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용 금지.

번외 3
:: 만취 유혹
"간지러워, 간지럽다고! 아 진짜!"
"너 내 거야. 진짜 내 거야, 김여주."
"그럼 내가 오빠 거지 누구 거야!"

"그렇게 말하니까 더 예쁘다."
장장 한 시간째 뽀뽀만 이어지고 있는 집 안. 여주는 여진이에게 아빠 좀 떼어달라며 사정했지만 제 아빠가 보통 사람도 아니고. 사실상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었기 때문에 그저 힘내라는 뜻의 주먹을 꼭 쥐고서 안방 문을 닫는 여진이다. 문도 닫혔고 애들도 상황 파악 마쳤겠다, 더 이상 방해 요소가 없어진 석진은 행동을 더 과감히 하기 시작했다.
"못 참겠어! 간지럽다니까!"
"오늘 늦게 들어올 거잖아.
충전 빵빵하게 해 놔야지."
석진이 이러는 이유, 바로 여주가 친구들과 술자리 약속이 잡혔기 때문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드디어 온 토요일인데 같이 있을 수 없다니. 이번 주말만큼은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딱 달라붙어 신혼의 힘을 보여주려 했던 석진이기에 여주를 쉽게 놔주지 않는 건 당연했다.
그럼에도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결국 그의 품에서 쏙 빠져나와 거울을 보며 옷 매무새를 정리하는 여주. 피부 화장도 다시 해야겠다면서 구시렁거리는 여주에 석진은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에 턱을 올리고서 허리를 감싼다.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헌팅 오면 죽빵 날리고."
"알겠어, 알겠어."
"1시 이전엔 나와서
전화해, 데리러 가게."
그리고 쪽. 마지막 뽀뽀까지 야무지게 마친 뒤 아직 자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싱긋 웃고는 나가는 여주. 텅 빈 집안에 왠지 모를 허탈함이 몰려오는 것 같은 기분에 괜시리 같이 찍은 사진만 들여다보는 석진이다.

째깍, 째깍.

"하하, 시발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벌써 마신 물만 5L째다. 몸에 수분이 부족하면 빨리 늙는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only 새벽 3시가 되어갈 때까지 연락이 끊기고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 간 큰 김여주 때문에. 현재 석진은 극도로 빡쳐있는 상태이다.
평소 욕은 절대로 하지 않는데도 몇 시간 전부터 시발 시발 잘만 하는 걸 보면 보통 화난 건 아니라는 거다. 화가 나면 뭐라도 먹어야 짜증이 풀리는데, 무작정 너무 먹었다간 살은 물론 건강까지 안 좋아질 수 있으니 물을 마시는 거였는데도 몇 시간에 걸쳐 5L나 마신 거면 그거대로 살이 찌지 않을까 싶은 석진의 상태.
"김여주··· 내일 해장은
기대하지도 마라, 진짜···."
네 속이 문드러지든 말든 그건 내 알 바 아니니까!!! 꽉 잡은 유리컵이 금이 갈 듯 말 듯하며 위태롭게 부들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현관 비번을 치는 듯한 삑삑 소리가 났고, 얼마나 술에 꼴았으면 계속해 틀리는 건지 보다 못한 석진이 문을 열었다. 그러자 헤실헤실 웃고 있는 자신의 아내···. 결국 폭발해버린 석진은 그대로 여주의 손목을 붙들고 거실로 데려왔다.
"오으, 프아! 오쁘아! 내가, 와써!"

