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로잡히다

외전 (9) 까마귀의 출현

photo

외전(9) 까마귀의 출현


.    .    .


해외에서 재회를 했던 날 저녁 정국은 해주에게 찾아왔다. 낮에 해주의 이야기를 들은 스테피는 정국이 오자 바로 자리를 비켜주었고, 둘은 기숙사에서 그간 나누지 못했던 근황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정국은 불법도박 사건으로 인해 이 곳에 온 것이었다. 

김태형의 세탁된 자금이 흘러간 것으로 예상되는 불법도박 경기에서는 동물화된 수인이 참가한다는 증거가 잡혔다. 일반 동물보다 지능이 훨씬 우수했기 때문에 동물화한 수인이 월등히 유리할 수 밖에 없었다. 수인들은 대부분 실종된 중종 수인들이었다. 그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기에 당국에서도 이 사건을 중요하게 여겼고 자금의 흐름과 불법 외현화 약물의 흔적을 쫓던 정국은 해외까지 오게 되었다. 이곳에 오면서 이전의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고 정지시킨 것이나, 사적인 메신저들을 닫은 것도 잠입수사를 위한 것이었다.

오자마자 해주에게 연락을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던 것에는 잠입수사의 영향도 있었다.



그래서 정국은 해주가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 했기 때문에 찾아올지 말지도 고민이 되었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고 싶었고, 개인적인 연락이 아닌 공식적인 일정으로 찾아왔다. 정국은 강의실에서 그녀가 자신을 외면한다면 조용히 돌아설 생각이었다. 강의실에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서 해주를 발견하지 못했던 정국은 해주를 못 만나는 줄 알고 돌아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주차장에서 그녀가 자신을 부르며 달려왔을 때는 그간 수사로 지친 마음들이 보상받는 것 같았다.



해주가 건넨 반송 편지를 읽고 정국은 왠지 기뻤다. 해주가 마음속 깊이 나를 원하고 있었다니... 정국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 같은 일이었다. 해주가 악몽을 꿀 때마다 자신이 빨리 찾아주지 못해서, 혹은 그날 나가지 못 하도록 말리지 못해서 해주에게 트라우마가 생긴 것은 아닌지 책임감도 들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해주가 떠나버리면서 더더욱 그녀를 잘 지키지 못했다는 마음이 짙어졌었다. 

수사가 난항을 겪으며 힘들었던 정국은 해주의 떠난 빈자리가 느껴져서 더욱더 허전했다. 그래도 나는 해주에게 필요한 사람이니까, 그녀가 결국은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해주에게 늘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한 것도, 해주의 마음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였다. 그런데 찾은 해답이 나에 대한 마음이었다니, 정말 반갑고 기쁜 소식이었다.





둘은 늦게까지 최근에 근황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정국의 사건 수사 이야기를 듣던 해주가 물었다.



"그런데 김태형 측근은 다 구속된 거 아니었어...?
 거기에 어떻게 김태형의 자금이 들어간걸 확신해?"


"그때 구속이 안 된 사람이 하나 있어... 
 너와 접촉했던 사람이야."



정국의 말에 해주의 눈이 커졌다. 구속이 안된 사람이라니... 해주의 머릿속으로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차트처럼 차르륵 돌아갔다.



"아..! "



박지민.. 해주는 그의 차가운 눈빛이 떠오르자 팔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홀연히 사라지고 나타나지 않았던 인물. 해주는 오소리 모임을 통해 그와 지속적으로 접속했지만, 이름 이외에 직업 나이 등은 모두 알 수 없었고, 가지고 있었던 전화번호도 모두 추적이 불가한 번호였다.



"해주야, 그 사람도 수인이지...?"



어? 내가 보고서에 박지민이 수인이라고 적지 않았던가...?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보고서 내용이 기억이 나질 않았던 해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맞아. 까마귀... 외현화 반응이 엄청나게 빠른 사람이야."



사람의 모습에서 동물의 모습으로 바뀌는 외현화 반응... 대부분의 수인들은 외현화 하는 동안에는 가만히 있어야 했다. 감정 상태에 따라 눈동자나 얼굴은 쉽게 외현화 반응이 올라오지만 전체를 외현화 하는 것은 일정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박지민은 그 때 순식간에 외현화하여 갑자기 날아가 버렸다.



"까마귀...?"



옃에 누워있던 정국은 뭔가 떠오른 듯 책상에 앉아 자신의 노트북을 켰다. 노트북에는 이곳에서 찍었던 온갖 CCTV들이 날짜와 장소별로 정리되어있었다. 



"여기, 이거 까마귀 날개 같지..?"



날아가는 뭔가의 날개를 정국이 가리켰다. 반지르르 윤기가 흐르는 검은 날개... 어느새 책상 옆에 다가온 해주는 자세히 화면을 들여다봤다.



"잘 봐봐, 

이게 창고에 달린 저용량 CCTV라 5초에 한 컷씩 찍혔거든? 
이 사람 보고 있어봐.."



카키색 후드를 입고 있는 남자 뒷모습... 갑자기 옷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순간 위쪽에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박지민이 맞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맞을 수도 있는데, 

 일단 깃털 같은 걸 수거해서 유전자 분석을 하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당연히 하려고 했지.
 그런데 아직 분석할만한 증거를 못 구했어"



정국은 앉아있던 시스템 의자에 등을 기대더니 하품을 하며 쭉 스트레칭을 했다. 그동안 박지민일 거라는 심증은 있었지만, 해주를 만나고 나니 심증이 확실해졌다. 그가 분명했다. 김태형의 잔당들은 여전히 수인들을 괴롭히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정국아, 내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이야기해줘. 나 돕고 싶어."



해주의 말에 정국은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해주야, 
 나는 널 다시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 

 게다가 넌 이미 박지민이랑 일면식도 있잖아.
 이 일에 끌어들일 수는 없어"


"하지만, 내가 일면식이 있으니까, 
 오히려 날 이용한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



패기넘치는 해주의 모습이 여전해서 정국이는 좋기도 했지만 걱정이 앞섰다.



"그 때 그 사건 이후, 힘들어하던 널 보며 많은 생각이 들더라,
 책임감도 들고... 

 그리고 알게 되었어. 난 널 안전하게 지켜주고 싶어. 
 너를 이용하다니... 그건 절대 안 되. "



정국의 말에 해주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뭐... 내가 현장에 나가는 거 말고, 
 지금처럼 이야기 나누는 건 괜찮잖아... 그치...?"


"그래, 이 정도는 뭐 나야 땡큐지. 고마워 해주야."



정국은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해주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 더이상 위험하게 하고 싶지 않아.


이후, 정국은 해주와 종종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해주는 함께 외현화 약물 분석 자료를 보며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신출귀몰한 그의 심리상태에 대한 조언을 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