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이 오면 네가 생각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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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가치 있는 회사 크루 미션으로
진행되는 글입니다.
2021년 8월 23일, 18세 김여주 시한부 판정을 받다.
남은 시간은 오로지 한 달뿐인데, 18년 인생 연애 한 번 못 해본 게, 죽어서도 한이 될 것 같은 여주는 낫은 한숨을 쉰다. 꽃다운 18세에 시한부라니, 참 웃프지가 않나. 그동안 시간을 헛되이 보낸 것 같아 후회가 된다.
이대로 한 달의 시간을 허무하게 보내고 싶지 않은 여주는 다이어리 하나를 꺼내 30일 동안의 일기를 쓰기로 하는데.
막상 쓰려고 하니, 병원에서 보내는 하루는 매일 똑같이 반복되기 때문에 뭘 써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런 여주의 고민을 날려버린 건 선선하게 불러오는 가을바람. 쨍쨍했던 해는 서서히 옅어지고 더위는 찬찬히 사그라져갔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여주를 부르듯이 창가로 이끌었고, 창가에 선 여주는 병원 밖 벤츠에 앉아있는 한 남자아이를 발견한다.
어쩌다가 팔을 다친 건지, 오른팔에 깁스를 차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그 아이가 너무 외로워 보여 뭔가에 이끌린 듯이 병원 밖으로 나가 아이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아이의 옆에 안은 여주는 아이가 듣고 있는 이어폰 한쪽을 빼서 자신의 귀에 꽂았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이어폰 한쪽을 귀에 꽂은 걸 본 아이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여주를 바라보았다.
"너 팔은 어쩌다가 다친 거야?"

"친구들이랑 농구 하다가"
"아프겠다. 근데 집에 안 가고 왜 여기 앉아 있는 거야?"
여기서 한 달 동안 있어야 한대. 깁스를 했다고 한 달 동안이나 병원에 있는 건 태어나서 처음 봤다. 다른 곳이 아픈 것도 아닌데, 고작 팔 하나 부러졌다고 병원에 한 달이나 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아니. 다른 아픈 곳이 없는데, 병원에서 한 달 동안이나 있으라고 했다고? 미친 거 아니야?"
"그냥 꼴 보기 싫었던 거겠지. 내가 워낙 사고뭉치라서"
"네가 사고뭉치라고?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네. 이 아이는 자신의 이름이 전정국이라는 걸 알려줬고, 나랑 동갑이라는 것까지 알았다. 사고를 많이 쳐서 선생부터 부모님까지 자신을 싫어한다고 했다. 하지만 여주 눈에는 그냥 누군가의 관심이 필요한 18살 아이밖에 안 보였다.
"내 얘기만 너무 했네. 이제 네 얘기를 좀 해줘"
"내 얘기 재미없을 텐데, 그래도 괜찮아?"
"그럼 내 얘기는 재밌었나 봐"
뭐 재미없진 않았어. 그렇게 여주는 정국에게 자신의 이름과 나이, 한 달 남은 시한부라서 병원에 있는 거라고 모두 말해주었다. 여주의 얘기를 들은 정국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시한부라는 게 점잖은 충격이었는지, 애꿎은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입술 터지면 아프니까, 깨물지 마"
"........."
"한 달 후에 죽는다는데. 너무 담담해서 이상하지? 뭐, 내가 죽기 싫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가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아까운 내 시간만 뺏으면 뭐 하겠어"
"........."
"그럴 바에 차라리 마음 편하게 남은 시간 보내려고"
여주의 말을 조용히 듣던 정국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여주에게 물었다.
"그 한 달 동안 꼭 하고 싶은 건, 있어?"
"꼭 하고 싶은 거라..."
그동안 한 번도 못해본 연애. 정말로 미친 듯이 사랑해보는 거.
"연애... 해보고 싶어"
"연애...?"
"정말로 죽고 못 살 듯이 하는 연애 있잖아. 난 항상 그런 연애를 하고 싶었어"
"........"
"웃기지? 18살이나 먹고 그 연애 한 번을 못 해봤다는 거"
여주에 말에 정국은 아니라고 반박을 하지 못하였다. 인생 18년 차 정국에게 연애란 식은 죽 먹기였다. 반반한 외모에 못 하는 게 없어 그의 주변은 여자들로 늘 넘쳐났다. 사귀고 지겨워지면 헤어지고, 늘 반복되는 레파토리가 정국의 흔한 연애였다. 물론 고백을 하는 건 항상 여자 쪽이었다.

