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Water

"아직 중학생인 너희는 사랑의 아픔을 잘 알지 못하겠지만, 각자 생각하는 사랑의 아픔을 시로 써보자."

"그럼 선생님에게는 아픈 사랑이 있었어요?"

"있었지."

꽃 피는 봄의 계절을 지나 막 초여름에 들어선 나의 인생, 그 수많은 페이지 속에 어찌 가슴 시린 사랑이 없었을 수 있겠나. 아무리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잉크로 선명하게 그려져 버린 그림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고스란히 남겨졌다.

그 순간들이 마치 어제 겪은 일처럼 또렷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같이 걸어온 천일의 시간을 뒤로하고 평생을 약속하며 사랑의 증표를 나눠 가진 수경이와 나는 오랜 기다림 후에 찾아온 아기가 건강하게 세상에 나와주기만을 바라며 하루하루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자기는 쑥쑥이 이름 뭐라고 지어주고 싶어?"

건강하게만 쑥쑥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 지워준 태명이었다. 그날 쑥쑥이의 성별이 여자아이라는 걸 알게 된 우리는 좋은 의미가 가득한 이름을 지워주려 신중하게 생각했다.

"내가 생각해 본 게 있는데, 보예 어때? 보람차고 예쁘게 자라라는 뜻인데."

"보예... 김보예. 뜻도 이쁘고 좋은 것 같아."

수경이의 불러온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쑥쑥아, 네 이름은 보예야. 마음에 들어?"

"ㅇ,어... 자기야, 쑥쑥이 마음에 들었나 봐. 발로 차네."

그날 난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보예에게 부끄럽지 않은 좋은 아빠가 되어야겠다고.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그 시기에 심리적 불안감이 생긴 수경이 걱정되었던 나는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그녀가 좋아하는 바다에 가려고 준비를 했었다.

기다림 끝에 찾아온 아이라서 조심 또 조심하느라 수경이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한 게 내 평생의 한이 되어 남았다.

바다로 간다는 말 한마디에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수경이의 모습에 자책감이 들었다. 그 무엇보다 나한테 가장 소중한 건 수경이었는데, 얼마나 소홀했으면 고작 바다를 보러 간다는 말에 선물이라도 받은 아이처럼 기뻐했을까.

"보예야, 우리 오늘 바다에 간다? 엄마는 바다를 정말로 좋아해.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면 가슴이 뻥 뚫리고 잔잔한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

"자기야, 나중에 보예 품에 안고서 같이 바다 자주 가자. 정말로 셋이서 같이 갈 생각만 해도 설렌다."

"그래, 여보. 우리 꼭 자주 가자."

바다로 가지고 갈 짐을 먼저 차에 실고 수경이를 데리고 나오는 게 나을 듯 싶어 집을 나서려는 때 붙잡힌 팔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자기야, 빨리 갔다 와."

"알았어. 이거 금방 두고 올게. 조금만 기다려 내 색시."

어디서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나한테 왔을까,
바다를 품은 듯한 눈으로 지긋이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홀려 가벼우면서도 가볍지 않은 입맞춤을 하였다. 그게 마지막 입맞춤일 줄 꿈에도 모르고.

나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경이를 생각하면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복도 가득히 들려오는 아이의 우는 소리를 따라가니 계단이었다. 하염없이 우는 아이의 옆에는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수경이가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한 걸음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행복한 웃음이 가득했던 나의 얼굴에는 검은 먹구름이 몰려왔다. 사시나무 떨듯이 떨리는 손으로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수경이를 조심스럽게 품에 감싸 안았다. 수경이를 감싸 안은 나의 손은 붉은 피로 물들어졌다. 정신을 붙잡고 피 묻은 손으로 119에 신고를 했다.

"ㅅ,수경..,아..."

"....ㅈ,자..기..,야...으윽..우,리..ㅂ,보..,예..."

자신은 괜찮으니, 보예만큼은 꼭 지켜주라는 눈빛을 보냈다.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겠지만, 자신보다 뱃속에 있는 우리의 아이, 보예를 먼저 걱정하는 그녀였다.

응급실에 실려 가는 촉박한 그 순간에 수경이는 마지막이 되어버린 유언을 남겼다.

"ㅅ,석..,진..오,빠... 나,의..대한...나,쁜..ㄱ,기..억은...윽...ㅎ,하아...다...잊,어..줘..."

"수,경아..."

"잊..,지..못..ㅎ,할...텐..,데...으윽...잊,어...달..,라고...ㅎ,해서...ㅁ,미안...해...흐윽..."

과잉기억 증후군, 한 번 보거나 겪은 일을 잊어버리지 않고 세세하게 모두 기억하는 증상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이 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난 그런 수경이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ㅅ,사..,랑..해...," ((또르륵

꼬옥 잡고 있었던 그녀와 나의 손이 떨어지면서 응급실의 빨간불이 들어왔다. 그 후, 나는 세상의 신이란 모든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어떠한 대가도 치를 테니, 부디 저 안에 있는 두 명을 구원해 달라고, 나의 전부를 앗아가지 말아 달라고. 하지만 그런 나의 간절한 바람은 욕심에 불가했었나 보다.

....

"그럼 그런 사랑을 하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뭐였어요?"

질문을 해오는 학생에 눈앞에 펼쳐졌던 일들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해주지 못한 게 후회돼네."

그렇게 빨리 내 곁에서 떠날 줄 알았더라면 한 번이라도 더 사랑한다고 말해줄 걸,

숨이 넘어가는 그 순간에도 사랑한다는 말을 내게 건네는 너에게, 나도 정말 많이 사랑한다고 하지 못해서 너무 후회가 돼.

"자자, 이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각자 열심히 써보도록."

.........

달칵,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가 세상 모르게 꿈나라에 빠진 아이의 이불을 덮어주었다.

"잘 자네. 우리 딸."

만약에 수경이를 떠나보냈던 그날, 나에게서 보예까지 데려갔더라면, 조금만 들춰내도 죽을 듯이 아픈 이 심장을 가지고 이 땅에 홀로 살아가진 못했겠지.

나가려던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 건 책상 위에 놓인 펼쳐진 일기장이었다.

".........." ((울컥

수경아, 우리 보예 정말 착하고 예쁘게 잘 컸네. 크면 클수록 너를 닮아가는 것 같아. 그곳에서 우리 보예 항상 지켜봐줘.

방에 들어오자마자 책상에 앉은 나는 하얀 종이에 시를 남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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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Past Water (지나간 물)이라고 지은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물은 답을 알고 있다> 책과 겨울왕국 2에서 물이 과거를 기억한다는 내용을 토대로 Past Water는 지나간 과거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라는 의미로 지어졌습니다.

[특별] Past Water

Past Wa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