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하고 씁쓸한

9_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눈을 떴다. 여전히 아픈 복부와 죽지 않고 잘 살아서 숨쉬고 있는 육체를 느꼈다. 원우는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눈을 뜨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두어번 울리고는 이어 문이 열렸다. 질리지도 않을까 들어온 사람은 정한이었다.





"어때, 죽음의 문턱 가까이 가본 기분은?"

"저번부터 자꾸 당치도 않는 소리를 자꾸 하시네요."

"이해해줘, 이것도 다 보여주기 식인 거 알잖아?"





정한이 어린아이 마냥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원우는 저 웃음과 미소가 질리다가도 좋았다. 저 웃음을 볼 때마다 느낄 수 있던 자유 덕분이었다. 원우는 이왕 온 정한에게 이것저것 시켰다. 물을 가져다 달라던지 밥을 좀 먹여달라던지. 높은 자리에 앉아서 이런 일 안 한지 꽤 됐을 건데. 라며 킥킥 하고 웃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본 정한이 복부가 아니라 입이 다쳤어야 됐는데. 라며 짜증을 냈다. 그러면서 원우가 해달라는 건 다 해줬다. 어쨌든 자신이 초래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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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민규가 들어왔다. 민규는 눈앞에 선 정한에게 간단히 오늘 할 일을 브리핑하고 원우를 챙겼다. 몸은 좀 어떤지. 아직도 많이 아픈지. 아침 약은 챙겨 먹었는지. 걱정이 산더미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과거 동거를 할 때 끼니조차 제 시간에 맞춰 챙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인과응보라고 이건 원우가 과거 제대로 제 몸을 챙기지 않았기에 받아야 하는 마땅한 걱정과 잔소리다.

그러나 옆에서 듣던 정한이 민규의 잔소리에 질렸는지 민규에게 일을 던졌다. 시간이 남으면 원우 말고 순영이나 좀 교육시키라는 것이었다. 민규는 그건 다른 사람 시켜도 되는 거 아니냐며 투덜거렸지만 정한이 지금 내 말을 안 듣겠다는 거냐며 목소리를 낮추자 민규는 금방 시무룩해져서는 나중에 오겠다는 말과 함께 나갔다.






"민규도 참 웃겨. 네가 그렇게도 좋을까."

"그때의 영향이겠죠."

"아무리 좋아도 지금은 안 돼. 지금이 딱 보여주기 좋은 때라고."

"아까부터 뭘 자꾸 보여주는데요."





원우의 말에 또 신난 정한이 소설 한 편을 뚝딱 만들어냈다. 조직의 보스가 사랑하는 사람. 일처리 중에 그 사람이 중상을 입고 침대에서 앓아누웠으니 보스라는 작자는 그 사람의 상처만큼 가슴이 찢어지는 거지. 결국 조직은 잠시 뒤로 하고 아픈 제 사랑에게 헌신하는데... 같은 그런 소설 말이다.

원우는 정한이 정말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조직을 뒤로 한다느니 그게 조직의 보스가 되어서 내뱉을 수나 있는 말인지. 승철 쪽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자유로웠다. 조금은 틀이 잡히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일할 때는 확실하게 하니까 그 정도로 만족하면 될까. 아니 만족의 문제도 사실 따질 필요없다. 원우에게 정한의 조직이란 자유를 얻기 위한 도구, 수단에 불과하니까.






"헌신은 이 정도면 됐고 일하셔야죠."

"에이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굴어. 네 애인이 이렇게 널 위하는데."

"됐네요. 관심 없습니다."






원우의 반응에 정한이 졌다는 듯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는 여기는 자신의 허가 없으면 아무도 못 들어올 거니까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이어 원우에게 푹 쉬라는 말을 전하며 문을 열어 나갔다. 정한이 떠난 방은 많이 조용했다. 혼자서 할 건 없으니까. 몸이 아파서 움직일 수도 없으니까. 원우는 눈을 감았다.

이 얼마나 오랜만의 달콤한 휴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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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 승철 쪽은 순영과 연락이 끊기고 다른 수를 써야 됐다. 스파이가 들켜버린 거 더는 그 방법을 쓸 수 없다. 전면돌파를 하거나 협상을 하거나. 아니면 협박을 하거나. 사람을 처리하는 일에는 자신 쪽이 더 우세한 것을 알지만 원우가 저쪽으로 간 걸 아는 이상 쉽사리 정한 쪽을 치는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협상을 한다면 정한 쪽이 어떤 걸 원할지 몰랐고. 협박을 한다고 해도 정한이 협박에 당할 사람이 아닌 것도 알고 있었다. 