"전화하라고 했지 누가 혼자
오래. 통금은 왜 안 지켜?"
"석찌나아, 우리 기여운
석, 끅, 지이니~"
내가 뽑뽀해주까? 인누 와~ 움뫄~ 하다하다 당당하게 반말까지 까버리고 양 볼을 잡아 입술을 붕어 모양으로 만든 뒤 별안간 뽀뽀를 하려는 여주에 석진은 기가 차고도 남았다. 난 빡쳐서 화병 나겠는데 지금 까부네?
그것도 이 야밤에, 아무리 대한민국 치안이 좋다지만 토요일 꼭두새벽의 명동 거리에서 택시도 안 타고 만취한 여자가 돌아다니면 위험한 일을 당하기에는 쉽지 않겠는가. 석진은 그럴 걸 대비해 새벽 1시 이전에 자신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던 것인데, 술 때문에 다 잊고 집으로 혼자 걸어온 게 화가 났던 것이다. 물론 많이 마시지 말라고 했던 것도 안 지키며 통금도 어긴 것도 있었지만.
"기분이~ 조은~ 데~
조은데이~ 쏘오주가 막~"
"정신차리고 내 말 들어.
왜 오빠 말도 안 듣고,"
"아! 뽑뽀해애, 주게따고 석찌나아!"
석진은 따끔하게 혼내려고 했지만 지금 여주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기에 뭐라도 하는 건 내일 하기로 하고 일단 얼른 씻고 재우는 게 답일 거라 생각했다. 여주를 질질 끌고 안방 화장실로 밀어넣고 나니 그제서야 조용해지는 그녀.

"하아···."
얼마 지나지 않아 술냄새가 배어 있는 옷가지들이 하나둘씩 조그맣게 열린 문틈 사이로 조금씩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씻을 정신은 있나 보네. 옷들을 세탁기로 넣기 위해 화장실 문쪽으로 다가가니 다시금 문이 살짝 열렸다.
"석찌나··· 나 졸려어···."
"그래도 씻고 자야지.
일단 양치라도 해."
"나 왜 치카치카해애?
뽑뽀하구 시퍼어~?"
오오 주님, 대체 이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요. 무교였던 석진은 제정신이 아닌 여주를 보며 머리가 띵해지는 걸 느껴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했다. 사실 스물여섯 살이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친구들과 죽도록 술만 퍼마실 때가 맞긴 했다. 그래서 이른 나이에 결혼한 것 때문에 하고 싶은 걸 못하면 억울하니 봐주려고 했는데, 이건 아니지.
다시 문이 닫히고 나니 쏴아아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 했다고 이렇게 힘든지. 침대에 털썩 걸터앉아 여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찰나, 갑자기 다시 화장실 문이 열리고 여주가 빼꼼 머리를 내밀고서 장난스런 표정으로 석진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같이 씻을래?

"······."
결국 핀트가 나가버린 석진. 빛의 속도로 화장실로 뛰어들어간다.

:: 뱀 꿈
한 달 후 태형이 집으로 찾아왔다. 갑지기 와서는 비장한 표정을 짓고서 별안간 여주의 배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해 석진은 어딜 보냐며 대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렸다. 이 미친놈이 지금 어딜 쳐다보는 거냐고.

"꿈을 꿨어."
"그럼 꿈을 꾸지 뭘 꾸겠냐···?"
"평범한 꿈이 아니라고!"
형수 요즘 몸 이상하다는 거 못 느꼈어? 갑자기 식욕이 엄청 오른다거나 아니면 떨어진다거나, 뭔가 묵직하다는 느낌이 들거나··· 그런 거 없었어? 너무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것 같은 태형에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리 심각한 거냐며 직설적으로 말하라고 여주가 일침을 쏘자 태형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집 한 채 만한 검은 뱀. 그 뱀이
형수를 돌돌 말고 있었어."
"그래서?"
"형수 표정이 편안해 보이긴 했는데···
뱀 자체는 사나웠단 말이야. 아 그래,
꼭 외부 위험한 것들한테서
형수를 지키려고 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거 얘기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석진은 태형의 이야기가 그저 허무맹랑하다고만 생각하고는 개꿈이니 잊으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인지 인터넷에 '뱀 꿈'을 검색해 보여주었다.

