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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제국의 파멸 앞, 끝내 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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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제국의 파멸 앞, 끝내 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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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들이 풍요롭고, 나라 전체가 빛나는 듯하여 금의 제국이라 불리우던 아르템 제국이 존재했다. 아르템 제국은 영토는 물론, 황궁 마저 무지막지한 크기를 자랑했다. 특히 제국의 자랑인 황궁은 높고 커다란데다 아름다웠다. 전체적으로 따뜻한 느낌에 군데군데 칠해진 황금색, 뻥 뚫린 창문과 대비되는 강인하고 단단한 성벽, 마지막으로 황궁 꼭대기에 펄럭이는 제국의 깃발까지. 아름답다 못해 우아했다. 모든 제국은 크게 황제와 황후, 비, 여러 가문의 귀족들, 백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극 소수로 마력을 가진 자들이 있었으니. 그 이름하여 마법사. 바로 아르템 제국이 특별할 수 있던 이유다. 다른 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강력한 마법사가 아르템 제국에는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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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613년, 아르템 제국의 작은 태양이 한창 떠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름 마저 찬란한 황태자 민윤기. 황제의 하나뿐인 아들로 태어나 인물 좋고, 머리 좋고, 검술까지 능한 황태자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런 황태자 곁에 꽤 자주 동나이대의 여자애가 나타난다. 그저 그런 귀족 가문의 공녀인가 싶었을 테지만, 그 아이는 공녀들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다. 이름은 김여주. 마법사인 저 아비의 피를 이어받아 넘쳐나는 마력을 타고 난 마법사 집안의 딸이었다.





“황태자 전하!!”

“하… 또 너야?”

“우리 황궁 뒷 정원에 놀러 가요!”

“안 돼. 곧 황실 수업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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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마력 익히다 나온 거란 말이에요. 응? 같이 도망가요-.”

“… 그래, 가자.”





둘의 대화를 스친 이들은 의문을 품기도 한다. 아무리 마법사라고 한들, 다른 사람도 아닌 무려 황태자한테 저래도 되는 거냐고. 하지만 그건 둘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의 의문일 뿐이다. 모든 게 아름다운 아르템 제국이라지만, 애초에 황궁은 사람이 많이 죽어나가는 곳이었다. 황제의 목에 칼을 겨눈 사람, 독살을 시도한 사람 등 전부 반역이었다. 품위를 따지는 황궁에서 사람 하나 죽어나가는 건 아무것도 아닌 곳이 되버린지 오래, 차갑고 무섭고 피가 넘치던 곳에 의지할 거라곤 서로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기야 이해도 되는 것이 넓디 넓은 황궁에 어린 애라곤 황태자인 민윤기와 김여주 뿐이라.

김여주는 자주 마탑에서 마력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다가도 몰래 나와 민윤기의 방을 찾았다. 하루종일 그 어두컴컴한 마탑에서 주구장창 마력만 쓴다고 생각하면 누구든 숨이 턱턱 막혔을 거다. 김여주의 숨통은 민윤기였다. 김여주가 항상 자신의 방을 찾을 때, 민윤기는 겉으로 귀찮은 척, 싫은 척 다 하지만 사실 또 그렇진 않았다. 김여주가 방에 들어오는 순간 하던 걸 멈추는 민윤기였으니. 민윤기도 숨쉴 곳이 필요했던 거다. 황실 수업, 예의범절, 검술, 귀족 응대 등 숨 막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때마다 민윤기의 옆에는 김여주가 서있었다. 그래, 민윤기의 숨통도 김여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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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 하나 없던 황태자와 김여주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건 황태자의 혼기가 거의 찼을 때였다. 황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가장 중요한 건 황후를 맞는 것이다. 그냥 황후가 아닌 황제를 밀어줄 수 있을 법한 힘을 가진 황후를 말이다. 그걸 모를리 없던 귀족 가문에서는 매일 같이 황태자를 찾아오기 시작했고, 별 이유를 다 대면서 귀족 가문의 방문을 피하는 민윤기였다. 이유는 딱 한 가지. 황태자 본인이 황후고 뭐고 결혼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결혼이 이르다 생각했던 거지. 그런 민윤기가 자신을 찾아온 수많은 공녀 중, 만난 공녀가 딱 한 명 있었다. 바로 세인트 가문의 설아린 공녀. 민윤기가 설아린 공녀를 만난 이유는 세인트 가문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인트 가문은 많은 귀족가 중에서도 가장 높은 권위를 자랑한다. 그 힘이 어느 정도냐, 세인트 가문은 모든 귀족가를 등에 업고 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한 마디로 귀족가의 어떤 반발이든 막을 수 있는 것이 세인트 가문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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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를 이렇게 뵙네요. 저는 세인트 가문의 설아린이라고 합니다.”