집을 나간 고양이 한 마리 되찾는 게 이리 어려운 일인지 알았을까. 괜히 고양이는 주인보다는 집을 따른다고 하던가. 제 집이 마음에 들었으면 이렇게 떠날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텐데. 승철은 후회가 됐다. 어느 정도의 자유를 주고 다시 억압하고. 그렇게만 했어도 원우가 제 곁을 떠날 생각은 못했을 텐데. 여전히 이런 생각들뿐이다.





일단은 이전에 순영에게 받은 정보를 정리했다. 정한과 원우가 각별한 사이가 된 것 같다는 정보. 대충 듣기로는 사랑 따위를 한다는데 승철이 그걸 믿을까? 역시 그럴 일은 없었다. 이 정도 조직에서 살아보면 안다. 무엇이 거짓이고 진실인지. 당연히 정한과 원우가 사랑 따위를 할 리가 없지 않나. 과거 우리 모두가 하나의 조직에 머물렀을 때 그런 조짐이 보인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는 걸 안다.

그가 내릴 수 있는 가설 중 가장 적당한 건.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 원우가 제 곁을 벗어나 도망 중이다 라는 정보를 얻고 정한이 먼저 원우에게 접근해서 거래를 했을 것이다. 원우가 가장 바라는 것. 그리고 정한이 원하는 것. 그 두 가지가 결국 서로의 양보하며 거래가 됐을 거라는 가설이었다.



이 정보는 여기까지 정리하고 이전에 승철이 순영에게 알려주었던 원우의 잭 나이프. 순영이 정한 쪽에서 원우를 확인할 때는 그 잭 나이프가 없었다는 정보가 승철에게 들어갔다. 정말 이 일에 흥미라도 떨어진 걸까 승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집에서도 잭 나이프는 보지 못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럼 그 잭 나이프의 행방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잭 나이프의 행방이 어떻든 일단 원우는 살인에 흥미를 잃었다는 말이 확신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잭 나이프를 처음 받았을 때부터 그 잭 나이프가 얼마나 닳아도 그 잭 나이프만 쓰는 원우를 승철은 기억한다. 쉽사리 버리지 않을 제 무기를 제 손으로 놓았다니. 승철은 한 편으론 아쉬움을 뱉었다.



그리고 흥미로운 정보 중 마지막 하나. 정한과 원우 사이에 민규가 있었다는 것.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원우의 곁에는 민규가 있었다는 것이다. 원우가 정한 쪽으로 왔을 때도 정한과 원우 사이에 그런 소문이 퍼졌을 때도 모든 상황에는 민규가 있었다는 것이다. 승철은 이 정보를 보며 씨익 웃었다.

이 정보 하나로 잭 나이프의 행방을 알 것 같았다. 원우가 정한을 만나는데 민규를 통해 만났다면. 만약 지금 이 행동의 원인이 원우 자신이 아닌 민규에게서 온 거라면. 원우의 잭 나이프는 민규에게 쥐어져 있을 것이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민규는 지금 원우의 약점이 되었다는 소리기도 하다.

소중한 걸 쥐고 있는 소중한 사람. 원우와 민규는 과거부터 각별하다는 소리를 들어왔다. 파트너라서 같이 일을 하고 왔을 뿐인데 민규는 일이 끝나면 원우를 항상 친형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챙겼다. 승철은 그 모습을 항상 유심히 지켜보았다. 원우의 표정이나 행동을 세세히 살피기도 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 약점으로 이용하기 위해.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설. 정황에 따른 추론에 불과한 것. 모든 건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됐다. 원우가 정한 쪽에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어디에 몸을 숨긴지는 알 수 없으니 정한 쪽의 정보를 어떻게든 빼내어 민규를 잡아야 됐다. 민규를 잡으면 원우가 모습을 드러낼 건 확신이 있으니까. 승철은 곧바로 정한 쪽에서 털 수 있는 건 모두 다 털라며 지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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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는 순영에게 정한 쪽의 방식에 대해서 대충 설명했다. 어차피 조직 생활 좀 해봤으면 금방 적응할 거라며 대강 끝내고 가려는데 순영이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었다. 민규는 대충 하고 얼른 원우 챙기러 가야 하는데 순영에게 붙잡혀서는 갈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결국 순영이 물어보는 건 다 대답하는데 제 주머니에 있는 잭 나이프를 보며 순영이 질문을 던져왔다. 여기선 사람 처리를 이런 식으로 안 하는 것 같은데. 이런 잭 나이프를 가지고 있네? 민규가 위협용으로 말을 돌리는데 순영이 거짓말 말라며 그거 전원우 거잖아? 라고 말하자 민규의 표정이 급격히 차가워지며 순영의 멱살을 잡았다.




