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넌 나의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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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가치 있는 회사크루 미션에 의해
진행되는 글입니다.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연애는 다 해봤지만, 이번처럼 개 같은 연애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처음부터 개 같은 연애는 아니었지만, 내 얘기를 듣고 나면 왜 개 같은 연애인지 알 수 있을 거다.
내 나이 27살,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라고 생각한 남자였다. 하지만 나의 구원이라고 생각했던 이 남자와의 연애는 처음부터 모든 것이 다 얽혀있었다. 그걸 바보같이 1400일이 다가오는 그 시점에 알았다는 거지.
내가 말하는 이 개 같은 연애의 시작점은 4년 전, 새들도 짝짓기를 시작하는 싱그럽고 화창한 봄날이었다. 새로운 만남을 하기 딱 좋은 날씨에 그 남자와 나는 손님과 알바 사이로 만났다. 대학 공부를 하면서 비는 시간에 카페 알바를 하던 나는 그날 진상 중에 개 진상 손님이랑 마주치게 되었었다. 알바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스쳐 지났을 진상 손님. 진상도 개 진상이 아니었었지.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누가 여기다가 휘핑크림 올리래?! 난 휘핑크림 올리라고 한 적 없는데!"
"분명히 올려달라고 하셔서 체크했는데요"
"귀먹었냐고, 난 그런 적 없다니깐?!"
"머리가 어떻게 됐어?! 기억력 안 좋아?"
한번 들은 노래 가사를 외울 만큼 기억력이 좋은 나에게 막말을 퍼붓는 진상 손님에 내 입에서는 도저히 죄송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건 솔직히 자존심보다 내 잘못이 아닌 일에 사과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렇게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진상 손님에 카페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에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는데.
"저도 들었는데요. 휘핑크림 듬뿍 올려달라고 하신 거"
"기억력이 안 좋으신 건 그쪽 같은데?"
진상 손님이 휘핑크림을 올려달라고 한 걸 들었다는 남자 손님의 발언에 당황한 진상 손님은 말까지 더듬으면서 증거 있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저기 보이는 카메라에 다 녹음되었을 텐데, 저거 확인해보면 되겠네요. 영업 방해죄로 처벌받으실 수 있는 건 알고 계시겠죠?"
남자 손님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카메라를 발견한 진상 손님은 이런 것들이 다 있어! 하면서 씩씩거리며 카페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진상 손님이 사라지고 긴장이 확 풀린 나는 벽을 겨우 지탱하면서 간신히 서 있었다. 그리고는 그 손님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먼저 입을 열면서 나에게 물었다.
"저런 진상들 상대하는 거 힘들죠?"
"종종 있기는 한데, 아직도 상대하는 건 힘드네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보답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원하시는 음료가 있으시면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음료는 괜찮은데... 혹시 남자친구 있으신가요?"
남자친구가 없다는 내 말을 듣고는 전화번호를 보답 대신 받아 가셨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염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라서 작게나마 보답을 하려고 따로 식사 대접을 하였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부터 카페에 매일 찾아오셔서 좋은 말 해주고, 얼굴을 보다 보니, 이 사람이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이 연애는 내 고백으로 시작되었었다.
연애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순탄하게 지나갔다. 전에 했던 몇 번의 연애보다 더 안정적이었고, 싸우는 일도 거의 없었다. 오해가 생기면 풀려고 더 노력한 건 남자 쪽이었기에 그 사람이 정말로 좋았었다.
남들이 가장 걱정하는 여사친에 대한 관계도 거의 깨끗했었고, 내가 모르는 친구는 없을 정도로 나에게 믿음을 준 사람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 연애를 개 같은 연애라고 하냐고? 그 이유는 1400일이 되기 하루 전날 있었던 일 때문이다.