“황궁에는 어쩐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으신가요? 제가 전하께 청혼을 하러 온 것이라는 걸요.”

“……”

“소문으로 익히 듣긴 했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찾아오는 공녀들을 만나주지 않으셨다고. 그런데 이렇게 만나주신 걸 보면 저는 뭔가 다르다는 거겠죠?”

“… 공녀의 집안을 무시하지 못하는 겁니다. 집안이 아니라면 설아린 공너께서도 다른 공녀들과 다를 게 없어요.”

“푸흡-, 꽤나 솔직하시네요. 뭐,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요. 이렇게 된 거 저도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저는 황후가 되고 싶습니다. 머지않아 전하께서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겠죠. 그
옆에 저를 앉히시면 전하께 든든한 뒷배가 생기는 겁니다. 저희 세인트 가문이 황태자 전하를 지켜드릴 테니까요.”

“후… 세인트 가문이 어떠한 가문인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설아린 공녀가 얼마나 큰 힘이 될지도 잘 알고 있고요. 하지만 황후의 자리는 제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습니다.”

“혹 그분이 벌써 있으신 건가요?”

“… 정 공녀께서 원하신다면 비의 자리는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 답을 피하시는 거 보니 걸리는 사람이 있으신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저도 생각할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아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세인트 가문의 설아린 공녀는 외모와 가문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어 다른 귀족가에서도 청혼을 자주 받았다. 설아린 공녀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배포가 너무 크다는 것. 설아린 공녀는 아르템 제국을 지금보다 더 큰 제국으로 만들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황비가 아닌 황후의 자리가 필요했다. 설아린 공녀는 세인트 가문으로 돌아가면서도 비의 자리에 대해 생각하긴 커녕 황태자가 신경쓰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설아린 공녀의 목표는 민윤기의 황후가 되는 것. 오직 그것 뿐이었고, 황후가 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설아린 공녀가 황궁을 나가고, 머리가 복잡해진 민윤기는 저절로 김여주를 찾았다. 혼자 남겨진 방에서 김여주 이름 석자를 몇 번이고 중얼거렸고, 이내 보고 싶다는 말까지 튀어나왔다. 그걸 의식하지 못한 건지 소파에 앉아 천장을 보고 한숨을 내쉬는 민윤기였다. 그때, 소란한 발소리와 함께 민윤기가 애타게 찾던 김여주가 나타났다. 보아하니 또 마탑에서 도망쳐온 듯 했고, 민윤기는 김여주를 숨겨주기 위해 손목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긴다. 그러다 몸이 소파에서 넘어가 소파 아래 바닥으로 같이 넘어진 둘. 그 덕에 민윤기가 바닥으로 깔렸고 그 위로 김여주가 눕혀진 이상한 자세가 취해졌다. 당황해 일어나려는 순간,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김여주가 민윤기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는다. 두근, 두근.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소리가 둘의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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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얼굴이 무척 빨갛구나.”

“… 전하께서 잘못 보신 거겠죠!”

“아까부터 지금까지 내가 널 얼마나 자세히 보고 있는데.”





