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가 조금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썼습니다.
- 대체 무슨 글인지 작가도 모릅니다.
- 왜 썼는지 작가도 모릅니다.
- 클리셰 덩어리입니다.
- 가볍게 읽어주세요... 어차피 개연성 개나 준 엉망진창인 글입니다...
- 여주의 원래 이름이 나오는 부분은 일부러 비워뒀습니다. 독자님들 이름 넣어서 읽으시면 될듯...
-TRIGGER WARNING! 2010년대 초에 유행하던 인터넷 소설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폭력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TRIGGER WARNING! 유혈주의
엑스트라로 살아남는 법
:어느 날 소설 속 엑스트라가 되어버렸습니다.
W. 그쁨
"저기, 연주야,"
"응?"
"혹시이… 석진이랑 싸웠어?"
자고로 인터넷 소설 속 여주인공이란 갖가지 사기캐다운 면모를 뽐내는 게 기본이겠지만, 사람이 뭐가 다 완벽하기만 하면 재미없는 법인지라 작가들은 완벽한 여주인공에게 한두 가지의 흠을 부러 만들어내곤 한다. 예를 들면 돈이라던가, 또 다른 예로는 어… …인성? 아무튼, 이 소설의 여주인공인 김여주에게도 그 흠이라 함은 분명히 존재했는데,
"앗, 연희야 안녕!"
…그래, 보면 알다시피 김여주의 흠이라 함은 눈치가 좀 많이, 매우 많이 없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렇다. 이렇게 눈치는 발바닥에라도 붙어있으면 다행이겠구나 싶을 정도로 눈새인 탓에 저를 죽어라 노려보는 권연희에게도 인사를 건네는 김여주가 나와 김석진의 사이를 염려하는 질문을 던질 정도라면, 대체 다른 사람들에게는 우리 사이가 어떻게 보일는지 하는 걱정이었다. 부모님의 원수랑 싸웠다 화해해도 이 정도로 어색하지는 않겠다! 하는 말을 들을까 봐 걱정이라는 뜻이었다. 권연희에게 처참히 인사를 씹힌 김여주가 눈을 땡그랗게 뜨곤 날 쳐다보는 탓에 나는 눈동자를 도르륵, 도르륵, 굴리다 결국 마뜩잖은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안 싸웠어."
"…진짜?"
"진짜."
"……."
"……."
"……."
"…지금은 화해했어."
조금 어색할 뿐…, 뒷말은 꾹 삼키고 김여주의 눈을 슬금슬금 피했다. 큰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던 김여주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이유진과 다시 수다를 떨기 시작할 때쯤에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바로 할 수 있었다. 어쩐지 김여주가 '다 알고 있지만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 주겠다'라는 뉘앙스를 풀풀 풍기는 탓에 팔뚝에 소름이 쭈뼛 돋아서긴 했지만 말이다.
변명을 좀 해보자면, 결국 김여주에게 한 변명 아닌 변명은 거짓이 아니었다. 싸웠다기엔 김석진이 일방적으로 화를 낸 것뿐이고… 그게 싸운 게 아니냐고? …아닐걸? 아무튼, 싸움보단 말다툼에 가까울 정도였고, 결국 전정국과 박지민이 내가 차마 김석진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나 대신 전해준 덕에 김석진이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건넸고, 난 그에 괜찮다는 대답을 했으니 우리가 화해했다는 말도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그래서 내가…, 아, 미안."

"괜찮아."
"어 그래-,"
찬바람이 쌩쌩 부는 김석진의 대답에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인간관계라는 게 '친하다'와 '친하지 않다'의 이분법적인 관계만으로 다 정의될 수는 없듯이 '친한 친구'에서 '다퉜다 화해한 친구'가 된 우리 사이에 미묘한 어색함이 남아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말이었다. 하물며 엄마랑도 대판 싸우고 나면 이틀 내지 삼일을 데면데면하게 구는데, 친구 사이라고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보이지 않는 얇은 벽이 세워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옅게 한숨을 푹 내쉬는 내게 박지민이 스리슬쩍 다가왔다.

