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영혼의 발자취

12. PLAVE와 PLLI (1)

카엘룸에서 탄생한 밤비가 나와 동일 인물이냐. 솔직히 내 입장에서 말한다면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카엘룸의 밤비와 지구의 봉구는 영혼적으로는 같은 사람이다. 하나였던 영혼이 쪼개졌고, 그 쪼개진 다른 한 조각이 지구에 떨어져 환생한 게 나니까. 같은 사람인 건 맞지.

‘이성적으로는 알겠는데, 마음은 모르겠는 기분.’

머리로는 ‘밤비와 봉구는 같은 사람이다.’ 라는 걸 알고 이해까지 하고 있다. 하지만 밤비의 기억과 내가 동화된 것도 아니라서, 밤비가 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 머릿속 한쪽에 ‘밤비의 기억’이라는 보따리가 새로 들어왔고, 난 필요할 때 그 보따리에서 기억을 꺼내 보는 느낌이랄까? 한마디로 남의 기억을 보는 기분이다.

거기다가 밤비의 모든 기억을 알아낸 것도 아니기도 하고. 모든 기억을 떠올리면 동일 인물임을 완전히 받아들이게 되려나.

음. 난 지금 이누X샤라는 애니메이션의 여주인공 입장이랑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어라, 그럼 하민이가 이X야샤인가.

그건 아닌 듯. 쟤는 고양이니까.

“오구오구, 우리 하민이, 형아가 없어서 마니마니 슬펐쩌여?”

“조용히 해요. 부끄러우니까.”

아깐 나한테 기대면서 실컷 울더니, 지금은 부은 눈을 비비적거리며 나랑 시선도 안 맞추려고 한다. 짜식. 귀엽기는. 일부러 분위기 전환하려고 장난스레 그를 툭툭 치며 놀리니 삐지기 일보 직전에 짓는 특유의 개구리 표정이 되기 시작했다.

“자, 자. 너희 집 가자며. 어디 안내 한 번 해봐.”

눈을 찡긋하며 하민이의 어깨를 두들기니, 그제야 굳은 얼굴이 말랑하게 풀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다 말을 이었다.

“형, 통금 시간 있어요?”

“오늘 공연 보러 간다고 해서 조금 늦게 들어가도- 으악!! 맞다!! 공연!!”

그러다가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내가 여기 온 이유가, 다름 아닌 플레이브 동아리 모임에서 함께 보기로 한 공연이 목적이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떠올려버리고 만 것이다.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기분에 호들갑을 떨며 휴대폰을 꺼냈다. 반짝반짝한 휴대폰 화면을 보니, 그 난리를 겪고도 어디 하나 깨진 곳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재중 전화가…! 미쳤나봐아악!”

멤버들에게서 온 부재중이 무려 18개나 찍혀 있었고, 세 자릿수가 되는 초코톡 알림은 도저히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애꿎은 손가락만 갈팡질팡 어플 아이콘 위를 오갔다.

미쳤나 봐.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하지? 과부하가 되어버린 머리가 돌아가기를 포기해 파업을 선언하고 있으니, 하민이가 걱정하지 말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요. 자자, 일단 아까 말한 것처럼 우리 집으로 갈까요? 내가 재미있는 거 보여줄게.”

“재미있는 거…?”

“자 봐봐여. 이얍! 나와라, 어디로든 문!”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난스러운 말투로 주문을 외치고, 손을 뻗음과 동시에 허공에 균열이 생겼다. 금이 간 유리창처럼 균열이 커지다 어느 순간 확 갈라졌는데, 허공에 뚫려버린 구멍 너머는 보랏빛이 감도는 밤하늘로 이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짠, 우리 집으로 통하는 어디로든 문!”

“뭐, 뭐야. 저기 들어가면 우주 미아 되는 거 아니야?”

“전혀 아니에요. 자 일루와요!”