저 둘에게 이런 감정은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 어울리지 않는다기엔 황태자와 김여주는 오랜 시간 이런 감정을 느꼈다. 둘이 어렸을 적부터 황궁에서 지내온 시간은 약 20년 가까이. 그 말은 둘이 붙어있던 시간이 약 20년이라는 말이다. 민윤기와 김여주 둘 다 진짜 가족보다 서로를 더 가족 같다 느꼈다. 외로움을 달래준 것도, 같이 울고 웃어준 것도, 가끔 싸워준 것도 다 서로였기에. 둘은 이제 서로 없이 생활이 되지 않는다. 매 순간 서로가 떠오르기 시작한 지금. 민윤기와 김여주만의 장소인 황궁 뒷 정원 앞, 둘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사랑해.”

“푸흡… 순서가 안 맞잖아요. 좋아한다는 말이 먼저 아닌가?”

“좋아하는 마음은 진작 넘은 것 같아 고백하는 거다. 김여주, 난 얼마 뒤면 황제의 자리에 올라. 황제가 되면 널 나만의 황후로 만들 것이다. 맹세해.”

“그게 진심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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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자리를 걸고 맹세하지. 나 민윤기의 황후는 너 뿐일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민윤기와 김여주가 이런 사이가 되는 것이. 생에 반절 이상을 함께해 아무도 모르는 걸 서로만 알고, 힘이 들 때는 서로에게 의지했으니. 오히려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황궁 뒷 정원에는 수많은 꽃들이 예쁘게 피어있었다. 분홍색,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가지각색의 꽃들이 피어있었지만 저 순간만큼은 둘의 모습이 더 예뻤다는 건 과언이 아니다. 황태자와 김여주의 뺨에 똑같이 자리한 분홍빛의 홍조와 잔뜩 휘어진 입꼬리. 둘 주변에 한가득 핀 꽃들이 이제는 둘의 마음 속에도 채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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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새로운 황제의 즉위식이 있고 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아르템 제국의 작은 태양에서 온전한 태양이 되어버린 민윤기를 찾아온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설아린 공녀. 시간이 충분히 지났음에도 설아린 공녀는 아직까지 황후가 되겠다는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민윤기는 이번에야 말로 설아린 공녀를 확실하게 쳐내기 위해 황궁에 들였고, 그 단 한 번의 선택은 모든 것을 비틀어지게 만들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공녀께서는 아직도 황후의 자리를 원하십니까?”

“저는 원하는 건 꼭 가져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황후가 되어야 겠어요.”

“설아린 공녀, 그날 공녀께서 제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냐 물으셨죠. 네,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황후로 맞고 싶은 건 아직도 변함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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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런 건 상관 없습니다. 황제의 자리란 원래 그런 법이니까요. 그 자리에 오른 이상, 꼭 사랑하는 사람만을 옆에 두실 순 없는 거,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나요?”

“……”

“곧 귀족들의 반발이 거세질 것입니다. 아마 아직 어린 황제 폐하의 즉위를 못마땅해하는 거겠죠. 저희 세인트 가문은 그런 반발 따위 순식간에 잠재울 수 있습니다. 또, 제가 황후의 자리에 있는 한 귀족가는 모두 폐하의 밑에 머리를 조아릴 테니… 황제께서 부디 넓게 보셨으면 합니다.”





설아린 공녀의 말은 민윤기를 흔들리게 했다. 김여주에 대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혼란스러웠을 뿐이다. 아르템 제국을 위한 선택으로는 설아린 공녀를 황후로 두는 게 백번 맞지만 이미 황태자의 이름을 걸고 김여주에게 맹세를 했던 이 현실이. 맹세가 깨지고 만약 이대로 설아린 공녀를 황후로 맞으면, 민윤기와 김여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최선은 김여주가 황후가 아닌 황비가 되는 것. 최악으로 민윤기는 김여주를 떠나보내야 할 수도 있다. 민윤기의 유일했던 숨통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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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가 터질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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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의 황궁은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는 곳이었다. 민윤기에게 그런 고민을 할 시간 조차 주지 않은 채, 모두를 몰아세우는 일이 터지고야 만다. 설아린 공녀가 황궁을 다녀갔던 그날 밤, 설아린 공녀의 몸에서 중독 반응이 일어났다는 것. 하나뿐인 공녀의 중독 사실에 세인트 가문에서는 황제를 몰아세웠다. 범인을 찾아 엄벌에 처하지 않으면 귀족가들과 함께 황궁에 들이닥치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황궁이 엉망이 될 게 뻔해 민윤기가 골머리를 앓은지도 벌써 삼일, 세인트 가문에서 찾아와 설아린 공녀를 독살하려던 자로 김여주를 꼽았다. 민윤기는 그들에게 처음으로 굳은 표정을 보였다. 김여주는 절대 누군가를 해할 사람이 아니었기에. 하지만 그들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중요한 건, 세인트 가문 사람들이 김여주가 범인이라는 증거를 보였다는 것이었다. 첫째, 민윤기와 김여주는 어릴 적부터 가까운 사이였다는 점. 둘째, 설아린 공녀의 몸에서 발견된 독은 마탑에서 자주 쓰이는 독초였다는 점. 마지막으로 민윤기와 설아린 공녀가 얘기하던 방 앞에 김여주가 한참을 서있었다는 점. 이 세가지를 증거로 들며 며칠을 편지와 황궁 방문으로 세인트 가문은 민윤기의 목을 조여왔다.





