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3) 해외연수
상담실에 갔더니 나이든 할아버지 상담샘께 엄청 혼이 났다. 아직 마음이 다 정리되지 않았는데, 너무 섣불렀다는 것이었다. 안그래도 김태형을 만나고 온 나의 마음은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가 거기에 잘 갖혀 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더불어 내 꿈 속의 시선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상담샘은 나에게 꿈은 내 안의 것이니 그 사람과는 상관 없는 것이라고 했다. 즉, 내 마음 속에서 답을 찾아야한다는 것이었다. 잘 모르겠다. 정국이랑도 내가 김태형에게 면화갔다왔다는 사실을 말하면 엄청나게 논쟁을 벌여야할텐데 상담선생님과도 면회를 갔다 온 일로 설전을 펼치고 있으려니 마음이 깝깝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 두려움에 맞서려고 하다니..
해주씨 엄청 큰 용기를 냈네요."
"네....?"
"그런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어요.
비록 해주씨가 많이 겁을 먹은 것 같긴 하지만.. "
상담샘 눈가의 주름이 살며시 접히며 방긋 웃었다.
"다, 다시는 안 보려고 해요.
아마, 또 간다면 정국이랑도 다툴 것 같구요...
그리고 김태형이 나에게 내가 다시 올꺼라고 했는데,
그렇게 되도록 하고 싶지도 않아요."
쯧쯧쯧.. 상담선생님은 뭔가 갑갑하다는 듯,혀를 끌끌 찼다. 뭐 어쩌랴, 나는 김태형을 다시는 보지 않을 꺼라는 마음은 확실했다.
그렇게 상담실을 나오고, 나는 김태형이 떠올르지 않을 만한 곳으로 가고 싶다고 느껴졌다. 어디론가 떠나자. 어떻게는 잊어내고야 말겠다. 너 따위 내 기억 속에서 몰아내겠어.. 그러기 위해선 잠깐만 좀 떠나보자, 생활이 어느정도 안정되었는데도 악몽이 계속된다는 것은, 뭔가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 . .
그렇게 김태형을 만나고 온 지 얼마 안되어서, 해외 훈련 연수 지원 공고가 있었다. 훈련 기간이 꽤 길었다. 1년. 박사 후 연구과정을 안 거쳤기 떄문에 나에게 해외 연수는 몇년 안에 필수적으로 가야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다행히 근무한지 1년이 넘어서 자격이 되었다. 이제서야 조직에 적응해 가는 중인데, 연수를 가려니 좀 아쉽기도 했지만, 한동안 이 곳을 떠나 있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정국이도 내가 떠나고 싶어 하는 것을 눈치 챈 듯 여행이라도 갔다오자 했지만, 요즘 정국이의 일 돌아가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외근이나 야근이 잦고 너무 바빴다. 외근이나 야근을 하는 날이면, 서에서 쉴 수 있도록 해줘서 다음날 늦게 출근하기도 하지만, 내가 아침에는 출근을 하다보니 얼굴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냥 가버릴까... 지원 기간 동안 정국이에게 딱히 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아직 김태형을 만났다는 것도 이야기 못했는데, 자꾸 하지 못한 이야기가 쌓여갔다.
하지만 이 아이가 나 때문에 희생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가끔은 야근을 해야하는데도, 집에 와버리는 정국이를 볼 때면 뭔가 미안했다. 그래서 더더욱 내가 가진 불안들을 스스로 감당해야할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 날 나는 충동적으로 연수를 지원해버렸다. 어쩌면 선발에서 탈락할 수도 있으니까.. 운명에 맡겨버리자.
. . .
삑삑삑삑..
늦은 밤, 현관에 번호키 누르는 소리가 났다. 나는 방에서 짐을 싸고 있었다. 아침에 지원했던 훈련 연수의 트레이니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고 미리 짐을 좀 싸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외근을 한다던 정국이가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다. 며칠 만에 얼굴을 보는 거였다. 나도 주말에 분석할 것들이 있어서 출근을 했고, 잠복근무 때문에 주로 밤에 나가던 정국은 아침에 들어와서 자곤 했다. 덕분에 연수 지원에 대해 의논하거나 이야기할 기회도 없었고, 나는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정국이가 반가웠다.