"뭐냐 방금 그 대화? 니네 내외해? 설마 아직도 김석진이랑 어색해?"
"……."
"와-, 진짜 징하다, 징 해."
"……."
"싸운 게 일주일 전인데 아직도오?!,"
젠장, 종알대는 박지민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죄다 맞는 말이라 무어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슬슬 화해 좀 하라느니, 나이가 몇 갠데 이런 걸로 어색해하느니 뭐니 하는 박지민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귀 아파. 모처럼 날 생각해 주는 친구의 말을 너무 매정하게 무시하는 게 아닌가 싶겠지만, 장담하는데, 박지민이 저런 말을 늘어놓는 이유는 분명 재밌어서다. 나랑 김석진이 어색하건 말건, 예전처럼 짱친을 하든 말든, 그냥 나 놀리기 바빠 내뱉는 말들이라니까? 저 봐라, 통제에서 벗어난 입꼬리가 바들바들 대는 거. 웃음 참는 게 빤히 보인다고.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점점 더 쌀쌀맞아지는데 거기다 대고 백번 들이대기도 좀 그렇다고…."
"그치? 어쩐지, 너네 전보다 훨씬 더 어색해졌다 싶더니,"
"그래, 내가 뻔뻔하긴 해도 철면피까지는 아니라고."
"음, 네 말도 이해가 가긴 하는데…, 내가 보기엔 김석진이 저러는 것도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란 말이지?"
"뭐 어떤 면에서?"

"요즘 권연희 행동만 떠올려봐도 답 나오지 않아?"
박지민이 말하는 행동이 어떤 것인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굳이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이자면, 아마도 김석진이 가장 우려하고 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겠다. 괴롭힘 말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무슨 어린이집에서 새싹 반 철수가 지렁이 잡아다 눈앞에 들이밀던 장면이 먼저 떠오르는데, 당연하게도 그런 괴롭힘과 권연희의 괴롭힘은 그 정도를 달리했다. 아니,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권연희의 괴롭힘은 무슨, 학교폭력으로 치부될법한 수준을 훨씬 넘어 '이거 범죄 아니야?!'하며 경악하게 만들 수준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따돌림이나 뒷담 정도가 아니었단 뜻이었다. 뭐, 그딴 게 통할 리도 없겠지만 말이다.
"처음에 OOO, 네 이름을 알고 있다 해서 일단 넘어가긴 했지만 그런 이유로 넘어가기엔 이미 권연희는 도를 넘었단 생각 안 들어?"
"그래서 뭐, 일단 처리하고 그 뒤에 생각하자고?"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그 말이지."
"그래, 그렇다 치고, 어떻게 처리할 건데? 뭐, 납치라도 하게?"
"…괜찮지 않아?"
"산에서 길 좀 잃었다고 헬기를 띄우던 너네를 믿은 내가 바보지…."
"아니-, 그때랑은 상황이 다르잖아!"
"시끄러워…. 그리고 말하기 전에 생각 좀 해라. 권연희도 어디 무슨 기업 딸이라며?"
그래, 애초에 현대에서는 범죄로 취급될법한 행동을 하고도 아무런 처벌이 없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권연희도 이 세계에서는 꽤 잘 사는 집안의 딸이었더랬다. 그러니까 사람을 산에서 밀어버리고도 멀쩡히 고개를 들고 학교에 다니고 있는 거겠지. 참, 이렇게 된 김에 그간 권연희가 나를 비롯한 이 무리에게 했던 괴롭힘을 몇 가지 읊어보자면, 작게는 체육복 다 찢어놓기(이거야 원체 흔한 클리셰 중 하나니까 그러려니 했다. 돈 많은 박지민이 다시 사주기도 했고….), 미쳤나? 소리가 나올 법한 일로는 횡단보도에서 날 밀친 일 정도가 있겠다. 아, 걱정은 하지 말기! 다행스럽게도 그대로 콘크리트에 얼굴을 처박아 차에 깔릴 뻔한 날 전정국이 잡아끌어 무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뒤에 왜 사람을 밀고 그러냐 따지던 우리의 물음에 대한 권연희의 대답을 떠올리면 이가 아득바득 갈리긴 했다.