“폐하께서 마탑에는 어쩐 일ㄹ,”

“지금부터 너는 내가 묻는 말에 거짓 없이 똑바로 답해야 한다, 알겠지?”

“네? 아, 알겠어요.”

“며칠 전, 설아린 공녀에게 중독 반응이 나타났어. 공녀의 몸에서 발견된 독은 공교롭게도 마탑에서 쓰이는 앙투아라 했고, 그날, 나와 공녀가 대화를 나누던 방문 앞에 네가 한참을 서있었다는 증언까지 잇따르고 있다.”

“… 설마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세인트 가문에서 너를 범인으로 몰고 있어. 나는 네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앙투아는 마탑에서 자주 쓰이는 독초가 맞습니다. 하지만 마탑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고, 수입 약초들을 파는 상점에 가면 구할 수 있죠. 그리고 그 이유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설아린 공녀를 해하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맹세해요.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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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알아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또한,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면 나는 널 믿어줄 수 없고.”





처음으로 둘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다른 문제가 아닌 설아린 공녀의 일로 서로에게 금이 생겼다. 이 말은, 마냥 행복했던 둘만의 때는 끝이 났다는 것이다. 김여주가 감히 어떻게 말할 수 있었을까. 그날 방문 앞에 한참을 서서 민윤기와 설아린 공녀의 얘기를 전부 들어버렸다고. 말을 했으면 분명 민윤기 어깨에 짐만 얹는 꼴인데, 민윤기가 자신에게 미안하다 했을 게 뻔히 보이는데. 어쨌든 민윤기는 김여주를 믿지 못했고, 김여주는 자신을 믿어주지 못하는 민윤기에게 실망을 해버렸다. 다른 사람들 모두가 본인을 범인이라 지목해도 민윤기만은 김여주에게 그러면 안 되는 거다. 함께한 시간들이 3년, 5년도 아니고 무려 20년인데.