"너 뭐야."

"나 누군지 잊은 건 아니지?"

"너 이쪽에 충성을 다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스파이가 어떻게 한 배만 타겠냐?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거지."




능청스러운 순영의 말에 민규가 화가 나서는 잭 나이프를 손에 쥐었다. 당장이라도 순영을 죽일 수 있을 거리와 상황이었다. 하지만 민규는 다시 잭 나이프를 주머니에 넣고는 손을 풀었다. 순영이 도발을 해도 넘어가지 않았다. 이 잭 나이프는 원우와 대화한 뒤로 승철에게 향하기로 제 자신과 약속했으니까.

흥미가 떨어진 순영이 얌전히 무리 사이로 돌아갔다. 민규는 순영을 주시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스파이가 한 배를 타진 않는다. 그 말은 자신은 언제든 승철에게 돌아갈 상황이 오면 돌아간다는 뜻이다. 정한에게 곧바로 이 사실을 전하고 순영을 처리할 방법을 찾아야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자식이 원우에게 접근하는 걸 막아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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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다 되어서야 원우가 있는 방으로 왔다. 할 것도 없고 지루했던 원우는 새근새근 잠을 청하고 있었다. 민규는 혹여나 원우가 깰까 조용히 돌아가려는데. 인기척에 눈을 뜬 원우가 민규를 불렀다. 민규는 무안해져서 머리를 긁적이는데 원우가 마침 심심했던 참인데 놀아달라며 민규를 잡았다.





"누군 좋겠어. 마음 편히 쉬고 말이야."

"마음 편히 못 쉬게 누가 들어와서 말이야."

"그건 걱정이 되니까..."

"알아. 근데 버릇은 고치기가 힘들어서 말이지."





버릇. 자신이 죽인 목숨들이 많아서. 저 역시도 자는 사이에 죽을까. 그때부터 원우는 조금의 인기척에도 잠에서 깼다. 그래서 항상 깊게 잠들지 못하고 피곤함에 쩔어서는 매번 조금 조금씩 잠을 청하기도 했었다고. 민규는 그런 원우를 잘 알았다. 집에 있을 때도 조금 움직였다 하면은 흠칫거리며 눈을 뜨는 예민한 원우를 기억한다.

아무튼 심심하다는 원우에게 민규는 다양한 말을 건냈다. 민규는 원우에게 할 말이 많았다. 걱정과 잔소리는 물론이고 자유를 얻게 되면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야 되지만 원우가 즐기고 있는 이 해방감과 자유를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되도록이면 좋은 얘기들만 꺼냈다. 저는 짜증 내고 있지만 원우가 웃기도 하는 일상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그렇게 좋은 분위기가 이어갈 것 같았는데 그 분위기를 먼저 깬 건 원우였다. 원우가 순영을 언급하자 민규의 표정이 연기하기도 이미 늦을 정도로 식었다. 승철 쪽의 스파이가 이 정도로 싫은 건가 생각하는 원우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순영이 원우를 어떻게 할까 그게 싫은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그 자식이 원우를 승철에게 데려갈 것 같았다.





"형 그 얘기는 하지 말자."

"그쪽 일이라면 안 들을 수가 있어야지."

"...무ㅅ...어도...ㅁ...거야."

"뭐라고 민규야?"

"무슨 일 있어도 막을 거야. 그 자식."







원우는 무슨 상황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민규의 표정이 왜 차갑게 식었는지도 알 것 같다. 민규가 뭘 불안해 하는지도 알 것 같다. 말은 충성을 다 하겠다고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스파이가 몇이나 있을까. 원우도 모르진 않았다. 제 잭 나이프를 금방이라도 뺄 수 있게 주머니에 얕게 넣고서는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 막아준다는 민규가 기특하면서도 고마웠다.

원우가 주먹을 쥐고 민규에게 내밀었다. 민규는 차갑던 표정을 녹이고는 원우의 손을 바라보더니 같이 주먹을 쥐고 부딪혔다. 원우는 어느 때보다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민규에게 말했다.






"내 잭 나이프를 쥐었으니. 뭐든 잘 될 거야."

"어쩐지. 형이 이 잭 나이프만 쓰더라."

"쓰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내가 너를 믿는 것처럼. 민규도 날 믿어줘."

갑자기 사라지지 않겠다고 약속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