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영혼의 발자취

11. 이상현상, 다가오다. (5)

‘은호야. 사라질 날이 머지않은 것 같아.’

‘마지막까지 같이 있는 게 이 형이라니, 징글징글하네.’

‘누가 할 소리를.’

머릿속에 내 기억이 아닌 다른 것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처음 기억에서 눈을 뜬 곳은 꿈에서 보았던 그 사이버펑크 시티였다. 액자식 구성처럼 새로운 기억 속 나 역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한 작품 속에서 자신이 겪은 스토리였다. 이걸 기억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마치 생생한 소설책을 읽고 진하게 감명받은 듯한 느낌으로 ‘크로마 드리프트’에 나온 마라카야 중앙 수사국 소속 ‘채밤비 형사’로써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둘 중 누가 마지막까지 남게 될까.’

‘내가 마지막까지 남아서 형 챙겨줘야지. 나 아니면 누가 챙겨.’

‘웃기고 있네. 너 혼자 남겨두긴 내가 불안하니까, 내가 끝까지 남아서 널 돌봐줘야지.’

괜찮은 척하는 격려와 걱정의 말만 오갔다. 소름 돋을 정도로 조용한 이 도시에 남아있는 생명체는 우리 둘뿐이었다. 

카엘룸의 생명체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갈수록 점점 무너져내리고, 마지막엔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등장인물이었던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사라지게 될 바라면, 마지막까지 춤을 추며 노래할래. 쫌 낭만적이지 않아?’

‘또 폼 잡네, 이 형.’

‘너도 마지막까지 노래할 거면서.’

‘그건 그래요.’

그렇게 메카 시티를 돌아다니며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누구의 억압도 받지 않은 채, 소멸할 날만을 기다리던 그때, ‘누군가’가 내게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세요'

소멸할 날만을 기다리던 우리들에게 인사를 건네오며, 사라져가는 이 세상에서 나를 꺼내주었던 ‘개발자’와 또 다른 누군가.

‘안녕.’

…. 그 누군가가.

하민이라는 것이 떠오르게 되었다.

*

‘더 이상 영혼이 버티지 못해.’

타이타닉과 같은 카엘룸의 차원에서 탈출해, 아스테룸으로 정착했을 때는, 우리를 사랑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행복을 그리며 평화롭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우리를 적대시하는 무리의 공격으로, 하민이를 제외한 ‘플레이브’ 멤버들의 영혼에 금이 가기 전까지는.

깨져버린 영혼을 복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지금 당장, 깨져버린 영혼의 파편이 소멸하지 않게 하려면, 빠져나온 영혼의 파편을 새로 환생시켜야만 했다.

영혼이 온전해지려면, 환생 후 삶을 무사히 마무리 짓는 방법뿐이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찾아갈게요.’

‘어떤 모습이든, 어떤 사람이 되든 내가 꼭 찾아가서 내가 지켜줄게!! 그러니까…!’

…. 홀로 남겨질 아이가, 외쳤던 말이 각인처럼 기억에 새겨졌다.

*

눈앞이 연분홍빛이 되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색감이 나를 감싸 안았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작스레 몸이 가벼워졌다. 발끝이 바닥을 딛는 것이 아니라, 깃털이 바람 위를 춤추며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움직일 때마다 시야가 휙휙 바뀌어 혼란스러웠다.

지금 뻗는 나의 한 걸음은 허공을 뛰어넘는 재주와도 같았다.

‘뭐야, 엄청나게 빨라졌어…!’

만약 내가 달리기한다면, 세계 1위 기록을 단번에 갈아치우고도 남을 정도로 중력을 무시하는 다리의 움직임에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기분.

머리가 내 몸을 움직이고 있음에도 무언가 탈 것에 타서 조종하는 생경한 느낌에 지금 당장이라도 몸 상태를 확인해보고 싶어질 지경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게 더 급해!’

급하게 기둥 하나를 부수고 나니,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기둥 앞에 서 있었다. 힘도 전보다 더 세진 듯 휘두르는 소화기가 더 가볍게 느껴졌다.

분홍색 네온이 허공을 붓으로 칠해놓은 것처럼, 그림처럼 남았다. 시간이 지나 그것은 빠른 속도에서 태어난 바람이 선을 흩뜨려놓아 서서히 사라졌다.

빛이 나고, 내가 빛이 되어 달리는 기분은 너무나도 상쾌했다. 조금 전까지 절망해서 몸을 갈아 넣던 기억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채, 그 누구보다 가볍고 빠르게 몸을 놀렸다.

“마지막!!”

두 손으로 꽉 붙든 소화기는 이번 일격이 마지막이라는 듯, 내리치자마자 장렬히 박살이 나버리고 말았다. 소화기 내용물이 팍 터져 나와 눈을 꾹 감았다. 다행히 눈에 들어간다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살짝 눈을 떠보니, 부서져 내라는 기둥 건너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인 듯했다. 너무나도 친숙하고, 멀지 않은 그런 존재가.

‘잘했어. 이제 얼른 올라가. 시간 끌어서 좋은 것 없으니.’

귓가에 울리는 말에 퍼뜩 놀라 하민이를 바라보자, 어느새 함정이 부서졌는지, 묶인 줄이 전부 느슨해져서 풀린 하민이가 놀란 얼굴로 자기 몸을 살피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민아! 빨리 가자!”