여기서 서로에게 실망만 하고 끝냈으면 좋으련만, 민윤기는 김여주를 황궁 지하에 있는 옥에 가둬버렸다. 물론 민윤기의 의지는 아니었다. 높은 권위의 세인트 가문이 끌어온 귀족가의 성에 못 이겨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 뿐이었다. 미치게 사랑하는 사람의 명에 옥으로 끌려가는, 심장에 칼이 꽂힘 사람이 바로 김여주였다. 김여주는 마탑에서부터 기사들의 손에 이끌려 지하로 갈 때도, 차가운 지하 바닥에 몸이 던져졌을 때도 초점 없는 눈에서 눈물만 떨어뜨렸다. 그러면서 김여주는 아무 말없이 지하에서 민윤기가 오기를 기다린다. 참 미련하게. 그래봤자 민윤기는 귀족가 사람들 하나 무서워 지하에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았다. 점점 말라가는 김여주의 몸과, 야윈 얼굴은 보기 불쌍할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불쌍했던 건 옥에 있는 동안 혹여 민윤기가 자신을 보러 올까 한시라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주일쯤, 철창의 문이 열리고, 김여주는 또 한 번 기사들의 손에 이끌렸다. 버둥댈 힘도 없어 몸을 축 늘인 채로 끌려간 김여주의 몸이 던져진 곳은 황궁의 밖이었다. 높고 단단한 황궁 성벽의 밖. 김여주는 황실 마법사 자격 박탈과 동시에 황궁에서 완전히 쫓겨난 신세가 된 거다. 더이상 황실의 마법사도, 황궁 사람도 아닌 마력을 가진 백성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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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가 황궁에서 쫓겨나 백성들 사이에 섞여 어떻게든 살아보려 애쓰고 있었을 때, 제국 전체가 떠들썩해지는 소식이 하나 들려온다. 아르템 제국의 태양, 황제 민윤기가 세인트 가문의 설아린 공녀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이 말이다. 그 말을 들은 후에야 김여주는 희망의 끈을 놓았다. 사실 김여주는 황궁 밖으로 쫓겨났다 해도 언젠가 민윤기가 본인을 찾을 거라는 희망이 있던 거다. 분명 민윤기가 자신에게 맹세한 것이 있었으니. 그 약속은 언제든 꼭 지키겠지 하는 마음이었을까? 아님, 버려졌다는 걸 믿을 수 없어 애써 부정하던 것이었을까.

김여주는 제국 길바닥 한 가운데에 주저앉아 정신을 놔버린 듯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웃어댔다. 분명 입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김여주의 눈에서는 어마어마한 양의 눈물이 쏟아져 양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김여주는 이제 잃을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버렸다. 그녀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민윤기가 자신을 버렸으니, 김여주는 그 원망과 분노에 못 이겨 애써 누르고 있던 마력을 조절하지 못했다. 김여주의 몸에서 흘러넘치는 마력에 제국의 땅이 지진이라도 나듯 흔들렸고, 김여주는 아르템 제국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왜냐고? 민윤기가 자신을 버릴 수밖에 없던 이유가 바로 이 아르템 제국이었으니까. 민윤기는 아르템 제국을 위해 김여주를 버렸다. 그 댓가로 김여주는 민윤기에게서 가장 소중한 아르템 제국을 없애버리로 했다. 저도 똑같이 한 번 당해보라고.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 그 심정을 민윤기도 똑같이 느꼈으면 해서. 김여주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건물이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태우고, 무너뜨렸다.





“ㅎ, 황제 폐하! 마법사가 폭주해 제국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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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을 수 없다. 그 애의 마력은 그 어떤 마법사보다 강해.”

“그럼 저희 아르템 제국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대로 황궁까지 무너진다면…! 그때는 정말 답이 없다는 걸 황제 폐하도 아시지 않습니까…”

“… 그 애는 분명 이리로 올 것이다. 내게 쌓인 것이 많겠지. 황궁 안 모든 사람들은 나의 뒤를 따른다. 성벽이 뚫리기 전에 내가 그 애를 막아설 테니.”





민윤기는 황궁 안에서 김여주의 마력을 느끼고 있었다. 민윤기와 김여주가 붙어다닌 시간만 약 20년. 김여주의 마력 쯤이야 쉽게 느낄 수 있었다. 황궁 밖 제국은 모든 게 망가졌을 것이다. 현재 민윤기에게 지킬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르템 제국의 자랑, 이 황궁 뿐이었다. 황궁을 지켜내기 위해 민윤기는 황궁 밖으로 나와 그 앞에서 김여주를 기다리며 제국의 모든 것이 불타는 것을 확인했다. 건물도, 사람도, 동식물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아르템 제국의 모든 것이 활활 불에 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길 속에서 걸어나오는 한 여자가 보였으니, 그게 바로 김여주였다. 민윤기가 본 김여주의 마지막 모습은 진실을 묻던 날 마탑에서 본 게 다였다. 현재 김여주의 모습은 그때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 그때에 비해 확실히 마른 몸과 얼굴, 맨발로 땅을 밟아 피가 질질 나는 발, 마력을 한꺼번에 쏟아내느라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양손과 팔목,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초점 없는 눈까지. 김여주 역시 아르템 제국을 파괴하는데 많은 걸 걸었던 거다.