"나랑 할래? 그 연애"
"...난 장난 같은 연애는 안 해. 내 시간이 한달 남았어도 말이야"
"그러니까, 하자고 죽고 못 사는 연애"
너 진심이야? 오늘 처음 본 나랑 죽고 못 사는 연애를 하겠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불쌍해서 그러는 건지, 정말로 내가 마음에 들기라도 한 건지.
그래서 물었다. 내가 연애도 못해보고 한 달 뒤에 죽는다니까, 불쌍하냐고. 그래서 그러는 거냐고. 하지만 내게 돌아온 답은 생각지도 못한 답이었다.
"불쌍해서 연애하자는 거 아니야. 그냥 김여주 네가 궁금해서. 그래"
상상치도 못한 인연으로 한달 남은 내 삶의 첫 연애의 시작으로 나의 30일 간의 일기도 시작되었다.

..........
하루하루, 일분일초가 아까운 여주는 정국과 매일 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둘의 연애는 다른 평범한 연인들의 연애보다 확실히 달랐다.
"너 아까부터 왜 자꾸 쳐다봐"
"예뻐서"
"ㅇ,아니.../// 넌 뭔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왜, 난 솔직하게 말한 거뿐이야. 누가 불을 지른 듯이 여주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첫 연애인 여주에게는 정국의 행동, 말 하나하나에 미친 듯이 설렜고, 연애 고수인 정국은 그런 여주가 마냥 귀엽게만 느껴졌다. 여주 같은 여자들을 많이 보긴 했어도 여주처럼 감정이 얼굴과 말투에 그대로 다 드러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손 줘 봐"
손을 달라는 정국에 아무런 생각 없이 손을 내민 여주의 손가락에 알록달록한 색깔의 실반지가 끼워졌다. 병원에 갇힌 신세인 정국에게 있는 건 피씨방에 가려고 남겨두었던 몇푼밖에 없었다. 여주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었던 정국은 간호사에게 간절하게 부탁해 병원에서 가장 가까운 슈퍼로 향했다. 그곳에서 정국의 눈에 띈 건 500원짜리의 실반지였다.
실반지를 받은 여주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실반지가 마음에 안 든 건 아닐까? 그냥 보석 반지를 살 걸 후회하는 정국의 손을 살며시 잡아 온 여주에 바닥을 응시하던 고개를 들었다. 여주의 눈시울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ㅇ,아 마음에 안 들어...?"
"........."
"ㄴ,내가 다른 거로 사 올까?"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하는 정국의 품에 여주가 안긴 건 순식간이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정국의 품에 파고 들은 여주는 조용히 울먹였다. 울먹이는 여주에 당황한 쪽은 오히려 정국이었지.
"고마워... 너무 마음에 들어"
"처음이야. 누군가가 나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선물을 준 건"
"........"
늘 혼자였던 여주에게는 친구가 거의 없었다. 그런 여주가 받았던 선물은 생일 선물뿐이었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친한 아이들은 생일이 아니여도 서로에게 선물을 주기도 했는데, 여주에게 그런 친한 친구는 없었기 때문에 한 번도 이유 없는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정국이 준 500원짜리 실반지 하나에 큰 감동을 받은 거겠지.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다"
"나중에는 더 이쁜 걸로 줄게"
"아니야. 이거 너무 이뻐"
사실 정국은 꽤 부유한 집안의 막내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항상 부족한 거 없이 살았기에 500원짜리의 실반지를 여주가 싫어할까 봐 걱정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돈 좀만 더 모아 둘 걸 싶었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겨우 500원짜리의 실반지에 행복해하는 여주의 모습을 보고 가격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
기간이 정해진 계약 연애처럼 이 둘의 연애 기간은 턱없이 짧았기에 사귀고 일주일이 되던 날, 정국은 여주에게 뭔가 특별한 걸 해주고 싶어서 고민하다가 결정하게 된다.
"너 오늘 무슨 일 있어?"
"ㅇ,아니...! 아무 일도 없어"
"아무 일도 없는 사람이 내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오늘 그렇게 이상해 보이나... 왜 자꾸 빤히 쳐다보는 거지... 자꾸만 쳐다보는 정국에 오히려 화끈거리는 자신의 얼굴을 숨기고 싶어졌다.