'안 넘어졌잖아, 그럼 된 거 아냐?'
진짜 싹퉁바가지 하고는…, 암만 생각해도 현대에서 내가 알고 있던 사람 중에 저 정도로 싸가지를 밥 말아 처먹은 사람은 없었던 것 같은데, 대체 권연희는 날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한두 개가 아니기도 하고, 요즘 점점 더 심해지고 있기도 하고, 이러다 뭔 일 날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지."
"어…, 슬슬 나도 쟬 좀 어떻게 하긴 해야겠단 생각이 들긴 했는데, 마땅한 방법이 생각 나진 않는단 말이지."
"뭐 어때? 일단 좀 저지르고 보는 거지, 납치든 뭐든, 쟤가 너한테 한 짓이 있는데 그깟ㄱ…,"

"나도 찬성-,"
순식간에 몸이 뒤로 휘청이며 끌려갔다. 밀쳐진 박지민도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박지민과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촤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떨어졌다. 챙그랑-, 하는 듣기 싫은 소음을 내는 쇠 양동이 한 개도 함께 말이다. 발과 다리가 축축했다. 완전히 피하지 못해 물 몇 방울이 다리와 발에 튀어있었다. 꾸리꾸리한 냄새가 풍겼다. 음, 이번엔 걸레 빤 물에 썩은 우유를 섞은 건가? 나는 고개를 바싹 쳐들었다. 내 몸을 단단히 받치고 있는 전정국과, 그 위로, 창틀에서 유유히 멀어지는 여학생의 인영이 보였다. 두말할 것도 없이 권연희였다.

"머리 위에 물 붓는 것만 벌써 세 번짼데 이제 뭐, 네가 덤벼들 때도 되지 않았나,"
전정국이 무심하게 말했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 썩은내 풍기는 물이 튀긴 양말을 벗었다. 우리와 조금 격차를 벌린 채 앞서가고 있던 김여주와 이유진이 놀라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으, 냄새…. 고작 몇 방울에도 코가 썩을듯한 악취를 풍기는 물에 나는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며 양말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양말을 버린 게 나뿐만은 아니었는지 박지민도 인상을 찌푸리며 제 양말을 벗었다. 맨발을 슬리퍼에 끼워 넣은 나는 가방에 여분의 스타킹이 남아있는지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뭐…, 아직 목숨이 간당간당한 적도 없었고, 그렇게 위험한 일도 없었으니까, 지금부터 천천히 생각해 보면 되지."
"야, 야, 김석진이 저런 반응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새 횡단보도에서 머리 깨질 뻔한 건 네 기억에서 없어졌나 보다? 너 그때 전정국 아니었으면 진짜 머리가 깨지던 차에 치이던 김석진 속이 터지던 했을걸,"
"차도 놀라서 멈춰 섰으니까 치일 일은 없었을 거 아냐…, …김석진 속은 왜 터지는데."

"…몰라서 묻냐?"
"아오, 안 죽었으면 됐지!"
어느새 내 옆에 다가선 김여주와 이유진이 또 호들갑을 떨어대기 시작했다. 고작 물 몇 방울 튄 것치곤 과할 정도의 리액션이긴 했지만, 그 고작 물 몇 방울에서부터 시작된 악취가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박지민과 나란히 수돗가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거리를 가는 내내 박지민은 또 잔소리를 퍼부어댔고, 그 잔소리는 오롯이 내 몫이 되었지만 말이다.
"사고 안 난건 다행이지만, 네가 자꾸 그런 식으로 가볍게 넘기니까 김석진은 더 화가 난 거 아냐,"
"…횡단보도에서 그 일 있고 난 뒤부터 김석진이 더 쌀쌀맞아졌긴 했는데…."
"왜겠냐?"