"훌륭한 유명세를 탈 미모.
건강한 인물이 태어날··· 야."
"태몽이라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여주도 합세해 절대 그럴 일 없다고 선을 그었다. 도련님, 우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뱀 태몽에 대해 설명하는 태형에 석진이 조금 더 조사를 해 태형의 앞에 내놓았다. 뱀 꿈이 꼭 임신만 있는 건 아니라고.
특히 검은 뱀 꿈이라면, 안전에 관한 거라고. 근친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힘듦이나 어려움이 생길 수 있는 꿈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본인도 방심할 수만은 없지만. 그러자 태형이 입을 꾹 닫았다. 하지만 아직도 태몽이라 생각하고 있는 건지 아랫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래도 임신일 수도
있다는 거잖아!"
"야 근친관계라잖아, 너 조심하라는
뜻 아니야? 꿈도 네가 꿨고."
석진의 말에 묘하게 설득된 태형은 또 곰곰이 생각하며 자신이 위험에 처할 확률을 계산해 보기 시작했다. 그에 석진은 그럴 줄 알았다면서 고개를 저을 뿐.

"··· 꿈에 괜히 형수가 나온 건
아닐 테니까 그쪽도 조심하던가."
"응~ 우린 잘 할 테니까 너나
조심하셔. 온 김에 밥 먹고 갈래?"
과연 뱀 꿈은 단순한 해프닝일까?

"속이 안 좋네, 왜 이러지."
"많이 안 좋으면 약
먹을래? 약국 안 멀잖아."
"아니야 언니, 심하진 않아서···
오늘은 점심 패스할래."
다음 날 출근한 여주는 그날따라 심하게 느껴지는 속쓰림과 졸림에 모두가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 휴게실에 담요를 가지고 갔다. 오후 업무가 엄청 많은데 자지 말고 조금이라도 해 두는 게 맞지 않을까 싶어 경로를 바꿔 옆에 있던 음료수 자판기에서 캔커피 하나를 샀다. 건강 때문에 한동안 커피를 끊고 있던 터라 더 갈증이 나 한 모금 크게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푸읍, 우욱···!"
훅 끼쳐오는 토기에 커피를 토하고 말았다. 급히 화장실에서 휴지를 가져와 흘린 커피를 닦고 나니 궁금함이 몰려왔다. 평소에 잘만 마시던 커피인데, 왜 갑자기 이러는 것일까? 몸이 반사적으로 어떤 이유에 의해 거부를 하는 것만 같았다.
혹시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가? 그러다 문득 태형이 말했던 뱀 꿈이 떠오른 여주는 자신이 큰 병이라도 걸린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게 아니면 그저 단순히 오랜 시간 커피를 끊고 살아서 몸이 적응 시간이 필요한 것일지도. 하지만 여주는 일단 업무가 끝나는 대로 석진과 병원에 가기로 결심했다.
"일단 밥부터 먹고 가자,
응? 걱정돼서 그래."
"먹으면 더할 것 같아서
그래··· 살짝 어지러워."

"그래도 안 돼. 도시락
챙겨왔으니까 먹어."
회사 업무가 모두 끝나고 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여주는 석진에게 자신이 아프다는 걸 얘기하려는 찰나 또 헛구역질이 입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그에 석진은 조금만 기다리라며 정차한 뒤 간단한 약과 도시락을 챙겨왔고, 도저히 못 먹겠지만 여주는 하는 수 없이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우욱··· 이거 냄새가 이상한데···?"
"즉석 도시락이라서 바로 나온
거라 이상할 리 없는데···."
석진의 말에도 여주는 고개를 도리질치며 도시락 뚜껑을 다시 닫았다. 아무래도 태형이 꿨던 그 뱀 꿈이 불길한 징조가 맞는 것 같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 상황이었지만 석진은 그래도 더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보자며 여주를 타일렀다.
그래도 임신은 절대 아니잖아, 매번 진짜 조심하면서 했고 우리한테 기억도 없고. 실수한 적 없는데 이게 안 좋은 징조면 어떻게 해? 여주는 부디 큰 병만 아니면 괜찮을 거라 했지만 그런 그녀의 말에 석진은 무언가가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한 달 전 그날, 여주가 술을 진탕 마시고 왔던··· 이성을 잃고서 했던··· 아아······.
"여보 표정이 왜 그래?"

