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안녕.

7. 과거

금요일 오후 5시.


꾸물꾸물 눈을 뜨며 일어난 그녀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욕실로 가기 위해 몸을 일으킨다.


-와...야한데?


뒤를 도니 언제 일어났는지 비스듬히 누워 제이를 보며 말하는 정국.


-아...안에 하지 말라니까...

-흐르네..이야 좋은 광경이야.


그녀의 다리사이로 오늘 새벽의 그의 흔적이 흘러내린다.


-아! 상관없지 참...어차피 임신도 안되는데.


그녀의 말에 정국은 인상을 찌푸리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듣는 내가 다 아픈말이다 그말.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자 힘들다며 그의 팔을 치우고 욕실로 들어간다.

정국도 가운을 걸치고 거실욕실에서 씻고 나온다.


-배 안고파? 해줄까 시켜줄까?

-시켜먹어요. 치우는거 귀찮잖아. 근데...옷은 왜 다 입고 나온거에요?


방에서 트레이닝 차림으로 나온 그녀를 보며 맘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묻는다.


-짐승새끼한테 잡아 먹힐까봐 무서워서. 오늘도 자고 내일 갈래. 움직일 기운도 없는데다가 온몸 마디마디가 다 아파. 특히 한군데가.

-약이라도 발라줄까?

-어디에 손을 대려고? 변태!


소파에 털썩 앉으며 이야기하는 그녀에게 얍실한 웃음으로 다가가며 말하던 그는 그녀에게 짧게 입을 맞춘다.


-능구렁이...배고파 김치볶음밥 시켜줘. 난 늙고 낡아서 기운없어서 못시켜.


그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우며 말하는 제이를 눈에 담는 정국.

좋아 죽겠다는 얼굴이다.


어느새 도착한 식사를 끝내고 정국의 노트북을 열어 업무를 보던 그녀에게 머그컵 가득 데운 우유를 담아 내민다.


-마셔요. 일 그만하시고 마시고 자자. 피곤하잖아.

-짐승새끼 무서워서 혼자 잘래.

-절대 안되지.


에효..장난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데운 우유 한컵을 비우고 노트북을 닫는다.

진짜 졸려 더 이상은 안되. 하며 방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쫄래쫄래 따라 들어간다.


-안해. 절대 안해. 잘거야.


입을 맞추려 다가오는 정국의 입을 두 손바닥으로 막고 단호하게 말한다.


-치사하게. 키스만. 그건 되잖아.

-안되. 너 너무 잘해. 키스만으로 안 끝날것 같아.


잘한다는 말에 웃으며 알겠다고 침대에 눕는 정국.

자연스레 그의 팔을 베고 품으로 들어가는 제이.


토요일 오후 2시.


부스스 눈을 뜬 정국이 아직 깨지 못한 제이를 가만히 바라본다.


이 여자는 아팠다. 몸도 마음도. 

처음 본건 그가 19살 겨울. 가족이 없는 불쌍한 아이들을 거둬 키우던 시설. 흔히 말하는 고아원.

24살의 앳된 그녀는 밝은 얼굴로 원장님께 오랜만이라며 인사를 건냈다.


-별건 아니고... 저 결혼해요!


수줍은 얼굴로 청첩장을 내밀며 웃는 얼굴에 이상하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머!!! 결혼? 세상에!!! 너무 축하한다!!


그녀를 끌어안고 방방뛰던 원장님의 얼굴.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는 발걸음.

그냥 조금 더 가까이 보고싶었다.


운전석에서 내리는 남자는 공손히 인사를 하며 그녀의 어깨를 감쌌고 남편될 사람이라며 인사를 건넸다.

그를 보며 미소짓는 그녀의 얼굴이 햇살 같다고 생각하는 정국이다.


-꼭 오셔야 해요! 오셔서 저 예쁜거 보셔야 되요. 저 그날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신부가 될거에요.

-그럼. 꼭 갈게. 누구 결혼식인데. 나도 세상에서 제일 예쁜 보호자가 되어줄게.


제이의 손을 꼭 붙잡고 대견한 얼굴로 말하는 원장.


-부탁드리고 싶은거는 왜 말 안해?

-응?아...저기...원장님...


고개를 숙이고 말을 늘이는 그녀가 귀엽게 보인다.

와..저 남자 운 좋네. 생각하며 뒤를 돌려 하지만 이상하게 눈이가는 정국이다.


