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밴드부 플레이브 부원들이 병문안을 오고 얼마 되지 않아 무사히 퇴원했다. 다음 주 즘에 실밥 빼러 다시 병원에 가야 하긴 하지만.
무거운 것을 들면 안된다거나, 격하게 운동하는 것을 자제하라는 등의 주의사항을 듣고 퇴원했다. 내 무사 퇴원을 축하하자며 오늘은 연습 대신 동아리 회식을 하게 되었고 학교에서 멀지 않은 무한 리필 갈빗집에 왔다.
은호는 가방을 자리에 놓자마자 신난 강아지처럼 사이드 메뉴를 담으러 떠났고, 노아 형은 앞치마를 가지고 온다며 자리를 떠났다. 나는 음료수라도 떠와야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고기 구울 준비 하는 예준이 형에게 물었다.
"형, 뭐 마실래요? 가져올게요."
"아잇, 봉구 형 팔도 안 좋은데. 내가 떠올게요."
"어... 어?"
"형들 뭐 마셔요?"
옆에서 툭 튀어나온 하민이 모습에 흠칫 놀랐다. 다행인지 아닌지 하민이는 내 어색한 모습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 날 이상한 것을 깨달을 이후, 나는 퇴원하고 학교에 가자마자 점심 급식을 패스하고 온 반을 돌아다녔다. 1학년, 2학년, 3학년 교실을 모두 돌아다니며 학급 명단을 확인해봤지만, 유하민이라는 학생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하민이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볼 수 없다가 만난 곳은 밴드부 동아리실이었다. 종일 돌아다닌 것이 무색할 정도로 쉽게 만난 것이다.
수업 집중도 제대로 못 하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대충 어떤 상상을 했느냐면...
'이래서 눈치 빠른 사람은 싫다니까... 형은 이만 사라져 줘야겠어요.'
이런 악당 같은 대사를 하는 하민이에게 쓱싹 당하는 상상이라던가...
'살찌워놓고 잡아먹으려고 했는데 벌써 들켜버려서 안 되겠네요...'
사실 신분을 숨긴 뱀파이어가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접근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사실 난 오래전에 학교에서 죽었어요.'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학생이 한을 품고 저승에 가지 못해 우리 주위를 떠돌고 있는 건 아닐지까지... 거기다 길동무가 필요해서 맴도는 건 아닐까 하는 부가적 상상을 추가하여...
정말 별의별 상상을 다 해봤지만 결론은 당연히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결론은...
"떡볶이 가져왔는데 같이 먹을 사람!"
"...나."
...일단 먹고 생각할까? 점심을 거르고 교내를 뱅뱅 돌아다녀서 그런지, 나는 무지하게 배가 고팠다. 은호가 떡볶이와 튀김들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노아 형과 하민이가 음료수를 담은 컵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나타났다. 우리에게 컵을 나눠주곤 본인 것도 떠오겠다며 총총 뛰어가는 하민이의 뒷모습이 영락없이 나보다 동생같이 보였다. 키는 많이 컸지만.
나보다 먼저 고등학교에 들어온 동생이지. 까만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니, 머지않아 하민이는 콜라를 컵에 가득 담아 돌아왔다. 모두 자리에 앉으니, 예준이 형이 입꼬리를 올리며 씩 미소 짓곤 음료수 잔을 들어 올렸다.
"자, 그럼. 우리 플레이브의 기타리스트, 채봉구의 퇴원을 축하하며!"
""건배!!""
예준이 형의 건배사를 시작으로 콜라, 환타, 사이다 등등 알록달록한 음료수를 담은 컵들이 부딪쳤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랬지, 구워지는 고기 냄새에 식욕이 돌기 시작했다. 입원은 며칠밖에 하지 않았지만, 그 며칠 동안 먹은 싱거운 병원 밥 때문인지 속세에서 먹는 모든 음식이 더욱 맛있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점심까지 거른 상태이니, 은호가 한가득 퍼오는 사이드 메뉴나 숯불 위로 지글지글 구워지는 돼지갈비가 입에 들어오면 얼마나 맛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허기짐을 떡볶이로 가볍게 채우고 있으니 예준이 형이 잘 구워진 양념갈비를 먹기 좋게 잘라서 내 앞에 놓아주었다. 첫 고기를 내게 주다니, 역시 예준이 형 센스. 난 감동한 눈빛으로 잘 먹겠다 말하며 얼른 입 안에 고기를 집어넣었다.
