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햇볕이 맑게 빛나는 오늘은 집사들과 함께 계곡으로 피서를 떠나는 날입니다.
"아가씨. 여기 진짜 물 맑지 않아요?"
"휴가다!"
지민이와 윤기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맑은 공기를 들이 마신다.
"남준아, 텐트 설치하자."
석진이 텐트를 들고 나오자 남준이 석진을 도와 텐트도구를 옮긴다.
"아가씨, 썬크림 바르셨어요?"
새하얀 원피스에 밀짚모자를 쓰고 차에서 내리자 태형이가 썬크림을 들고 나에게 다가온다.
"아니, 안 발랐는데."
태형이는 곧장 썬크림을 짜서 내 양볼과 이마, 턱에 썬크림을 찍어 바른다.
"아가씨, 썬크림은 꼭 챙겨 바르셔야해요. 아가씨 새하얀 피부는 뭘 해서라도 지켜야한다고요!"
태형이는 내 얼굴에 썬크림을 골고루 펴발라줬다. 나에게로 곧게 집중하고 있는 태형이의 눈동자가 왠지 의식된다.
"태형이는 발랐어?"
"저는 괜찮아요."
태형이는 항상 나를 먼저 챙긴다니까. 나는 태형이의 손에서 썬크림을 빼앗아 들었다.
"태형아. 이리 오세요."
"네?"
"이리 오라구요!"
태형이는 일단 내 말이니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선다. 나는 태형이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태형이의 얼굴에 선크림을 펴발라주기 시작했다. 태형은 내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뭔가를 떠올리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었다. 순간적으로 태형의 답답함을 유발했던 장면이 태형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상하다. 꿈인데 부드럽네.'
'꿈도 나날이 발전하네. 발전하는 대한민국!'
'그렇게 예쁘게 웃으면 반칙.'
태형은 뒤통수를 둔기로 얻어 맞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꿈은 아닌 것 같은데 태형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기에는 무리가 있는 꿈이었다.
"열은 안 나는데. 아니, 열은 조금 있나?"
"네?"
"태형이 너 지금 얼굴이 빨개."
"괜찮습니다. 아가씨. 전 괜찮습니다."
단순히 태형이의 열을 손으로 어림잡은 것 뿐인데 태형이는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 건지 서서히 뒷걸음질을 친다. 결국 태형은 바로 뒤에 놓여있던 양동이에 걸려서 넘어지고 만다.
"김태형, 괜찮아? 진짜 왜 이래?"
넘어진 태형이에게 다가가 태형이의 상태를 물어도 태형이는 넋을 놓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김태형, 진짜 어디 아프냐?"
지민도 태형이 이상했는지 태형을 살피기 위해 몸을 낮추었으나 태형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지민의 머리를 확 밀어내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래. 그냥 꿈일 거야. 그냥 내가 아가씨를 너무 좋아해서 꾸는 꿈 말이야.'
태형은 속으로 몇 번이고 자신이 떠올린 기억이 꿈일 것이라도 되뇌이고는 평점심을 회복했다.
.
.
"물놀이 시작이다!"
"끼야호!"
정국과 태형이 동시에 계곡에 몸을 던짐과 동시에 물놀이가 시작됐다.
"차가워."
둘의 입수로 인해 튀어오른 물을 닦아내며 서로에게 물장구를 치느라 바쁜 태형이와 정국이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민윤기. 왜 안 들어가고 그러고 있냐?"
윤기에게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윤기를 계곡쪽으로 조여들어오는 지민이와 남준이 덕분에 윤기는 뒤에 있던 나와 함게 그대로 물에 빠지고 말았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나는 숨이 막히는 걸 느끼며 물속에서 바둥대기 시작했다.
"살려줘!"
사방에 아무것도 없이 가라앉는 나를 누군가의 팔이 안아들었다. 동시에 내 몸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촉촉히 젖은 검은 며리결에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정국이의 모습이 보였다. 어쩌다보니 물에 흠뻑 젖은 채로 정국이에게 안겨 있는 모양이 되고 말았다. 지면 위였다면 정국이에게서 다급히 떨어졌을 텐데 물속에서는 발 닿을 곳이 없어 두려웠다. 나는 오히려 정국이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민윤기! 우리 아가씨 죽이려고 그러냐?"
"그건. 아가씨, 죄송합니다."
윤기도 쫓기는 입장이었는데 어쩐지 죄인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형은 물속에 있어야해!"
지민의 기합소리와 함께 윤기는 계곡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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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워."
물속의 온도가 낮았던 탓도 있지만 놀란 마음도 커서인지 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렸다. 정국이는 나의 허리를 잡아 계곡주변에 있는 바위로 나를 올려준다. 정국은 다급하게 내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내 상태를 살핀다.
"아가씨, 조금만 기다리세요."
정국이가 차안에서 자신의 겉옷을 가져와 내 몸 위에 덮어준다.
"많이 추우세요?"
"괜찮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정국이를 향해 애써 웃어보였지만 정국이는 나의 어깨를 감싸안는다.
"체온 떨어지면 안 되니까요."
정국이는 쑥스러운 모양인지 애써 시선을 다른 곳에 둔다. 정국이의 배려 덕분인지 마음이 가라앉는다.
.
.
석진이가 구운 고기가 노릇하게 익어가고 날도 제법 어둑해졌다. 지민이와 윤기는 불꽃을 피우기 바쁘고 정국이는 각종 술들과 음료를 준비한다.
"잘 먹겠습니다."
집사들은 아기새처럼 옹기종기 앉아 어미새 석진이가 가져다준 고기를 보며 두 손을 모으고 인사를 한다.
"아가씨, 아하세요! 아!"