"아,아니. 아무것도 안 묻었어. 그냥 보고 싶어서"
"........///////"
또또, 사람 마음 훔치면서 정작 자신은 아무렇지 않아서 억울해진 여주. 말 안 해도 여자 수도 없이 울렸던 거 보인다 보여. 하긴 저 얼굴로 살면 살맛 나긴 하겠네. 정국 같은 얼굴로 살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잠시 생각에 빠진 여주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한 건, 자신의 볼에 맞닿은 말랑한 감촉 때문이었다.
사귄 지 일주일이 되어 정국이 여주에게 주고 싶었던 건, 볼 뽀뽀였다. 그 말은 즉시 지금 정국의 입술이 여주의 볼에 닿았다는 거지. 예고에 없던 갑작스러운 볼 뽀뽀에 여주는 얼음 땡 놀이를 하는 것처럼 얼음이 되어버렸고, 입술을 뗀 정국은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장에 진정을 못 하고 있었다.
여자들과 사귀면서 입맞춤은 수도 없이 해왔지만, 심장이 이렇게 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볼 뽀뽀 하나에 팔딱팔딱 뛰는 심장이라니, 그제야 정국은 확실하게 알았다. 아, 내가 김여주를 진심으로 많이 좋아하는구나. 18년생에 처음 느끼는 사랑이란 감정이었다.

....
아침부터 심장이 조금 안 좋은 걸 느낀 여주는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주신 진통제 두 알을 물과 함께 삼켰다. 오랫동안 혼자인 게 익숙해서 자신이 몸이 아파도 신경을 안 썼던 그녀였지만, 이제는 정국이 있으니 피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마지막이 올 때까지는 참고 또 참고 싶었다.
매일 같이 먼저 자신의 병실에 찾아와주는 정국에 오늘은 자신이 먼저 찾아가고 싶어 링거를 끌고 가 정국의 병실 문을 열려던 찰나에 통화 소리를 듣고 동작을 멈춘다.
"뭐하긴 그냥 있지"
"@&$(%%(@*$*%"
"챙기긴 뭘 챙겨. 안 챙겨도 돼"
"$*%*@(%*%*#*@#*$*"
"언제는 내가 생일 챙겼냐. 됐어, 오지 말고 끊어"
상대방이 하는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지만, 정국이 한 말은 분명히 들었다. 여주가 이해한 게 틀리지 않다면 오늘은 정국의 생일이다. 일 년에 한번 밖에 오지 않는 생일. 다른 건 다 몰라도 생일만큼은 꼬박꼬박 챙기는 여주에게는 생일을 챙기지 않는다는 정국의 말은 꽤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정국이 나오기 전, 링거를 끌고 다시 병실로 돌아온 여주는 정국에게 잊지 못할 생일 파티를 어떻게 해줄까 고민을 했다. 하지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여기는 병원이고 병원에서 생일파티를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가 큰 고비였지. 고민하고 또 고민을 한 여주는 정국의 생일파티를 준비했다.
3시간 뒤, 치료 받는다고 여주를 보지 못한 정국은 빨리 여주를 보고 싶은 마음으로 여주의 병실에 앉아있었다. 조용했던 병실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여주가 오는 줄 알았던 정국은 버선발로 마중 나가는데, 그의 예상과는 달리 들어오는 사람은 여주가 아닌 여주의 당담 간호사였다.
"여주 치료 아직도 안 끝났어요?"
"여주, 너 보고 싶다고 네 병실에 갔는데?"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치료가 끝나자마자 자신을 보려고 병실로 갔다는 간호사의 말에 정국의 입꼬리기 귀에 걸렸다. 빨리 여주를 만나서 품에 안고 치료하느라 수고했다고 속삭여주고 싶었지. 그런 그는 그녀를 향해서 한걸음에 달려갔다. 자신의 병실 앞까지 도착한 정국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여주를 찾는 정국의 눈에 띈 건,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주였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은 모습을 한 여주에 정국은 넋을 잃었지.
"정국아... 나 많이 이상해...?"
"ㅇ,아니...! 너,너무 예뻐..."
"안 이상해서 다행이다"
정국아, 같이 초 좀 붙여줄래? 내가 처음이라서. 누군가를 위해서 생일파티를 준비하는 게 처음인 여주는 서툴러서 케이크에 촛불을 못 붙이고 있었다. 어떤 의미의 케이크인지도 모른채 불을 붙이는 걸 도와준 정국이. 드디어 촛불에 불을 켠 여주는 케이크를 들어 올리고는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이 케이크가 자신을 위한 케이크인 걸 알아챈 정국은 울컥 올라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흘린다. 떨려오는 입술을 꾹 진정시키면서 겨우 촛불을 불자, 환한 미소를 한 여주의 생일 축하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오늘이 내 생일인 건 어떻게 알았어..."
"어찌하다가 알게 됐어. 내가 알게 돼서 다행이지, 너 나한테 말 안 해줄 생각이었지?"
"솔직하게 말하면 맞아. 어차피 챙기지도 않는 생일 말할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아무리 그래도 내가 여자친구인데, 그건 말해줬어야지"
섭섭하게. 만약에 나중에 알게 됐으면 나 진짜로 너한테 완전 섭섭할 뻔했어. 하마터면 나한테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네 생일을 축하해주지 못 할 뻔했잖아. 처음이자, 마지막. 그 말이 정국의 가슴에 못처럼 깊숙이 박혔다.

