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피소드 01
나는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빼곡히 쌓인 눈은 전부 녹아있었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침대 옆에 있는 사용인들을 부르는 종을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용인들이 세수대아를 들고 들어왔다. 내 시녀들과 언니의 시녀들이 함께 내 방으로 들어왔다. 분명 평소와 같은 풍경인데 옆에서 낯선 추위만 느껴져 이질적이었다.
'' 식사 준비해드릴까요? ''
'' ... 다 나가고 태현이 불러줘 ''
사용인들은 머뭇거리다가 모두 물러났다. 그리고 곧바로 내 호위이자 이 저택에서 언니 다음으로 내 모든 비밀을 아는 친구, 태현이가 들어왔다.

'' ...누나 ''
무뚝뚝하지만 항상 귀엽게 웃기만 한 그인데 오늘은 참 낯설었다. 그의 붉은 눈을 보며 나는 비틀비틀 그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품에 안겨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그의 옷자락을 잡고 넘어지는 바람에 태현이도 함께 철퍼덕 넘어졌다.
'' 흡... 흐흑.... ''
그리고 태현이를 껴안고 한참을 목놓아 울었다. 태현이는 그런 나를 토닥여주다가 아주 강하게 끌어안아주었다.
울지말라는 이야기도, 괜찮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고 그저 나를 안아주는 따스한 온기가 오히려 더 내게 큰 위로로 다가왔다.
'' ...... ''
조금 진정이 될때쯤 태현이는 아까 그 세수물을 다시 가지고 왔다. 작은 손수건까지 같이 가지고 왔는데 붉어진 눈을 하곤 손수건에 물을 적셔 내 눈을 닦아주었다.
아마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게 오기전 많이 운듯 했다.

'' 눈 부을거 같은데 ''
'' 괜찮아.... 괜찮아.... ''
태현이는 아무말 없이 내 눈에 붓기를 빼주고 사용인들을 불러 나를 준비시켰다.
나는 언니가 제일 좋아하는 옷을 입었다. 그 옷을 입고 한바퀴 돌때면 이쁘다고 귀엽다고 나를 꽉 안아줄 사람이 이제 없다는 사실에 또 한번 울렁거렸다.

01
금이 간 사이
페드아 신부님이 두 사람을 위한 기도문을 읊으면서 힐끗 관에 들어간 로미오와 언니를 바라보았다.
내내 페드아 신부님만 멍하니 보고있던 나 역시 페드아 신부님의 시선 끝에 다다른 두 사람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표정은 살아있는 것처럼 생기가 돌았고 무엇보다 너무나 행복해보였다. 그러나 그 둘과는 다르게 주변은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이미 언니는 그들에게 한 번 죽은 사람이어서 그런지 로미오의 이름을 부르며 대성통곡하는 몬태규와 다르게 우리 가문 중 그 누구도 목놓아 언니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 로미오!! 오 로미오!! 사랑스러운 내 아가 "
정말 눈물없이 볼 수 없는 관경이었다. 그들의 울부짖음은 내 언니의 죽음을 점점 실감나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인지 시끄러운 비명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입을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듣기 싫었다.
'' ...두 사람은 서로를 때어내려는 두 가문을 이겨 영원히 함께하기를 택했습니다. ''
나는 그날 페드아 신부님이 너무나 낯설었다. 내 언니의 결혼식에 두사람의 행복을 축하해주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결혼식날과는 사뭇 달랐다.
인자하게 웃으며 푹 파인 주름은 선으로 흔적만 남아있었다. 그 둘에게 진심으로 축복을 빌어주었던 따스한 목소리는 차가울 정도로 침착했다. 그래서 침착한 그의 목소리는 따갑게만 느껴졌다.
' ...이상해 '

그래서 두사람을 바라보던 나는 페드아 신부님을 보지 않고 내 언니를 죽인 로미오의 동생 최연준만 노려봤다. 며칠새 볼품없어보일 정도로 만진창이가 되어있었다. 그의 눈에선 눈물이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입술은 말라비틀어진지 오래였다.
그의 모습을 보고 나는 눈가가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역시 힘들어하니 내 남은 버팀목이 사라지는 기분과 내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이 현실이 온몸에 와닿았다.
그런 그의 입에도 '로미오'이 세글자가 불려졌다.
'' ...정유화 ''
내가 최연준을 노려보고 있는걸 본 어머니는 나를 작게 불렀다. 그 소리에 최연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봐라봤다. 곧 그와 눈이 마주치고 창백한 얼굴 속 유일하게 붉어진 눈이 나를 마주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그를 따갑게 노려봤다.