냅다 찌그러진 소화기를 집어 던진 채 하민이에게 달려가 손을 잡아끌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어쩌나 약간 걱정했는데, 하민이는 내가 이끌어주는 대로 벌떡 일어나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거의 코앞이나 다름없던 계단을 헐레벌떡 올라가니, 어느새 해가 사라진 밤하늘이 우리들을 맞이했다.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하늘이다.

*

‘얼른 올라가. 바보야.’

“…. 밤비 형?”

‘멋있는 척하지 말고. 알았지?’

분명 밤비 형이었다.

새로운 여름을 여섯 번 맞이하는 동안. 한 번도 들을 수 없던 형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툭툭 놀리면서도 자신을 걱정하는 그 다정한 목소리가.

*

“헉…. 헉…. 우, 우리 살았나? 살아서 잘 나온 거 맞지?”

지하철역 바깥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한 일상의 한 모습이었지만, 지금만큼 이 모습이 반가운 적은 처음이었다.

“여기 지하도 이제 이상한 공간이 아닌 거지?”

혹시나 해 조심조심 다시 지하철 아래로 내려가니, 사람들이 북적이는 ‘평소의’ 지하철 모습이었다. 아까 이것저것 부수고 난장판을 쳐놓고 나왔는데,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듯 일상적인 지하철이 내 시야에 가득 담겼다.

“와, 와하하!! 하민아! 우리 살았다!”

“잠깐만, 형. 여기 바깥-”

냅다 달려가 하민이를 끌어안으며 머리를 마구 쓰다듬고 있으니, 옆에서 현실적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엄마. 저 형 이상해.”

“쉿, 저런 거 보는 거 아니야.”

아.

갑자기 몰려오는 쪽팔림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맞다. 여기 지금 길거리 한복판이었지.

심지어 아까 소화기가 터지면서 내용물이 옷에 잔뜩 튀어 꼬라지가 말이 아니었다. 이미 다 늦었지만 나는 팔로 몸을 감싸며 어떻게든 가려보려 노력하면서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주변 사람들이 다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 이런 건 내향인에게 고문이라고!

“…. 형. 일단 우리 집으로 가요.”

“응? 여기 근처에 너네 집이 있…. 뭐야?”

아까 새까만 옷을 입고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하얀 티와 가디건, 청바지 등 평범한 일상복을 입고 있는 하민이가 내 앞에 서 있었다.

하민이는 입고 있는 가디건을 벗으며 내게 다가왔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는 내 어깨 위로 자신의 가디건을 얹어주곤 따라오라는 듯 뒤로 물러서며 내게 손짓했다.

“우리 집 가자.”

고개를 끄덕이곤, 어깨 위로 얹어진 그의 가디건을 살짝 당겨 몸을 가렸다. 하민이가 내 걸음걸이에 맞춰주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가면서도 어렵지 않게 그의 뒤를 쫓아갈 수 있었다.

“여기는 골목길이잖아.”

머지않아 도착한 곳은 왠지 불량 학생들이 모여서 담배 피며 시시덕거릴 것 같은 어두운 골목길이었다. 가로등 한두 개가 어두운 이 공간을 간신히 비추고 있었다.

“가기 전에…. 형.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응? 아까 내가 무지하게 빨라진 거?”

“….”

하민이가 눈을 도르륵 굴리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하나. 어차피 숨길 것도 없고, 이야기를 새로 꾸며낼 자신도 없어서 내가 겪은 일들을 전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마라카야국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지하철에서 내게 ‘크로마 드리프트’의 이야기는 해주었지만, 배경이 되는 도시의 이름은 말해준 적 없기에, 이걸 알고 있는 나에게 놀란 것 같았다.

“형과 똑같이 생긴…. 마라카야국의 형사를 보았다고요.”

“응. 같이 너를 구하자고 내게 손을 내밀어줬어. 그런데 말이야….”

“….”

“그 사람…. 나랑 똑같은 얼굴이어서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왠지 ‘나’와 같은 사람인 것 같아.”

“!”

“이유를 설명하라면 못하겠어. 그냥, 그렇게 느껴져.”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무언가였기 때문에, 이유를 설명하라 하면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 마치 ‘너는 숨을 어떻게 쉬어? 어떻게 들이마시는 거야?’라고 물어오는 것에 답해주는 것처럼.

“네가 사라져가는 카엘룸의 마라카야국에서 ‘나’와 ‘은호’를 꺼내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는 것부터, 널 두고 환생해버린 것까지 기억해.”

“…. 혀, 형….”

“하민아. 우리 하민이. 막내.”

아주 단편적인 기억만 떠올랐지만, 단 한 가지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하민이를 홀로 남겨둔 채 훌쩍 떠나버렸고, 하민이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해왔다는 것을 말이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혀엉….”

“…. 혼자 둬서 미안해.”

살포시 다가가 그를 꼭 껴안아 주었다. 워낙에 키차이가 많이 나서, 내가 안아줬다기보다는 안긴 모양새가 됐지만.

천천히 등을 토닥여주니 하민이의 몸이 조금씩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훌쩍거리는 소리를 못 들은 척 하며 아기의 등을 두드려주듯 규칙적으로 하민이의 등을 토닥토닥 해줬다.

하민이가 진정하게 되는 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때였다.

하지만 나는 기다려 줄 수 있다.

그는 아마 내가 돌아오기를 더 오랫동안 기다렸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