"으뜨뜨뜨!"
"안 뺏어 먹으니까 천천히 먹어."
갓 구운 고기는 달콤 짭짤하니 맛있다. 냉면 하나 시킬까. 갈비엔 역시 냉면이지. 나는 옆에서 전투적으로 음식을 흡입하고 있는 은호를 팔꿈치로 툭 쳤다.
"야, 은호야. 물냉 시키면 네가 반 먹을래? 혼자 다 못 먹을 것 같다."
"으어? 그래."
은호는 한 접시 가득 퍼온 떡볶이와 튀김을 혼자서 반 이상 해치우고 있었다. 거기에 고기까지 야무지게 챱챱 가져와서 한 젓가락에 세 개씩 집어 먹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얘는 음악을 안 했다면 분명 먹방 크리에이터가 됐겠구나 싶었다.
참... 복스럽게 잘 먹네...
"냉면 더 시킬 사람?"
"난 괜찮아."
"하민아, 비냉 나눠 먹을래?"
"넴"
띵동-
"물냉 하나, 비냉 하나요."
나는 주먹을 쥐고 검지 손가락을 펴 손을 두어번 까딱이며 냉면을 주문했다. 나는 고기를 굽고 있는 예준이 형 옆에서 쌈을 싸서 주는 하민이를 슬쩍 쳐다봤다.
어느새인가 야무지게 고기를 리필해온 은호가 집게를 쥐고 고기를 굽고 있었다. 숯불 위로 고기가 빈틈없이 꽉꽉 올라와 있었다. 한창 성장기인 남고딩 다섯 명의 먹성을 맞추려면 아무래도 그럴 수 밖에.
어느정도 배고픔이 가시니 슬슬 다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금... 지금 뭐라도 물어보면 되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내 대각선 쪽에서 암냠냠 고기를 먹고 있는 하민이에게 태연한 척 물었다.
"하민아. 넌 집에 가서 뭐할 거야?"
"응? 집에서 넷X릭스 보려고요. 왜여? 무슨 일 있어요?"
"그냥. 퇴원한 김에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한 번 물어봤어."
"실밥 뽑을 때 까지는 기타는 잠시 쉬어요~ 요즘 내가 보는 넷X릭스 추천해줄까요?"
"음, 괜찮아. 입원했을 때 어지간한 건 다 봐서."
근데 태생이 새가슴이었던 지라 마음 깊은 곳 부터 꼬깃꼬깃 쪼그라들어서 떠보질 못하겠다. 내가 이런 초자연적 현상을 겪어본 적이 있어야지. 내가 겪어본 초자연적 현상이라곤 꼬꼬마 시절의 '엄마는 안 봐도 다 알아.' 라거나 물건 못 찾을 때 엄마한테 물어보면 '여기 있잖아 이놈아!' 정도 밖이 없었다고.
아, 더 꾸물거렸다가는 오늘은 물어볼 기회가 아예 없을 것 같았다. 어색하게 대화를 질질 끌면 다른 부원들도 이상하게 볼 게 뻔하니 나는 머릿속 버퍼링에 냅다 취소 버튼을 눌러버리고 질러버렸다.
"하민아, 근데 너 어디 살아? 맨날 하교하는 걸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
평소 물렁물렁 무해한 얼굴로 다니던 하민이는 내 말에 갑자기 입을 다물고 얼굴을 굳혔다. 그걸 보자마자 나는 하민이를 대놓고 떠본 것에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말 한마디 없고 표정도 없는 하민이가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공포도 이런 공포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굉장히 당연하다. 185cm의 큰 덩치를 가진 남자가 정색하고 있다. 거기다가 미지의 존재일 확률까지 있는 애가 저러고 있으니 공포영화 속 하이라이트를 맞닥뜨린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이런 경험 필요 없어...!