“잠깐만, 하민아. 나 마음의 준비가 좀 필요하아아아악! 잠까아안!!”

들어오라는 하민이의 손짓에도 영 몸이 움직이지 않아, 가만히 망설이고만 있었다. 그런 내가 답답한 건지, 얼른 같이 가고 싶었던 건지 냅다 내 손을 잡아끌며 갈라진 틈새로 쑥 들어가 버렸다.

손길에 이끌려 훅하고 가까워진 정체불명의 포탈에 눈을 꽉 감았다. 탁, 탁, 탁. 하고 강한 발걸음으로 세 네 걸음 정도 걸었음에도, 별일이 없으니 조심스레 꾹 감은 눈을 떴다.

“…. 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로등 한두 개만 켜진 어두운 골목길이었는데, 전혀 다른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시야가 편안할 정도의 밝기에 맞춰진 녹색의 방이었다. 벽에는 레트로한 포스터가 붙어있었고, 책상 위에는 컴퓨터를 포함해 무언가 많은 것들이 올려져 있었다. 복잡하게 쌓여있진 않고 나름 자신만의 규칙으로 널어놓은 모양이다.

책상 옆에는 하민이의 베이스가 은은하게 켜진 조명 아래 우두커니 세워져 있었다. 쟤도 참 오랜만에 보네, 반갑다.

잠깐만, 평범한 방 안의 광경이 눈에 들어오고 나서야 방금 내가 차원문 같은 걸 통해 순간이동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친! 쩐다! 어디로든 문이 실제로 있다니! 벅차오르는 호기심에 하민이를 붙잡고 눈을 빛내며 질문을 우다다다 쏟아냈다.

“뭐야 이거? 대박. 쩐다! 너 마법도 쓸 줄 알아? 막 도깨비처럼 문 열면 캐나다도 갈 수 있어? 완전 부럽다. 학교 올 때도 손짓 한 번 휘릭 하면 그냥 도착하는 거 아니야! 어디까지 이동돼? 이따가 나 집 갈 때도 이걸로 데려다주면 안 돼!?”

“잠깐만 진정 좀….”

“우오오오오오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그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그나저나, 방금 하민이가 ‘이 형 또 시작이네.’하는 표정을 지은 것 같았는데, 기분 탓이라고 생각해야지.

“난 멀리 까진 못가요. 노아 형 마법을 단순 카피한거에 불과해서요.”

“노아 형이 마법도 써?”

“정확하게는, 아스테룸의 노아 형이 썼어요. 봉구 형이 아까 쓴 능력처럼, 노아 형의 고유능력은 ‘마법’이거든요.”

“혹시 그 형 뒤통수 한 대만 치면 나처럼 기억 좀 찾고 각성할까?”

“…. 그러지 마세요.”

장난으로 한 말이었는데, 너 방금 3초 정도 솔깃했지. 수상해.

“내 능력은 정확히 뭐야? 대충 빛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것만 느꼈는데.”

“봉구 형 고유 능력은 ‘네온’과 ‘꽃’이에요.”

“네온이라면….”

아까 빛과 같은 속력으로 움직일 때의 느낌을 바탕으로, 몸의 흐름을 조종해보았다. 다시 해보려니 녹슨 체인을 돌리는 것처럼 잘 돌아가지 않았다.

삐그덕거리며 체내의 기운을 천천히 순환시키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분홍색 네온 빛이 허공에 그려지듯, 내 움직임을 따라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그래, 이거 잘만 쓰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어. 그건 대충 알겠는데, 꽃은 뭐야? 설마 나 몸에서 꽃피워?”

“몸에서 피우는 건 아니고….”

하민이가 설명해주는 것보단 직접 보는 게 빠를 거라며 주변을 둘러보다 탁상거울을 하나 들고 왔다.

“몸 안에 기운을 뺨으로 돌린다 생각하면서, 눈 한번 꾹 감았다가 뿅! 하고 떠볼래요?”