항상 기념일 이벤트를 해주는 그 사람에게 이번에는 내가 이벤트를 해서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한 달 전부터 고민해서 생각한 걸 준비하고 있었다. 이벤트의 꽃인 케이크를 일주일 전에 주문했었다. 배달시키면 될 텐데, 왜 살아서 그런 고생을 했는지. 그걸 직접 가지고 오겠다고 집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곳까지 걸어간 걸 생각하면 그날의 나를 한 대 때려주고 싶다. 아주 지극정성이다, 응?
뭐 암튼 케이크를 가지고 집으로 가는 길에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하게 되는데. 앞구르기 해봐도 뒤구르기 해봐도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분명했다. 회사에서 야근한다던 사람이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건지. 게다가 정장 차림도 아닌 클럽에서 입을 만한 그런 옷차림이었다.
그것보다 제일 믿어지지 않았던 건, 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입을 맞췄던 것이었다. 여자관계도 깔끔하고 남사친밖에 없는 그 사람이 다른 여자에게 입을 맞췄다는 건 그야말로 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그때 바보같이 그 여자의 머리끄덩이를 잡지 않은, 그 사람에게 귀싸대기를 날리지 않은 내가 정말로 한심하다.
그 뒤로 어떻게 됐냐면, 대판 싸우고 연락 끊고 흔한 연애의 마침표를 했었지. 알고 보니까, 내가 알고 있었던 좋은 사람은 없었다. 처음부터 나를 구원해준 구원자가 아닌 내 인생을 망친 개자식이었다.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그 사람을 카페에서 처음 만났던 건 우연이 아닌 고의였다. 나를 자신에게 반하게 하기 위해서 개 진상 손님이랑 판을 짠 거였고, 자신이 만든 상황에서 나를 구해주는 척한 것뿐이었다. 한마디로 날 자신의 보여주기식 여자친구로 만들려는 계략에 바보같이 내가 빠진 것이다.
여자 관계가 깨끗했다는 건 다 내 착각이었다. 야근한다, 남사친 만난다고 거짓말하고 클럽을 갔었고, 거기서 만난 여자랑 선 넘은 짓거리는 다했다는 거. 그 길고 긴 4년이란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제일 웃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는데, 전화기에 저장 되어있는 남사친들의 번호들의 80프로가 다 여자 번호였다는 것.
생각했던 것보다 나는 사람 보는 눈이 없었나 보다. 내가 얼마나 호구 같았으면 가짜 상황까지 만들어내서 날 자신에게 넘어오게 했을까.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좋았더라면 이런 개자식은 만나지 않았겠지. 할 수만 있다면 내 뇌를 꺼내서 이 사람에 대한 모든 기억을 씻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지우고 싶었다.
한 번밖에 없는 내 생애 4년의 세월을 이런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 새끼한테 뺏겼다는 사실에 괴로워서 며칠동안 술만 마셨다. 다 지우고 싶어서. 솔직히 말하면 통째로 빼앗긴 내 4년의 세월을 되돌리고 싶어서, 그냥 마셨다. 마신다고 그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집에서 제일 가까운 술집에 들어간 나는 혼술을 했다. 나한테 친구는 없냐고? 그건 또 아니다. 이래 봬도 이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아온 나는 스치면 인연을 만드는 사람이라서 인맥이 넓었다. 근데 막상 연락처를 들어가 보면 힘들 때 내 속마음을 들어줄 진실한 친구가 없었다.
"여기서 제일 쌘 술로 한 병 주세요"
"한잔 마셔도 취하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괜찮아요"
"혹시 했는데, 여주 선배님 맞으시네요"
내 이름을 불러오는 바텐더에 숙였던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하자 찬란했던 내 고등학교 시절에 내가 좋다던 나보다 2살 어린 후배 김태형이었다.
