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영혼의 발자취

09. 이상현상, 다가오다. (3)

아스테룸에선 하늘을 ‘생명의 공간’이라 부른다.

하늘을 가득 채운 ‘별’에서 생명이 탄생하여 카엘룸으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지구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창작물이 존재한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동심으로 그려낸 이야기일 수도 있고,
청소년 아이가 감수성으로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으며,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고 싶어 하는 어른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런 이야기가 틀이 잡히고, 세상에 한 걸음을 딛는 순간.

이야기의 존재가 세상에 나와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순간.

지구에선 ‘별’이라 부르는 ‘큐브(Cube)’가 그 사랑에 화답하듯 분열하고, 아름다운 빛을 머금은 유성이 되어 카엘룸으로 떨어진다.

그렇게 카엘룸으로 떨어진 별은 하나의 인격체로써, 생명체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 * *

“흐엉엉엉엉…. 엄마아아아….”

소란스럽던 주변이 조용해지자 하민이는 내가 숨은 기둥 뒤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날 내려다봤다.
지금 상태를 설명하자면, 무서워서 툭 건들면 울어버릴 것 같을 정도로 혼란이라는 것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걸 아는지 그는 한 걸음 떨어진 상태에서 가만히 서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 저기, 형.”

하민이는 약간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내 귀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기둥 뒤에 숨어서 하민이가 호신용으로 쓰라며 쥐여준 총을 끌어안은 채, 쭈그려 앉아 벌벌 떨고 있고만 있었다.

‘아까 해치운 거 비슷한 게 나올지도 몰라요.’

근데 이렇게까지 많이 나온다는 말은 없었잖아!!

입술을 꾹 닫고 천천히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면을 쓴 수상한 인간 무리가 갑자기 나타나 우리들을 덮치려 들어서 전쟁터를 방불케 했었다.

뒤를 돌아본 지금은? 지하철 내부가 부서져 있었지만 우리 말고 다른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하민이도 외계인인 만큼, 그 녀석들도 외계인이겠지. 대체 무슨 목적으로 우리를 공격하는 걸까?

“아니, 절반은 형이 쓰러뜨려 놓고 왜 울고 그래여.”

게임센터에서 총게임을 해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이 총을 쏴서 적을 맞추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하민이가 깜짝 놀라 ‘아니, 형 왜 잘해?’라고, 물어볼 정도로 상당히 좋은 명중률을 자랑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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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적의 절반은 하민이의 발차기에, 절반은 내 총알에 큐브로 분열되어 흔적 없이 사라졌다.

“훌쩍…. 무서운 거랑 쏴 맞추는 건 다른 경우라구….”

근데 날 잡아 죽이겠다는 식으로 달려드는 그것들이 무서운 건 별개의 일이었다.

멀리서 보는 호랑이랑 눈앞에서 안전장치도 없이 보는 호랑이랑 느낌이 같겠냐고!
전문 사냥꾼이면 몰라도! 나 같은 소시민은 총 들고 있어도, 눈앞에 호랑이가 있으면 무섭다고!!
심지어 그 호랑이가 날 먹잇감으로 인식하고 달려드네? 이런데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해!

오히려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는 저 유하민이, 아니…. 유 빼고 하민이가 이상한 거다.

“무서우면 나한테 맡기고 숨어 있어도 된다니까….”
“형이 되어서 어떻게 동생한테만 맡기고 숨어있어! 그건 내 자존심이 허락 못 해!”

그 말에 벌떡 일어나서 당당하게 외쳤지만, 후들후들 떠는 다리는 차마 숨기지 못했다. 이건 내가 떨고 싶어서 떠는 게 아니다. 무릎 반사 같이 의도하지 않음에도 나타나는 신체 현상이다.
나, 나는 겁쟁이야 아니야! 진짜로!!
1초가 10분 같은 침묵이 잠깐 흐르고 나니, 하민이가 ‘풋’ 하면서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녀석이 맹하게 웃는 걸 보고 나니 긴장이 조금 풀려서 쾅쾅 뛰던 심장 소리가 천천히 작아지고 있었다.

“형 이렇게 귀여워서 어떡해요. 그냥 내가 형 하면 안 돼요?”
“어허, 까분다.”

요 녀석이 형한테 건방지게. 뾰로통한 표정으로 노크하듯 하민이의 왼쪽 어깨를 툭툭 밀어냈지만, 녀석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키득키득 웃고만 있다.
그러다가 이제서야 생각난 진실이 있었다. 내가 이상함을 느낀 시초가 됐던 그 문제가.

“…. 그러고 보니.”

이걸 물어볼 생각을 왜 못했지? 위화감을 느꼈던 시작점이었던 문제가 이제서야 떠올라서 머쓱할 지경이었다.

“너…. 정확히 몇 살이야?”
“제 나이요?”
“응. 나 1학년일 때도 형이라고 부르더니, 올해 들어온 은호한테도 형이라고 부르잖아.”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한 건지, 하민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늘 나 하민이 많이 놀라게 했다. 이거도 업적이라면 업적일까?
게임이었으면, ‘축하합니다! 업적 ‘깜냥이는 깜놀해’를 획득하셨습니다!’ 이런 게 뜨지 않았을까. 유하민 깜놀시키기 대회 1등 채봉구. 짝짝짝.

“그거까지 눈치챈 거예요? 우와…. 진짜 걸어뒀던 인지 마법을 다 깨버렸구나.”
“뭐? 우리한테 마법 걸었어? 그래서 다들 이상한 걸 못 느낀 거야?”
“단순히 위화감을 못 느끼게 해둔 것뿐이에요. 전에 고기 먹을 때, 나보고 하교하는 걸 제대로 본 적 없다고 물을 때부터 긴가민가했는데….”

