같아. 예전처럼 살기에는...
난 벌써 28살이고 부모님이 그렇게 원하는 결혼도 해야 될 나이가 되어 가고 있어. 그래서 나는 다른 준비를 하러 가야 돼.
"잘 지내. 늘 응원할 테니까."
"....."
"웃어~ 마지막인데 우는 모습만 보여주지 말고."
"...마지막....."
"ㅋㅋ누나 결혼하면 그때 보러 올래?"
장난을 걸어 봤지만 오히려 더 얼굴이 굳어질 뿐이었다. 이게 아닌데... 스읍;;
"큼... 나 이제 가야 돼. 진짜 잘 지내야 돼, 정국아?"
"....."
예쁜 너의 손을 어루만지고는 저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가 건네는 앨범을 받고서는 나는 이동했다.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내 자리로 돌아와 동료 이름이 아닌 내 이름으로 사인 부분을 보며 곤란해하고 있다가 무언갈 발견하는 순간 내 움직이 멈춰졌다.
"이거 뭐야..."
앨범에 보이는 건 다름 아닌 전번이었다.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적혀 있는 전번에 황급히 고갤 들었다.
전번을 남겨둔 그는 날 쳐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너어는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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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번을 남겨둔 멤버는 누굴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