-내가 할까?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혼주석에 앉아주실 수 있을까요? 제이가 예전부터 말했었거든요. 꼭 원장님께서 앉아주셨음 한다고. 좀 더 욕심내면 원장님 손잡고 입장하고 싶다고. 허락만 해주시면 준비는 저희가 할게요.


남자의 말에 그녀의 어깨가 작게 들썩거린다.

우는구나...

방금까지 말갛게 웃던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채 뚝뚝 눈물을 떨군다.


원장은 그녀를 조심스러 품에 안으며,


- 그럼. 해줘야지. 나야말로 그런 부탁해줘서 이렇게 고마운걸.


여기 출신인가...?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는 걸음에 원장의 바로 옆에 선 정국이다.


-저...안녕하세요.


미친모양이다...정신도 차리기 전에 입이 먼저 움직였다.


-응? 아. 여긴 우리 정국이. 

-반가워요.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을 잡는다.


-원장님 혼자 서울 가기 힘드실것 같은데...같이 갈까요?


미친놈...뭐라는거냐...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이니 원장이 말한다.


-그럴래? 어차피 이제 서울에서 지낼거니까 너 지낼곳도 가서 좀 봐야겠다. 그래도 될까?


-그럼요. 그럼 저희가 숙소랑 원장님 한복 준비할게요. 일주일정도 먼저 오셔서 제이랑 여행도 다녀오시면 좋을텐데..


남자의 다정한 말에 원장님은 그렇게 신세져도 되냐며 그러겠다  대답한다.

참 다정하구나. 예의 바르고. 멋지고 싫은 남자 어른이다.


-정국이도 같이가자.  같이 일찍가서 서울 구경도 하고. 좋지?

-네. 좋아요.

-얘는 전정국. 이번에 졸업해. 서울로 취업해서 다음달에 내려가거든...서울로 가는거라서 좋긴한데...여간 걱정되는게 아니야.


원장의 걱정어린 말에 눈물을 닦고 싱긋웃는 그녀가 말한다.


-걱정을 왜 해요. 원장님 자식인데. 원장님 자식들 다 제 앞가림 잘하고 잘 살잖아요. 워낙 잘 키워놔서.


또 한번 쿵. 심장이 내려 앉는다.

예의바른 예쁜말. 다정하고 나긋한 얼굴.

아...나...이 여자에게 반했구나.

햇살처럼 웃고 반짝이는 예쁜말을 하는 이 여자가 내 첫사랑이 되겠구나. 그것도 꽤나 아픈.


-반가워요.


악수를 청하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손도 따뜻한사람.


-잘 키워놨어. 여기서 인물이며 키며 제일 잘 키워놓은 아이야. 잘생겼지?


원장의 말에 감탄하며 엄지를 척 들어보이는 제이.

여간 귀여워 보이는게 아니다.


이제 간다며 인사를 하고 차에서 손을 내밀어 보이는 제이.


-모시러 올게요. 건강 잘 챙기시고 정국이?

-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

처음으로 느꼈다 자신의 이름이 정국이라 다행이다. 저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러줄 수 있게 이름이 있어서 다행이다. 라고


-원장님 잘 부탁해. 진짜 소중한 분이야. 나한테.

-걱정마세요. 


한달뒤 1월.

정국은 20살이 되었고 결혼식 일주일 전 그녀는 혼자 고아원에 원장과 정국을 데리러 도착했다.

남편될 사람은 일 때문에 오지 못했다며 서울가는 내내 떠드는 그녀를 보며 정국이 생각한다.


맞다. 다시 심장이 내려앉고 생각이 멈추는걸 보니 다시봐도 이 여자가 좋은모양이다. 참 지독한 첫사랑이겠구나.


일주일동안 원장의 한복을 맞추고 정국에게 취업축하라며 양복과 구두도 선물했다.

정국이 지내게 될 원룸에 필요한 살림살이도 채워주고 서울과 근교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러면서 듣게된 이야기는 그녀의 과거였다.


원장님을 알게된건 이 시설 출신인 부모님 때문이었다.

두분 다 백일도 안되 버려졌으며, 3년 먼저 성인이 된 아빠가 시설을 먼저 나갔다.

서로 좋아하지만 현실이 어두운터라 고백 한번을 못한채로 아빠는 독립했고, 엄마를 데려오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

엄마가 성인이 되어 시설을 나가야 하던 해 아빠는 작은 빌라를 전세로 얻었고 오래된 중고차를 샀다.

고아원으로 가 엄마에게 다짜고짜 청혼을 했다.

어린아이가 눌러도 찌그러질 만한 얇은 금반지를 내밀며 더 반짝거리고 더 두꺼운 반지를 10년안에 끼워 줄테니 함께하자고, 슬퍼서 우는 일 보다는 기뻐서 우는 일이 더 많게 해주겠다고.