눈물에 쩔어있던 그의 모습과 마지막에 본 로미오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피범벅인 나의 언니 줄리엣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 흐흡... "
나는 다급히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입을 막던 손으로 귀를 막으며 자기최면을 걸었지만 그럼에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 머리는 계속 그 장면을 보여주었고 나는 그 기억에 굴복해버렸다.
'' 으웁! ''
결국 나는 혓구역질을 하며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태현이와 눈이 마주치고 더이상 참지못하는 이 감정에 성당밖으로 뛰쳐나갔다. 줄리엣과 로미오의 결혼식이 열렸던 장소이자 장례식이 열린 그 장소를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나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발길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지 못한채,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무시한채 달렸다. 치마를 밟고 넘어지면 치마를 찢어버리고 구두 굽이 떨어져 넘어질때면 구두를 벗어던졌다. 나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
" ...장례식은 끝났어 "
해가 진지 오래인 찬 밤공기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나에게 연준이가 다가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연준이를 바라보았지만 어두운 탓에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 가... 보고싶지 않아 "
" 다들 걱정할거야. 돌아가자 "
연준이는 내게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그 손을 뿌리쳤다. 거친숨을 내쉬는 그는 차가워진 손으로 나를 오랫동안 찾아다녔음을 알려주었다. 나를 걱정해준 연준이에게 눈물대신 살기어린 시선을 지어보냈다. 내 표정이 보였는지 연준이는 살짝 움찔했다.
" 너 꼴도보기 싫다고. 내가 너를 따라서 갈거 같아? 미쳤다고? "
탓할 사람이 필요했던 내가 쏜 화살이 맞은 곳은 연준이였다. 그렇기에 그에게 모진말을 내뱉었다. 내 화살을 맞은 연준이 역시 나에게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 ....말 가려서해 정유화. "
점점 우리 사이가 금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내겐 이리 쉽게 금이 간 사이보다 더 중요한 사이가 우선이었기에 연준이의 말에 나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 하- 너희 오빠가 우리 언니를 죽였어. "
" 뭐라고? "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러다 결국 몸에 힘이 빠졌는지 중심을 잃었다. 내가 넘어지려고 하자 연준이는 제 빨리 내가 넘어지지 않게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품에 안긴 꼴이 된 나는 있는 힘껏 연준이를 밀친 후 연준이의 멱살을 잡으며 울부짖었다.
" 이게 다 너희 오빠 때문이잖아!!!!!!! "
내 말에 발끈한 연준이는 내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 따지고 보면 너희 누나가 우리 형을 죽인거지. 누가 그런 정신나간 짓을 해? 누가... "
내게 버럭 화를 낸 연준이는 겨우 이성의 끈을 잡고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의 그 어떤 말로도 우리의 갈등은 끊어지지 않았겠지만 뒤이어 나온 그의 말은 우리 사이를 절정으로 이끌었다.
" 누가 그런 자살로 위장한 것처럼 하냐고. 아마 줄리엣 누나가 귀뜸이라도 해주었더라면, 아니 누나가 이 소식을 전해줬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겠지. "
" 지금 내 잘못이라는 거야? "
" 뭐, 내가 틀린말 했ㄴ... "
나는 연준이의 볼을 힘껏 내리쳤다. 그 반동에 연준이의 고개가 반쯤 돌아갔다. 연준이는 내가 때린 힘에 돌아간 고개를 다시 돌리지 않았다. 나는 조금 씩씩거리다가 결국 분에 못이겨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연준이는 두 눈에 가득 맺힌 눈물을 참으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 편지를 보지 않은 로미오 오빠의 잘못이라고 "
" 다신 너를 만날 일 없을거야. 아니 다신 만나고 싶지 않아. "
" 하? 그건 내가 할 소리 아닌가? 최연준. 난 너를 증오해. 너를 보면 내 언니를 죽인 로미오 오빠가 생각이나서 미치겠어. 제발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마 "

'' ... ''
내 말을 들은 연준이는 옷깃을 정리하더니 왔던 길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그는 내게 한마디의 말도 하지않았고 내게 다시 돌아오는 법도, 돌아보는 법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 사이가 금이 간 사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