"설마, 그거 그냥 그렇게 넘긴 것도 내가 뭐 죽는 걸 가볍게 어쩌고…, 그렇게 여겨서 그랬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걸 이제 알아챈 너도 너다 진짜…."
"환장하겠네…, 아 몰라, 오해는 뭐, 지금부터 풀면 되지…."
이제 권연희도 그냥 놔두고 볼 수준은 넘어선 것 같으니까… 하는 내 중얼거림에 박지민이 감격에 겨운듯한 얼굴을 했다. 바로 그거라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통에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던 물이 사방에 튀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 당장 가서 따지ㄴ…,"
"그건 아니지, 지금부터 뭐 하나 걸리기만 해봐라 하는 심정으로 기다릴 거야, 일단은. 큰 거 하나 걸리면 그때…."
"…방금까지 내 말은 뭘로 들었냐고…."
박지민의 눈꼬리가 추욱 쳐지든 말든, 내 생각은 그랬다. 할 거면 확실하게. 권연희가 대체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날 죽이려 드는 것부터가 장난이 아닌 걸로 봐서는 가볍게 치부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더 꼼꼼하게, 확실하게 다가가자. 그렇게 생각했더랬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깨부수게 된 날은, 그날로부터 고작 이틀이란 시간이 흐른 뒤의 이야기였다.
📘 📗 📕
하루하루가 비슷비슷한 고딩들의 학교생활을 하나부터 열까지 반복해서 듣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앞서 말한 이틀의 이야기는 과감하게 스킵하도록 하겠다. 혹시나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짧게만 이야기하자면, 여전히 B…, 남주들의 인기는 엄청났고, 여전히 김여주는 눈치가 없고, 나는 여전히 과도한 관심이 부담스러웠다는 것 정도만 이야기하겠다. 더 궁금하다면 차라리 인터넷에 '인터넷 소설'을 검색해서 유명한 것부터 차례대로 읽도록 하자. 장담컨대 내가 보낸 이틀보다 그 소설이 더 재밌을 거다.
물론 그 재미없는 이틀 동안 나를 향한 권연희의 유치한 괴롭힘은 계속됐다. 근데 그 일련의 사건들이 죄다 자잘한 것들이라, 생각보다 짜증이 난 상태였단 말이지. 그 이유라 함은, 내가 세운 계획이랄 것도 없는 계획이 그저 '범죄'의 축에 들어갈법한 권연희의 행동들을 증거로 모으고 모아 박지민의 도움을 받아 권연희를 처리하는, 뭐 그런 계획이었단 말이다. 일단 증거를 모아둬야 비상시에 권연희를 감옥에 처넣든 말든 하지. 권연희가 아무리 잘나가는 기업의 자제라 한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결국 김여주와 남주 4명이었고, 남주 4명의 배경에 비하면 권연희의 배경은 보잘것없는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남주들을 뛰어넘기엔 역부족인, 그런 상황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증거를 모으려고 하니,
"아, 미안, 실수야-,"
"……."
"앗! 이번에도 실수!"
하는 짓거리가 고작 머리에 지우개 똥 던지기밖에 없으니, 뭐, 증거를 모으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것이다. 유치하기 짝이 없어서는…. 아무튼 그래, 이틀이란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다.
3일째가 되고 나서야, 나는 권연희를 마주하고 '대화'라는 걸 해봐야겠단 마음을 먹었다. 그 이유라 함은 간단하다면 간단한 이유였고, 심각하다면 심각한 이유였다. 그러니까 이 일의 시작은, 모두 예상했듯 권연희의 얼빠진 행동에서부터 비롯되긴 했다. 여태 그가 벌여왔던 크고 작은 일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다른 점이라곤 딱 하나뿐이었는데,
"…! 김여주!!"