그런데 정국은 나와는 정반대였다. 들어올때면 "해주야 나 왔어~~" 하며 힘차게 외치던 정국이였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현관을 열고 들어오는 그의 발걸음에는 피곤을 넘어선 뭔가 무거움이 느껴졌다.
"너 이거 정말이야?"
전정국은 방에 들어와 짐을 싸던 나를 보며 물었다. 정국이는 다짜고짜 핸드폰을 보라는 듯 나에게 쭉 내밀었다.
핸드폰을 보니 이번에 지원한 연수 트레이니 합격자 명단을 찍은 사진을 띄워져 있었다. 가나다순으로 있던 명단 맨마지막줄 보이는 [흑해주] 하여간 짜식.. 정보력은 빨라가지고... 나도 오늘 막 공문을 받았는데, 전정국도 어떻게 봤나보다. 생각해보니 오늘 현장 증거 시료 분석한 결과를 받으러 국과수에 온다고 했었는데, 국과수에 왔을 때 지인을 통해 본 것 같기도 했다.
"봤구나.."
"나 좀 봐 바. 해주야.. 이야기 좀 나누자.."
정국이는 내가 분명하게 대답을 하지 않자 짐을 싸던 나를 붙잡았다.
"응, 맞아. 해외 훈련 연수에 지원했었어.
1년. 금방 지나가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정국이의 얼굴을 외면하며 대답했다.
정국이는 무척이나 화가 났을 것이 분명했다. 그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사실 아무리 바빴어도 미리 전화통화라도 하면 되는 거였는데... 내가 굳이 의논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국이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지만 매번 이야기를 억지로 꺼내려고 할 때마다 이것들이 나 홀로 짊어지어야할 짐 같아서 내키질 않았다. 이 아이를 내 인생에 데리고 오는 것이.. 얘에게는 좋을 게 없는 그런 관계는 아닐까...?
막상 정국이에게 기대지 않고 떠나려고 결심한 이후에는 악몽도 꾸질 않았다. 그런 것들을 보면 어쩌면 잘 지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1년 잘 지내고 오면 그 땐 이 아이 앞에 좀더 온전하게 서 있을 수 있을 거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불안을 나는 어떻게는 없애야만 이 애와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거길 지금 니가 왜 가냐고...
위에서 누가 가라고 시켰어? "
정국이는 나를 붙들고 강한 어조로 물었다. 나를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건 아니야.. 그런데 왠지 이번에 가야할 것 같았어.."
나는 정국이를 외면하며 계속 짐을 싸려 했는데 정국이가 나를 놓아주질 않았다.
"해주야, 너 어떻게 의논도 하나 안 하고 이렇게 갑자기 정할 수가 있어? 이야기라도 해줬으면 내가..."
"니가 어떻게 하려고..?"
말하는 정국이의 말을 가로막았다. 지금도 이렇게 나에게 신경쓰느라 일찍 돌아온 그에게 더이상 뭔가 바라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내가 심사숙고해서 혼자 정한 거야.
좀 충동적이긴 했지만, 떠나고 싶었어."
불타는 속을 가라앉히듯 큰 숨을 들이키는 정국이의 숨소리가 들렸다. 부스럭... 정국이가 더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차마 그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하... 그 심사숙고의 과정에 나는 없었어...?"
정국이는 결국 눈길 한번 주지 않던 나를 붙들고는 억지로 자신을 보게 했다.
아... 정국아..
정국이의 얼굴에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차라리 더 불같이 화를 내지.. 뭐야, 이 상처받은 듯한 검은 눈동자는... 안 그래도 미안했는데 더 미안해지잖아..
툭..!
내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자 정국이는 눈가의 눈물을 엄지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너는 정말.... 뭘 자꾸 니 멋대로 생각하는 거야.
약속 했잖아 꼭 같이 붙어있기로..
나는 너와 멀리 떠나는 것도 괜찮아.
떠나고 싶으면 같이 가자고 하면 되잖아.