".....고마워. 정말로 고마워, 여주야"
내 인생에 잊지 못할 생일선물이야.
"아직 생일선물은 안 줬는데?"
"어?"
생일선물은 아직 안 줬다는 여주의 말에 살짝 당황한 어조를 내뱉은 정국에게 한 발짝 한 발짝 코앞까지 가까이 다가온 여주는 팔을 정국의 목에 두르고 살짝 끌어당겨서 자신의 입술을 정국의 입술에 포개었다. 그 후 이 둘은 한참을 서로에게 옭매였다.

.....
하루하루가 지나고 가을이 더 짙어지는 시기가 다가오고 정국이랑 보내는 매 순간이 행복했던 여주는 아침부터 잠이 들 때까지 모든 시간을 같이 보내서 이주일 동안 일기를 쓰지 못하였다. 너무 행복해서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랬다.
"ㅎ,허억... ㅈ,정국아... 어,디 가는...거야...?"
"많이 힘들어? 조금만 쉬었다가 가자"
너무 무리하면 안 되니까. 아침부터 여주의 당담 간호사에게 허락을 맡은 정국이 여주를 병원에서 살짝 떨어진 공원으로 여주를 데리고 왔다. 여주는 그런 정국을 군말 없이 따를 뿐이었지.
정국의 생일이 지나고 며칠 후, 깁스를 완전히 풀게 된 정국은 이제 마음 편하게 두 팔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확실히 말하면 병원에서 퇴원해도 되었지만, 정국은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여주 곁에 있고 싶었다.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초록빛으로 가득했던 나뭇잎들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노란색인 해바라기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우와..."
날씨는 살짝 흐리지만, 해를 바라보고 있는 해바라기들에 여주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사실 정국이가 이런 장소를 찾아서 여주를 데리고 온 이유는 며칠 전부터 꽃이 그렇게 보고 싶다는 여주 때문이었다. 병원 주변에는 꽃이 핀 곳이 없어서 검색도 하고, 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분들까지 물어보면서 열심히 찾은 곳이 바로 여기였다.
"좋아?"
"응! 너무 좋아. 너무 이뻐"
"그래. 진짜 이쁘네"
네가. 라는 뒷말은 삼킨 정국이는 해바라기를 신나게 구경하고 있는 여주만을 바라보았다. 해를 따라서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정국은 여주만의 해바라기였다.
정국은 그런 여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고, 슬슬 점심시간이 다가와 다시 병원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병원으로 돌아가던 길, 정국이와 꼬옥 잡고 있던 손이 풀리면서 여주는 의식을 잃었다. 쓰러진 여주에 정국은 당황하지 않고 여주를 등에 업어서 병원으로 뛰었다. 여주의 병은 심장병이라서 가끔 이렇게 쓰러질 수 있다는 말을 당담 간호사에게 들었는데, 미리 알고 있던 덕분인지 침착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
하루... 24시간이라는 시간만이 남은 여주. 솔직히 말하면 24시간이 아닐 수도 있지만. 슬슬 마지막이 온다고 알려주는 지끈거리는 심장이 여주를 아프게만 한다. 활짝 웃고 있지만, 창백한 여주의 얼굴. 그런 여주를 지켜보는 정국이의 마음이 새까맣게 타들어 간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옆에서 손을 잡아주는 것밖에 없어서.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남은 수명을 모두 여주에게 주고 싶었다.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자신이 여주 대신 시한부이고 싶었다. 하지만 애꿎은 운명은 정국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느낀 여주는 정국이에게 안긴 채 떨리는 목소리로 정국에게 마지막이 될 말을 건넸다.
"정국아... 내가... 내 인생에, 한 부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느 시점으로 돌아갈 것 같아...?"
"글쎄...? 가장 후회되는 시점으로 가지 않을까?"
"네 말이... 맞아... 난, 너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갈 거야"
너랑 만난 게, 후회되거든... 여주는 정국이랑 처음 만났던 그날이 후회되었다. 만약에 그날 여주가 정국이에게 다가가지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고작 한달 밖에 안 되는 인연을 만들지만 않았더라면. 혼자 남을 정국이를 걱정하지 않았을 텐데. 정국이랑 같이 있을 시간이 차차 줄어들면서 여주는 자신이 이기적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신이 떠나고 혼자 남은 정국이가 힘들어할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로지 자신의 한 달만의 시간을 생각해서.