어쩐지…. 집 가는 길에 갑자기 다가와서 스산하게 물어보더니.

내 전생 이름은 ‘밤비’라고 했었지. 예전에 자길 알아보겠냐며 묻던 처연한 모습이 같이 떠올랐다.
카엘룸이라는 곳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던가. 생명체의 모티브가 되는 창작물의 등장인물들 끼리 같은 차원에서 지낸다고 했고.
내 전생이랑 상당히 친한 사이로 보였는데…. 그럼, 나랑 하민이는 같은 차원에서 지내던 사람이었던 건가?
아까 하민이가 말했던 ‘밤비’가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창작물 제목이…. 뭐랬더라….

‘크로마 드리프트(Chroma Drift). SF 수사물 웹툰이었는데, 형은 거기서 형사로 등장했었죠.’

“전생의 나랑 아는 사이였던 걸 보니…. 나랑 같은 차원에 있었나 보네?”
“아뇨.”
“….”
“….”
“…. 설명 안 해줘?”
“장난 한번 해봤어요.”

하민이가 눈을 찡긋하며 혀를 내밀었다. 저 혓바닥 잡아당겨 볼까, 생각하다 그만두기로 했다. 당황하겠지?

“사실 나도 내가 언제 태어났는지 잘 몰라요. 그리고 형들이 몇 살이 되든 간에, 나한테는 영원히 형이에요. 다시 태어나도 변함없고.”
“…. 잠깐만, ‘형들’이라고?”
“응, 플레이브 멤버들, 예준이 형, 노아 형, 은호 형도 전부 전생에 카엘룸 출신이었어요. 그중에서 밤비 형과 같은 크로마 드리프트 출신은 은호 형이고.”
“헐, 뭐야. 그러면 우리 외계 밴드단이잖아.”

그나저나 은호랑 전생에서도 붙어 다녔다고? 인연이 이렇게 질길 수 있다니…. 와, 진짜 징글징글하네.

“맨날 서로 보고 징그럽다고 까면서도 없이 못 살았는데.”

…? 쟤 방금 내 생각 읽었나?

“예준이 형이랑 노아 형은 혼자 다른 차원에서 살았고, 밤비 형이랑 은호 형이 같은 차원에서 지냈었어요. 형들이 있던 차원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는데, 내가 형들을 카엘룸에서 꺼내 와서 아스테룸으로 데려다놨죠.”

나 잘했지. 라는 듯 허리에 양손을 올리며 당당하게 마주한 해피캣을 보니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덕분에 긴장이 상당히 풀려서 떨림 하나 없이 안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아까 그렇게 많이 덤빈 건, 출구가 머지않아서 그래요. 진짜 가까워. 학교 건물에서 정문 가는 거리보다 가까우니까, 우리 얼른 나가요.”
“진짜?”

하민이는 검지 손가락을 쭉 뻗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저 너머에 계단이 하나 보였다.
얼른 이 미로 같은 싸한 지하철에서 탈출해 바깥 공기를 맡고 싶었다. 여태 심각하게 고민하던 일의 진실도 알았으니 두 배로 후련하겠지.
상기된 기분에 들고 있던 호신용 총을 꼭 끌어안았다. 여기서 나가면, 얘랑도 이별인가.
하민이에게 돌려줘야 하니까.
그나저나, 이게 진짜 총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방아쇠를 당겨서 나간게 실탄이 아니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무슨 판타지 영화에서 봤던 마법탄환 같은게 나가던데, 덕분에 이걸 쏘면서도 총으로 타인을 쏜다는 심리적 충격과 공포감을 줄일 수 있었지.
일단 무게가 꽤 묵직하긴 한데….

“하민아, 이거 총 엄청 좋더라.”
“그래요?”
“응! 왠지 모르게 친숙한 것 같기도 하고, 손에 챡 감기네."

마치 오래도록 쓴 물건을 손에서 굴리는 느낌이었다. 실상은 여기 갇힌 동안 전투에서 한 두 번 써 보며 하민이를 지원해 본 게 다였지만.
근데 뭐랄까, 약간 싸움터에서 오래도록 합을 맞춘 전우와 같은 느낌이 든다. 너무 이 상황에 과몰입한 건가?

“봉구 형 가져요.”
“…진짜? 가져도 된다고?”
“원래 형 물건이었으니까요.”

정확하게는 ‘밤비’의 물건인 거겠지?
전생에 썼던 물건이라 익숙함을 느낀 건가. 그런데, 지금 나는 밤비가 아닌데….

“나가고 나서, 시간 될 때 우리 집에 놀러 올래요? 각 잡고 더 자세하게 설명해 줄게요.”
“진짜? 나야 좋지!”

하민이 집은 지구에 있을까? 외계에 있을까. 외계에 있다면 나도 우주선 타고 우주로 나갈 수 있는 건가? 헐, 우주비행사 되는 거야? 대박.

거기에 곧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워졌고, 그 걸음으로 하민이를 앞질러 계단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 형, 잠깐만.”

하지만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경계심을 너무 풀어버린 탓인지.

“밤비 형 피해!!”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민이가 재빠르게 뛰어와,

내 팔목을 붙들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상당히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대로 힘껏 저 너머로 나를 던져버려,

서 있던 곳에서 한 참 떨어진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구르고 나서야.

“!! 하민아!!”

그제야, 함정이 있었다는 걸 눈치챘으니까.

그걸 깨달은 순간, 눈앞에 붉은 빛이 터져 나와 모든 시야를 가렸다.

아주 새빨갛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