권연희가 노린 사람이 내가 아닌 김여주였다는 것뿐이었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김여주의 무릎이 꺾이고 그 몸이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바닥으로 떨어진 화분의 조각들이 챙그랑 하는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났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화분이 저 알아서 창밖으로 몸을 내던졌을 리는 없으니 분명 화분을 떨어트린 사람이 있을 것이라 그랬다.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생각했는데, 내가 창가에 턱을 괸 채 이쪽을 내려다보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데까지 억겁의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느렸다. 느릿느릿. 내 옆을 다급하게 스쳐 지나가는 박지민도, 내가 위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리는 속도도, 모든 것이. 권연희와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 말이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새카만 머리카락을 바람에 흩날리며 우아한 자태로 이쪽을 내려다보는 권연희와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옆에는 화분이 놓여있었다.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 난 채 나뒹구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보란 듯이 제 옆에 여분의 화분 두 개를 두곤 이쪽을 내려다보는 권연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사람을 다치게 하고도 일말의 죄책감도 가지지 않은 눈빛이 나와 마주했다. 아, 뭐랄까. 내 목숨이 간당간당할 때도 이런 기분은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지. 나는 권연희를 쳐다보던 시선을 내려 바닥으로 쓰러진 김여주를 보았다. 붉은 피가 김여주의 턱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뚝, 뚝. 바닥에 수많은 원이 그려진다. 김태형이 김여주를 안아들었다. 곱게 감겨있는 김여주의 눈이 뜨이질 않았다. 김여주를 안아들곤 다급하게 어디론가 뛰어가는 김태형의 뒷모습을 보다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얀 커튼만이 나풀거리는 빈 교실엔 화분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을 뿐이었다.
"…아…,"
화가 난 건가? 글쎄, 잘 모르겠다. 화가 났다면 누구에게? 김여주를 다치게 한 권연희에게? 어째서? 김여주는 그냥…, 소설 속 주인공 아닌가?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여주는 내게 그저…, 귀찮은 소설 속 주인공에 불과하지 않았나? 아니었나? 그게 아니었던 걸까?
박지민이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야, 괜찮아? 하며 묻는 그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것처럼 선명하지 못했다. 초록색과 흰색의 블럭들이 교차로 놓인 바닥에 떨어진 이질적인 짙은 얼룩들을 내려다보다 나는 걸음을 옮겼다.
"야 -, 아니, 김연주! 어디 가!"
어, 그러니까, 그 당시 내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권연희를 만나봐야겠어."
📘 📗 📕
내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지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간에 나는 은하별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라는 사실과, 학생의 의무를 다 하기 위해 수업 시작종이 울림과 동시에 권연희에게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는 점이었다. 뭐, 그게 아니었더래도 그 짧은 사이에 조퇴까지 하곤 학교에서 그대로 도망 쳐버린 권연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했겠지만 말이다.
권연희와의 일을 마무리 짓는 것보단 친구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나는 학교가 끝남과 동시에 박지민과 전정국, 두 사람과 함께 김여주가 입원한 병원으로 향했다. 미리 와 있었던 김석진이 창백한 얼굴로 병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여주는?"
"아까 수술 끝났고 지금은 자. 김태형이 옆에서 지키고 있으니까 별일은 없을 거야."
"일단 우리도 들어가서 얼굴이나 좀…,"
"그전에, 너네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
병실의 문을 닫으며 김석진이 말했다. 따라오라는 듯 비상구를 콕 집어 가리킨 김석진이 걸음을 옮겼다.
병원의 옥상이었다. 환자들이 코에 바람을 쐴 수 있게 가볍게 꾸며놓은 작은 옥상정원, 그 구석의 벤치에 우리를 앉힌 김석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핏기 없는 얼굴을 몇 번 쓸어내리던 김석진이 결국 벤치 앞에 쭈그려앉았다. 벤치에 공간을 만들어 여기 앉으라 손짓했으나 김석진은 손을 휘휘 저은 채 한동안 제 얼굴을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김석진은 입을 열었다.

"여주가…, 자기가 화분에 맞은 걸 기억을 못 해."