나 그 정도 능력있어. 왜 혼자 떠나려고 하는 건데...
영원히 같이 있자고 했잖아.
너도 나와 같이 있고 싶은 거 아니었어...?"
정국이는 다가와서 가만히 나를 안았다.
"같이 있고 싶어.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건 없어.
정국아, 넌 너무 쉽게 영원을 이야기해"
내가 살짝 정국이를 밀어내며 말했다. 그는 다시 나를 끌어안았다.
"해주야, 난 쉽게 이야기한 적 없어.
진실로 영원한 건 없을지 몰라도,
우리가 노력해서 만들어가면 되잖아.
너에게 필요하다면,
우리가 노력해서 같이 길을 찾으면 되잖아.."
노력하며 만들어 간다라... 정국이의 목소리를 듣는데, 나는 눈물이 났다. 정국이에게 미안했다. 그렇다고 후회하기엔 늦은 감이 있었다. 마음 속이 무척이나 소란해졌다.
쪽..!
정국이의 입술이 잠시 내 입술 위에 붙었다 떨어졌다.
"나에게 무슨 일이 그동안 있었는지 이야기 안 해줄거야?
갑자기 혼자 결정한 건, 아닐 것 같은데..."
정국이는 다정하게 물었다.
"... 지난달에 김태형을 만났어.
도망가고 싶더라...
미안해...
나 마주할 자신이 없는 것 같아."
"김태형을 만났다니... 그건 또 무슨 얘기야...?
내가 잠깐 바쁜 새에 무슨 일이 있었구나...
신경쓰지 못 해서 미안해"
나는 울면서 겨우 고개를 저였다. 나를 안고 있던 정국이도 밀쳐냈다.
"아니야, 네가 왜 미안한 건데..?
이건 내가 극복해야할 문제야.
니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나도 모르게 절규에 가깝게 외쳐버렸다. 눈에서 눈물이 한없이 흘러나왔다.. 너에게 상처 준건 난데 왜 내가 울고 있는 걸까...? 나에게 눈물을 흘릴 자격이나 있을 까...? 한참을 울고 겨우 숨을 가다듬었다.
"내가 미안해...
그런데 내가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인 것 같아.
언제까지나 너에게 기대기만 할 수는 없어"
"언제는 괜찮다며, 이젠 기대는 것도 괜찮아졌다며... "
원망하는 듯한 정국이의 말투에 나는 마음이 아팠다. 언젠간 나눴던 이야기가 생각나자, 나는 눈물이 또 날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자꾸 울면 내가 도리어 매달리는 것 같잖아.
"잠깐만 나에게 혼자 있을 시간을 줘...
혼자 극복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 너의 뜻이 그런거라면.. 어쩔 수 없지.."
그 말을 하는 정국이의 눈빛에서 힘이 빠진 것 같았다. 반짝이던 눈빛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정국이는 나를 두고 방을 나갔다. 방문을 닫고 나가는 정국이의 어께가 축 처졌다. 나는 그 모습이 오랫동안 뇌리에 남을 것 같았다.
이후 그는 자신의 혼란스러움과 나에게 받은 상처를 차갑게 봉합해버렸다. 그래 내가 너무 서툴렀지... 어쩔 수 없어.. 이렇게 깊이 들어온 사람은 니가 처음인 걸... 그런데 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내 마음 속의 두려움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좀더 온전한 모습으로 니 곁에 있고 싶어. 언젠간 니가 이해해주길...
. . .
정국이는 더이상 같은 방에서 자지 않았다. 정말로 너무 실망한 건지, 화가 도무지 풀리지 않는 건지, 차갑게 변해버린 정국이는 거실에서 혼자 따로 잤다. 이따금씩 내가 자다가 뒤척일 때면 악몽을 꾸진 않는지 확인 한다는 것만 그 따듯하고 커다란 손이 이마를 짚는 감촉에 알 수 있었다. 나도 굳이 정국이에게 같이 자자고 하지 않았다. 이 악몽이 너무 싫었다.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이겨내고 싶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 떠나야 날이 다가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