“제국의 모든 것이 불에 타고 있어. 황궁 마저 타버리면 아르템 제국은 멸망한다. 제발, 황궁 만은 그냥 둬.”

“그렇게 제국을 생각하시는 분이… 대체 왜 제 생각은 조금도 안 하십니까. 황제께서 궁금해하시던 답을 드릴까요? 제가 그날 방문 앞에 서있던 건, 폐하가 설아린 공녀와 하시는 이야기를 다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혹여 저에게 미안해 하실까, 제가 이걸 들었다는 이유로 황제 폐하의 어깨가 더 무거워지실까 걱정했습니다. 바보 같이.”

“너…! 그걸…”

“또, 심증 하나로 차가운 지하에 저를 가둬놓고선 왜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으셨습니까? 저는요, 옥살이를 해도 폐하를 원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일주일간 털끝 하나 안 보이시더니… 절 그대로 황궁에서 내쫓으셨잖아요. 그리고서 들려오는 소식이 설아린 공녀와의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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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실 거 맹세는 왜 하셨습니까? 아니, 절 사랑하신 게 맞긴 한 겁니까…?”

“미안하다.”

“사과하지 마세요. 어차피 다 끝났습니다.”

“미안하고 또 미안해. 공녀와의 이야기를 듣게 한 것도, 그때 널 못 믿어준 것도, 지하에 가둔 것도, 얼굴 못 비춘 것도, 나의 황후는 너 뿐이라고 맹세한 것도.”

“하지 말라고!”

“너에 대한 마음은 전부 진심이었다. 널 사랑한다 했던 것도, 나 민윤기의 황후는 너 뿐이라고 했던 것도. 이 황궁이 소중해진 이유도 아마 너 때문이겠지. 어린 내게 황궁은 무섭고 잔인하기만 한 곳이었지만 너의 존재로 인해 황궁의 예쁜 구석을 알았다. 나의 제국이 이렇게 된 건, 전부 내가 무력하기 때문이다. 나의 무력함으로 인해 모든 게 이리 된 것이니 나한테서 죄를 묻고 황궁 만은 남겨라.”

“… 황궁을, 이 제국을 지키기 위해 제 앞에 무릎 꿇을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뭐?”

“제게 당신의 비굴함을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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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꿇어, 당장.”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던 김여주의 눈에서 민윤기을 보자마자 여러 감정들이 새어나왔다. 원망, 슬픔, 증오, 그리고 여전한 사랑. 김여주가 민윤기에게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으라고 한 건, 그렇게라도 민윤기가 무너지는 걸 보면 자신의 원망이, 슬픔이 다른 이에게 돌아갈까 싶어서 였다. 현재 아르템 제국이 불길로 인해 붉은 색으로 번져갈 때, 이제는 황제고 뭐고 밍윤기가 을, 김여주가 갑이다. 김여주는 손에 화염을 만들고서 민윤기가 무릎을 꿇길 기다렸다. 결국, 민윤기는 그렇게 지키고 싶었던 아르템 제국의 황궁 앞, 천천히 몸을 굽히더니 제국의 땅 위에 양쪽 무릎이 닿았다. 김여주는 그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고, 민윤기는 난생 처음 느낀 치욕스러움에 양 주먹을 꽉 쥐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결국 민윤기는 황궁을 빌미로 김여주의 앞에 무릎을 꿇었고, 김여주는 그제야 덜덜 떨리는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민윤기는 자신의 무력함 때문에 사랑했던 사람도 잃고, 제국도 잃은 셈이다.

이렇게 아르템 제국의 태양, 황제 민윤기는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저버렸다.















이 글은 WORTH IT COMPANY 크미임을 알려드립니다.

성하지맹 -  아래에서의 맹세.적군이  밑까지 쳐들어와서 항복하고 체결하는 맹약.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크미… 자격증 시험 때문에 이틀 만에 써서 많이 어수선하고, 이상하고, 부족함니다🥲 그래도 다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길! 오늘도 봐주셔서 감사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