뭐가 나올진 모르겠지만 일단 그가 시키는 대로 해보았다. 아까 팔다리에 순환시킨 기운을 천천히 위로 올라오게 움직였다. 머리쯤에 올라와 그의 말대로 뺨 부근에 환한 기운을 터뜨린다 생각하며 꾹 감을 눈을 냅다 뜨는 순간,

“우왁! 이거 뭐야!”

얼굴 주변에서 무슨 게임 이펙트 터지는 소리가 나며 꽃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생각지도 못한 것에 엎드려 자다가 발작하듯 깨어난 고등학생처럼 몸을 퍼뜩 떨었다.

“…. 이건 무슨 능력이야?”

“애교 전용 능력이요.”

“???”

뭔데 그거.

머리에 물음표를 띄운 채 동그랗게 뜬 눈을 데구루룩 굴렸다. 하민이는 뭔가 날 보며 귀엽다는 듯이 큭큭 웃고 있었는데, 형으로써 자존심이 조금 흠집 난 기분이었다. 뭐야. 내가 형인데 왜 날 귀여워하는 건데.

살짝 뾰로통하게 그를 바라보자, 어디선가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방 너머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구 왔어요~?”

“뭐, 뭐야? 우리 말고 누가 있어?”

“응, 걱정하지 마요. 좋은 사람이니까.”

하민이는 곧 부드럽게 웃으며 들고 있던 거울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소리가 들린 문 너머로 다가가며 다정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에요. 플리!”

그러자 우당탕탕 소리가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냅다 하민이의 방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로 보이는 외형의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우리 와기 깜냥이 와쪄염!?”

뭐, 뭐지. 생각지도 못한 말투에 살짝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얼룩무늬 티셔츠를 입고 양 갈래 머리를 휘날리며 들어온 그 아이는 까르륵 소리치며, 냅다 하민이 앞에서 양팔을 높게 쭉 뻗었다. 하민이는 익숙하게 해맑은 미소를 짓곤 한번 가볍게 포옹해주고 떨어졌다.

“플리, 우리 집에 손님 왔어요.”

“응? 손님?”

“짜잔-”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이던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지금 본 것이 사실이 맞는지 의심하는 얼굴을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눈을 한 번 찌푸리다 눈을 비볐다.

어, 나 저 표정 알아. 곰돌이 푸가 종이를 보며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 짤이랑 똑같아.

“밤뵥이다아아아!!”

그러다가 냅다 입을 틀어막고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갑자기 또 기세가 바뀌어서 냅다 내 쪽으로 뛰어왔다. 안긴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날아가는 당첨복권을 보며 눈 뒤집힌 사람 같은 기세로 우다다 달려오니 흠칫 놀라서 뒷걸음질 칠 뻔했다.

“우…. 우아…. 진짜 밤비다…. 우리 뵥뵥이다….”

“…. 어, 아, 안녕? 너는 누구야?”

“나는 플리(PLLI)에요!”

아이는 날 보며 순수한 행복감에 젖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상당히 귀여워서,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않았다면 나도 모르게 꼭 껴안아 줄 뻔했다.

이상할 정도로 아이에 대한 호의적인 마음이 퐁퐁 샘솟기만 한, 이 이상한 현상을 해결해준 건 하민이였다.

“우리 플레이브(PLAVE)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태어난 아스테룸의 정령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우리들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태어난 존재라고?”

“응, 되게 사랑스럽다거나, 귀엽다거나 그런 생각 안 들어요? 플리, 뭐 마실래요? 내가 갖다줄게.”

“나는 우리 아기 깜고의 꾹꾹이 곱빼기로 만들어진 달콤한 사랑에 꽃사슴의 상냥한 손길로 건네주는 러브 앤 피스 한 잔…♡”

…. 거 참 특이하네….

그런데 어째서인지, 하민이 말대로 참 예뻐 보이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