아빠의 느닷없는 청혼에 엄마 눈물이 아닌 숨이 찰 정도로 크게 웃었다고 했다.

덜덜거리고 시끄러운 중고차였지만 엄마를 태우고 서울로 오는 길이 마냥 좋았단다.

처음으로 손도 잡고 입도 맞추었단다.

그렇게 1년 뒤 자신이 생겼고, 빠듯한 환경이었지만 주눅들지 않고 컸다고.

10년 뒤 엄마는 아빠의 약속대로 두꺼워진 금반지를 받았다.

고2. 18살 여름. 웬일인지 부모님은 자신에게 가장 먹고싶은걸 말해보라 했고, 제이는 평소에 아빠가 가장 좋아했던 새우튀김이라고 대답했다.

아빠의 승진으로 축하파티를 할거라는 소식에 기대 감으로 가득 찼던 반나절. 그날 제이는 가족을 잃었다.

한낮이었는데도 졸음운전 때문에 역주행을 하던 덤프트럭.

제이가족의 작은 경차를 집어 삼켰고, 부모님은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다.

소식을 들은 원장님은 한달음에 속초에서 서울까지 달려 오셨고 망설임 없이 후견인이 되어주었다.

성실했던 부모님 덕에 받을 수 있던 보험금, 원장님의 빠른 처리덕에 보상금. 모두 원장님이 관리해주었고, 혼자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말에 살던집을 처분하고 원장님과 속초로 향했다.

덕분에 엇나가지 않고 졸업해 대학도 가게되었고, 원장님이 살뜰하게 관리해주신 유산덕에 서울로 혼자 와서도 금전적으로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렇게 입학한 대학에서 석진도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석진의 부모님은 그녀의 성장배경따위 알 바 아니었다.

그저 부모가 없는 고아원출신.

고아원에 있던 기간이 얼마던 이유가 뭐던간에 관계는 없었다.

귀하게 키운 하나뿐인 아들이 그저 불쌍한, 자랑할게 하나없는 여자와 결혼하는게 싫었던 것.


그런 상처를 겪었음에도 반짝이는 그녀가 존경스러웠다.

자신이야 존재 조차 모르는 부모이지만, 그녀는 부모를 잃지 않았는가. 그 모든 아픔을 견딘 사람이 저렇게 반짝이다니.

그 이야기를 듣고 더욱더 석진이 맘에 들진 않았지만, 그녀의 옆에 석진이 있어 웃는 그 얼굴을 보면 그의 존재가 감사해지기도 했다.


결혼식 당일. 

그녀의 말이 맞았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신부.

제 눈에 씌인 콩깍지 때문이겠지 싶어 다른층의 신부 대기실을 힐끔거리며 보고 다녔지만 가장 아름다운 건 제이가 맞았다.


-예뻐요. 누나 오늘 진짜 예뻐요. 공주님 같아요.

-공주님은 무슨!!!!


쑥스러운 얼굴에 볼이 붉어져 고개숙여 웃는 제이.


일주일동안 많이 가까워진 둘이지만 말을 놓는건 나중에. 라는 그녀의 말에 선을 긋는것 같아 서운한 정국이었다. 하지만 뭐...가까이만 지낼수있다면야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로 했다.


석진의 옆에서 가장 빛나게 웃는 제이. 성혼선언문을 낭독하고 퇴장하는 순간까지 원장은 내내 훌쩍거리면서 눈물을 닦느라 정신이 없었고, 자신은 그런 그녀를 사진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역시, 석진의 어머니라는 사람은 신부대기실에도 오지 않고 결혼식 내내 불만이 가득한 얼굴.

석진의 아버지는 그런 자신의 아내 눈치를 보느라 우물쭈물.

사진을 찍으러 오라는 촬영기사의 말에 마지못해 일어나기까지.


저 수모를 견디면서까지 이룬 사랑이라니.

눈물겹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사랑했으면서, 많은 사람든 앞에서 영원하겠다 약속했으면서, 결국 그 사랑은 깨졌다.

마지막까지도 본인 스스로 자신을 갈기갈기 찢으며 그 눈물겨운 사랑을 끝냈다. 

몸도 마음도 한없이 망가진 그녀의 상처를 핑계삼아 그녀의 옆을 지켰다.

몸 뿐인 관계가 아니라 마음도 함께인 관계를 바랬지만, 불가능하다면 이렇게라도 자신의 곁에 둘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