조각 같은 얼굴을 가졌는데, 항상 얼음장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다고 우리 학교에서 뿐만이 아닌 전국으로 유명한 냉미남이었다. 그런 냉미남이 내 앞에만 세상 강아지 같은 얼굴을 보여줬다면 못 믿겠지. 하지만 이건 사실이다. 나에게만 강아지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김태형. 덕분에 많은 여학생의 부러움과 질투를 온몸으로 받았었지. 다행히도 내가 어디 가서 말발로 꿀리는 사람이 아니라서 아무도 나한테 찍소리도 못했지만.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긴 한데, 나도 어디가서 꿀리는 미모는 아니여서, 고백도 지겨울 정도로 받아봤었지. 그래서 솔직히 처음에는 김태형이 다른 남자들과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냥 내 얼굴 보고 날 좋아하는 거라고. 근데 시간이 갈수록 진심이 느껴졌었어.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쓰레기 새끼랑 김태형의 진심은 달랐었다. 그 개자식은 내 외면에 진심을 담았지만, 김태형은 내 내면에 진심을 담았었다. 무슨 뜻이냐면, 내 외면에 진심을 담은 그 새끼는 '우리 여주는 얼굴도 이쁘고 마음도 이뻐. 안 사랑할 수 없다니깐.', 내 내면에 진심을 담은 김태형은 '선배는 강한 사람 같지만, 제 눈에는 그 누구보다 마음이 여린 사람 같거든요. 전 선배의 그런 모습을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라고 말했었거든.
"정말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고 있길 바랬는데, 아닌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네요"
".... 미안해... 만약에라도 다시 널 만나게 되면 꼭 말해주고 싶었어. 정말로 너무 미안하다고"

"그렇게 절 두고 가셨으면, 보란 듯이 잘 지냈어야죠. 왜 이러고 있어요"
나에게 가장 쌘 술 한 컵을 따라준 태형이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 갓 1학년이었던 태형이. 나를 위해서 태형이를 위해서라도 고백을 거절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진심 어린 고백을 해 오는 이 아이를 더는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었다.
4개월이란 짧지만 행복했던 연애에 마침표를 찍게 된 건 나로 인해서이다.
수능을 치고 대학생이 되는 나, 수능 공부를 해야 하는 태형이. 서로의 앞길을 위해서라도 더이상 이 연애를 이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기적인 말로 태형이를 떼어냈었다. 내가 서울인 못 하면 네가 책임질 거냐고, 내 앞길 막지 말라고, 나는 사랑보다 내 인생이 더 중요하다고. 이런 말들을 거침없이 태형이에게 퍼부었었다.
그 이후로 학교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않았고, 졸업한 뒤로는 단 한 번도 태형이를 보지 못했다가 지금 여기서 만나게 된 거지.
"아니야. 네가 너 상처 줘서 벌 받는 거야. 나도 참 웃겨. 널 상처 줬으면서 행복을 꿈 꿨다는 게. 너도, 나도 행복하길 바랬는데"
"나 참 이기적이다. 그렇지?"
"선배는... 아니 누나는 여전하네요, 마음 여린 거"
"누나랑 헤어진 뒤로 잊어보려고 정말 노력 많이 했었어요.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길래 다른 사람도 만나보았었고, 누나를 잊을 수 있는 방법이란 방법은 다 써봤어요"

"그런데 8년이 지난 아직도 누나를 잊지 못했는데, 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뭐라고 8년이나 잊지 못했다니.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내 마음이 흔들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늦지만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누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데, 누나는 어때요?"
"내가... 어떻게 무슨 낯짝으로 널 다시 만날 수 있겠어... 내 행복이 아닌 네 행복을 찾아.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누나가 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에요. 누나가 행복하면 저도 행복하고요"
그때처럼 진심 어린 말로 치고 들어오는 태형에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앞에 놓인 술을 무작정 들이켰다.
"왜... 나야...? 다른 사람 많잖아. 너처럼 좋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좋은 사람이 많은데, 왜..."

"이래서 전 누나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요"
술잔을 꽈악 움켜잡은 나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오면서 말했다.
시궁창 같아졌던 내 인생에 한 줄기의 빛을 내려준 태형아. 넌 나의 구원이야.
비록 개 같은 연애에 몸과 마음이 다쳤지만, 나를 구원해준 태형이 덕분에 남은 인생은 정말로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걸 장담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