"··· 잠깐 자기야 나 약국
좀 다시 들렀다 올게."
"어?"
그렇게 헐레벌떡 문을 열고 가 석진이 향한 곳은 바로 약국, 거기서 사 온 물건의 정체는 바로 임신 테스트기. 확실함을 위해 무려 네 개나 산 석진은 많은 임테기들을 여주의 앞에 내밀었다. 공용화장실 들어가서 해 보고 오라며.
"왜···? 혹시 실수한 적 있었어···?"
"아니, 그··· 일단
하고 와서 얘기하자."
"오빠, 아니 오빠
제대로 말 좀 해줘···!"
석진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여주를 차 밖으로 내보냈다. 그렇다, 그날 여주의 '같이 씻자'는 그 한 마디가 석진에겐 엄청났던 것이다. 그 뒤로는 핀트가 아예 끊겨 자신도 제 정신과 행동을 제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여주가 터덜터덜 차로 돌아왔다. 양 손에는 임테기들을 손에 꼭 쥐고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떻게 되었냐는 석진의 물음에 고개를 옆으로 돌려 바로 크게 욕을 뱉었다. 야 김석진 이 나쁜 놈아···!! 곧바로 엉엉 울어버리는 여주에 석진은 바로 임테기를 확인했다. 결과는 네 개 모두 선명하게 두 줄. 임신이 맞았다.

"여주야 일단 진정하고···
오히려 잘 된 일일 수도,"
"미쳤냐고! ㅠㅠㅠ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어! ㅠㅠㅠ"
"우리 결혼했잖아, 괜찮아.
애가 생긴 건 좋은,"
"아 그럼 오빠가 낳아! ㅠㅠㅠㅠㅠ"
할 말이 없어진 석진은 차라리 때리라며 두 팔을 벌리고 눈을 꼭 감았다. 그러니 정말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그의 복부를 정확히 가격하는 여주. 엉엉 울면서도 아픈 부위만 쏙쏙 골라 때리는 여주에 이젠 못 버티겠다 싶었던 석진은 힘겹게 여주의 팔을 붙잡고서 말을 이어나갔다.
"여주야··· 우리가 지금 여진이랑
현진이 말고도 또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여건이 되기도 하잖아··· 그렇다고
애를 지울 수도 없는
일이고, 응? 어쩔 수 없잖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저, 정 그러면 지울··· 까?"
석진의 말에 여주는 미쳤냐면서 다시 한번 복부를 가격했다. 배를 붙잡고서 아파 신음하다가도 마음을 연 것 같은 여주에 웃음을 짓는다. 정밀검사는 다음 날 산부인과에 들러 할 생각이었다.

"오빠가 진짜 잘 할게
여주야, 건강만 하자."

그렇게 소중한 아가와 함께 부릉부릉 달려 여진이와 현진이를 데리러 오기 위해 어린이집에 도착한 석진과 여주는 '동물농장' 프로그램에 푹 빠져있는 둘을 보고 살풋 웃음을 지었다. 어린이집 선생님의 말씀이 들려오자 바로 가방을 들고 뛰어오는 둘은 그들을 보자마자 TV 화면을 가리켰다.
"엄마 아빠, 저기도 멍멍이!"
"현진이두우, 멈머 키울래!"
여진이와 현진이는 전부터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며 조르고 또 조르던 중이었다. 사실 아이들의 부탁대로 강아지를 입양할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동생이 생겨버렸기 때문에!

"여진아 현진아, 아빠 말 잘 들어."
"응!"
"녜에!"
"아기가 생겨어. 현진이도
이제 오빠 아니면 형아 됐네?"
사랑을 독차지하던 막내의 자리를 뺏겨버린 그날의 현진이의 얼굴은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하는 수준이었고, 다신 잊지 못할 날이 될 것이다.
빨리 오려고 했지만 결국 늦어버린 이 대역죄인을 혼내주십쇼... 홀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