"일부러 정 떼려고 그렇게 모질게 말하는 거 다 알아. 그렇게 말해야 네 마음이 편해진다면 나한테 다 해. 날 미워해도 좋아"
"......... 너.. 진짜...,"
내가 어떻게 너를 미워해.... 이 바보야.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다시 삼킨 여주는 흐르려는 눈물을 꾹 참았다. 여기서 울어버리면 정말로 끝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정,국아...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
"잘 모르겠어"
"오늘은... 9월 23일 추,분이야. 밤이 길어..,지는 시기지..."
애석하게도 심장에 조임은 더 심해졌고, 안정적이었던 호흡이 가빠졌다. 손의 떨림까지 제어할 수 없어진 여주는 가깝지만 먼 정국의 뺨에 겨우 손을 올리고 정말로 마지막이 될 말을 꺼냈다.
"ㅈ,정국아... 내, 마지..막 소..원이 있,어... 들어,줄래...?"
".........." ((끄덕
"ㄴ,나랑... 보낸 모,든.. 순간..,들을... 잊어,줘..."
꼭, 행복..해,야 해... 사랑했어..., 정국아... 힘 없이 바닥으로 축 처지는 여주의 손에 정국은 여주의 이름만을 반복해 부르면서 울부짖었다. 그의 애절하고 아픈 울음소리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
그녀가 하나의 별이 되어 치르는 장례식 후, 여주가 있던 병실에서 영정사진을 품에 안고 조용히 흐느끼는 정국. 그에게 다가온 여주의 당담 간호사는 정국에게 여주의 일기장을 건네주었다.
"여주가 떠나기 하루 전에 이 일기장을 나한테 주더라고. 나중에 태워달라고"
"............"
"너한테는 절대로 주지 말라고 했는데, 안 주면 안 될 것 같아서"
정국이의 손에 쥐어진 여주의 일기장. 한 달 동안 여주랑 같이 있었는데도 정국은 그녀가 일기를 쓰는 걸 전혀 몰랐다. 떨리는 손으로 일기장을 넘긴 정국이는 그동안 여주가 썼던 글을 하나씩 꼼꼼하게 읽었다. 둘만의 모든 행복한 추억이 담겨져 있었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읽다가 마지막으로 남겨진 일기를 읽게 되는데.



여주의 마지막 편지를 읽은 정국은 일기를 품에 끌어안고서 병실에 달빛이 비춰질 때까지 눈물로 보냈다...
.....
2028년 9월 23일, 7년 후.

"여주야, 잘 있지? 난 네가 말한 대로 잘 지내고 있어. 근데 아직도 다른 사람은 못 만나겠더라. 아직 시간이 이른데, 벌써 해가 졌다? 네가 떠난 뒤로 오는 일곱 번째의 밤이 길어지는 시기야. 평소에도 네가 생각나지만, 9월 23일 네가 떠난 날, 밤이 길어지는 시기가 오면 네가 더더욱 생각나더라. 네가 내 곁에 있으면 환하게 비춰줬을 텐데... 보고 싶다... 여주야"
조금만 기다려... 내가 곧 너한테로 갈게.

"9월 23일 저녁 7시경. 한 묘지에서 20대 남자 숨진 채 발견돼..."
*기면증은 수면 발작(야간에 충분한 수면을 취해도 낮에 심하게 졸음), 탈력 발작(감정적으로 흥분할 때 힘이 빠지는 증상), 입수면기의 환각, 수면 마비(가위눌림) 등 네 가지의 특징적인 증상을 보이는 수면 장애의 일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