더더욱 공포였던 점은 하민이가 저런 모습으로 날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주변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평소 분위기 같았으면 '하민이 왜 그래~'이러며 장난을 걸었을 다른 사람들은 이쪽을 쳐다도 보지 않는걸 보니 상황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물냉 어디로 드릴까요?"
"아, 이쪽이요!"
"비냉은 여기 놔주세요!!"
정말 천만다행으로 이 호러 가득한 장르에서 나를 구원해 준 것은 아까 주문했던 냉면을 서빙해주는 직원이셨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른 부원들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빙된 냉면에 신나 하며 아까 하민이의 분위기를 일부로 모른척했다.
바닥부터 끌어올린 포커페이스와 생존본능이 시키는 연기력으로 최대한 태연한 척 냉면을 앞접시에 덜어 은호 앞에 놓아줬다. 하민이는 눈을 깜박이다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분위기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평소와 같이 베시시 웃는 모습으로 예준이 형과 함께 주문한 비냉을 비벼 덜어내기 시작했다.
나 방금 자연스러웠지? 공포영화 속 눈치 없이 경고 무시하고 앞서나가는 사람처럼 중간에 쓱싹 당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그렇지만 지금 하민이 굉장히 말랑말랑한데. 지금도 형들 사이에서 까르르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절로 경계심이 낮아질 수 밖에 없었다.
아냐 보이는 걸 다 믿지 말자 채봉구! 경계심 높아서 나쁠 건 없다고!
나는 그렇게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심정으로 남은 냉면과 고기를 싹싹 긁어먹었다. 컵에 있는 콜라까지 비운 우리는 무지하게 배부른 상태로 뷔페를 나오게 됐다.
"정산은 카톡에 보내놓을게~"
"넴~ 집 가자마자 돈 보낼게요~"
"아~ 잘 먹었다!"
"은호는 거기서 더 먹었으면 쫓겨났겠다."
평소처럼 일상 대화를 하면서 걷다가 우리는 각자 집에 가기 위해 골목길에서 헤어졌다. 나 역시 부원들에게 손 흔들고 잘 가라고 말하며 집으로 향했다. 하민이를 미행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오늘 본 하민이의 정색한 얼굴이 아른거려서 오늘은 포기하기로 했다.
"형"
"흐억...! 깜짝이야."
갑자기 옆에서 툭 튀어나온 하민이 때문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딱 하민이 생각을 하고 있던 때라 더더욱 찔렸다.
하민이는 아무 말 없이 눈을 끔벅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설마 여기서 날 쓱싹하려고...?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신체 반응을 무시하며 무해한 웃음을 지었다.
"왜 그래 하민아. 무슨 할 말 있어?"
"...."
내 말을 듣고도 하민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약간 뭔가 눈빛이 가라앉은 게, 착잡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빛이 들지 않아서 그런가 더더욱 처연해 보여서 나는 지금까지 경계하던 것도 잊고 하민이를 걱정스러운 낯으로 바라보았다.
"밤비 형. 나 누군지 알겠어요?"
"응?"
밤비? 밤비라면 디즈니 영화에 나오는 그 사슴 아닌가? 갑자기 그게 왜 나오는 거지? 게다가 내가 누군지 아냐니, 하민이가 대체 무슨 질문을 한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고 그게 표정으로 다 드러났나보다. 한참 날 쳐다보던 하민이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조심해서 가요."
나는 하민이의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못했고,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며 뒤돌아 돌아가는 하민이를 붙잡지도 못했다.
어째서인지.
그 눈빛이 마치 무언가를 잃고 상처 받은 어린아이인 것만 같아서.
도저히 잡을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