"너희부터 먹어 배고플 텐데."
"아니에요. 저희는 아가씨가 먹는 거만 봐도 배가 불러요."
지민이가 나에게 고기쌈을 내밀며 순하게 웃는다. 나는 지민이가 주는 고기쌈을 받아먹었다. 집사들은 내가 고기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자, 우리 아가씨를 앞으로도 열심히 모시겠다는 뜻으로 건배해요! 건배!"
집사들은 잔에 맥주를 따르기 시작했다. 정국이는 집사들 사이로 내게 포도주스를 챙겨준다.
"아가씨는 포도주스 드세요."
"고마워."
"아가씨를 모시는 집사들로서 건배!"
집사들은 단숨에 잔에 담긴 술을 들이켰고 나는 집사들을 따라 포도주스를 꿀꺽 삼켰다. 집사들은 습관처럼 캬 소리를 냈고 나도 집사들을 따라 캬 소리를 냈다.
"아, 미치겠다. 포도주스가 써요? 아가씨?"
"응. 써!"
"진짜 우리 아가씨가 너무 귀여워서 전 녹아내려요."
윤기는 감격하며 설탕처럼 녹는 연기를 했다. 나는 포도주스의 매력에 빠져 정국이에게 포도주스를 달라고 했다. 정국이는 군말 없이 나에게 포도주스를 내어 줬다.
"여기 있습니다. 아가씨."
이 포도주스 왜 이렇게 맛있는 거지? 맛이 좀 씁쓸한 것 같기도 한데 입안에서 포도향이 향긋하게 맴돈다. 내가 포도주스 홀릭에 빠져있는 중에 석진이는 정국이가 들고 있는 페트병을 보고 표정이 굳는다.
"잠깐만 정국아. 너 그거 설마 아가씨한테 드린 거야?"
"응. 드렸는데 포도주스 아니야?"
"어쩐지 포도주가 빠졌다 했더니만. 그거 포도주야. 임마."
"뭐? 이게 포도주? 아가씨?"
"응? 포도주스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오 마이 갓."
"하늘이시여. 저에게 다시 우리 윤기를 들을 기회를 주시는 겁니까."
정국이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절망적인 표정을 짓는다. 반면에 윤기는 우리 윤기라는 말을 아가씨가 혹시 해줄지도 모를까하는 기대에 눈을 반짝인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정국이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마주본다. 뭐가 괜찮다는 거지? 당연히 난 괜찮은데.
"왜? 내가 아파보여?"
"아니요. 그게 아니라 아가씨가 드신게 포도주스가 아니라 포도주여서요."
"아닌데. 내가 먹은 건 포도주스야."
"나왔다. 포도주스 타령."
지민이는 흥미로운 눈길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민아. 포도주스라고!"
"맞아요. 포도주스. 제가 잘못했어요. 아가씨."
지민이는 순순히 나에게 꼬리를 내린다.
"정국아."
"네?"
"방금 전에 나 물에서 구해줘서 너무 고마워. 동화속에 나오는 왕자님 같았어. 우리 정국이!"
"제가 왕자님이면 아가씨는 공주님인 거에요?"
"어라. 그러면 내가 공주님이니까 정국이는 나랑 결혼해야겠네."
족보정리에 들어간 아가씨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정국이가 생글생글 눈웃음을 치며 나에게 새끼 손가락을 내민다.
"저랑 결혼하기로 약속하신 거에요. 아가씨?"
"알았어."
"나는 이 결혼 반대일세!"
"아가씨랑 결혼할 남자는 나야!"
내가 정국이랑 새끼 손가락을 걸려는 순간 결혼 반대를 외치는 윤기와 함께 정국이의 새끼손가락을 지민이가 사수한다.
"박지민! 그러다가 잔 깬다?"
"안 돼! 난 아가씨를 보낼 준비가 안 됐어."
석진의 우려처럼 지민이는 석진이 소중히 여기는 잔을 깨먹었고 석진 엄마에게 물리적인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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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후 집사들은 한창 뒷정리를 하느라 바쁘다. 나는 홀로 차 뒷편에 앉아 별구경을 하고 있다. 공기가 맑아서 그런지 별이 많이 보인다.
"아가씨, 별 구경하세요?"
"태형이다!"
"아가씨, 진짜 술 취하셨네."
"난 술도 안 먹었는데 왜 다들 취했다는 거야."
"아이구, 그러셨어요. 아가씨?"
"웅. 그랬어."
내가 졸린 두 눈을 비비며 태형을 올려다보자 태형이가 뭔가 말하기를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나를 마주본다.
"저기 아가씨 혹시요."
"웅."
"제가 아가씨한테 막 뭔가 한 적 있나요?"
"웅? 뭔데 그게?"
태형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니까 제가 아가씨한테 뽀뽀를 한다던가."
"아!"
내가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맞부딪치자 태형이가 나를 긴장된 얼굴을 지켜본다. 나는 태형이를 마주보며 베시시 미소를 지었다.
"이런 거?"
나는 태형이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태형이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태형이의 두 눈은 반사적으로 커다랗게 뜨였다.
"설마 아가씨."
"아니면 이건가?"
태형이가 둘 중 뭘 말하는 지 몰라서 다음 동작도 이어가려는데 어쩐지 졸립다. 태형이의 뺨까지 잡았는데 그대로 태형이의 품에 기대어 정신을 잃어버렸다.
"김태형. 진짜 어쩌려고 이러냐."
상대는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인데 너무나 크게 울리는 자신의 심장소리에 스스로도 놀랐다. 태형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잠든 아가씨를 애정이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다 아가씨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아가씨. 죄송해요."
아가씨를 바라보는 태형의 눈동자에 깊은 슬픔이 자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