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얼빠진 낯으로 김석진을 쳐다보았다. 핏기가 싹 가신 창백한 낯빛이 이 때문이었나 싶었다. 이유를 대충이나마 알 것도 같았다. 김석진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김태형도 마찬가지야. 둘 다 김여주가 권연희가 던진 화분에 맞아서 쓰러졌단 사실을 몰라. 김여주는 그냥 자기 몸이 안 좋아서 쓰러졌다고 생각해."
"…말이 돼?"

"안될 건 없지. 김여주와 김태형은 우리처럼 빙의자가 아니니까."
"이미 일어난 일이 없던 일이 됐다고? 소설이 다르게 흘러가는 건 그렇다 쳐도, 그런 게 가능한 거였냐고…."
소설이 우리가 알던 줄거리와 다르게 흘러간지는 꽤 됐다. 애초에 내가 김여주의 친구가 된 것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미리 바뀌어있던 줄거리'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과, 이미 일어난 일에 '소설의 줄거리'가 덮여씌워지는 일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어쩌면 작가가 소설을 뜯어고치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해본 적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작가가 이 소설 바깥에서 글을 쓰고 있단 전제 하에서였다. 그럼, 이 전제를 뒤엎어버린다면?
김석진은 김여주의 상태에 대해 짤막하게 말을 덧붙였다. 김여주가 쓰러진 건 빈혈 탓이고, 아까 받았던 수술은 간단한 진료로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다시 병실로 돌아갔을 땐 머리에서 피를 흘리던 김여주를 안고 갈 때의 급박한 표정을 가진 김태형은 없었다.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대수롭지 않게 우리를 맞아주는 그가 있을 뿐이었다. 색색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있는 김여주를 내려다보는 내내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김여주가 화분에 맞고 쓰러졌다. 그건 이제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일이었으니까.
조금 더 김여주의 상태를 지켜보다 가겠다는 네 명을 두고 나는 먼저 자리를 떴다. 바쁜 일이라도 있냐는 박지민의 물음에 나는 '내일부턴 어떻게 할지 생각 좀 해보려고'하는 변명을 남겼다. 간단한 인사를 남긴 채 병실을 나서는 나를 붙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병원의 느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나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누군가로부터 온 메시지를 열어 확인한 나는 핸드폰 화면을 끄고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걸음이 빨라졌다.
권연희
만나서 얘기 좀 할래?
시내 공원으로 와
혼자
나는 권연희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 📗 📕
"떨거지들은 잘 떼놓고 왔어?"
분수대 앞 벤치에 앉아 생글생글 웃고 있는 꼴을 보니 저절로 인상이 찌푸러졌다. 뭐 좋다고 웃어…. 여유롭게 웃는 낯에 침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입안에 고인 침을 얼른 삼키고 나는 물었다. 떨거지들?
"왜, 네 왕자님들 말이야. 아주 지극정성이던-,"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헤에-, 나는 설마 너 하나 없어졌다고 걔네들이 헬기까지 부를 줄은 몰랐거든."
아, 그 사건…. 헬기 사건만 떠올려도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 지옥 같았지 그때….
"그 정도로 너한테 지극한 애들이니까 뭔 짓을 할지 몰라서 떼놓고 오라고 했는데, 보아하니 어떻게 잘 떼어놓고 오긴 했네?"
"…왜 혼자 오라고 한 건데? 뭐, 저번처럼 산에서 밀기라도 하려고?"
"으응? 아니? 괜히 여러 명이 몰려와서 나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어떡해. 뭘 믿고 우르르 다 같이 오라고 하니?"
"……."
…어쩐지 조금 막연해지는 기분이었다. 해코지는…, …네가 여태 나한테 했던 것들이 해코지 아닐까? 어이가 사라지는 탓에 표정관리가 쉽지 않았다. 떨떠름한 표정을 굳이 숨기지 않고 나는 말을 이었다. 어, 그래…,
"아무튼…, …그래. 둘이 오붓하게 남은 김에 좀 물어나 보자.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뭐가 불만이냐고?"
"그래. 대체 뭐가 불만이길래 틈만 나면 내 머리에 지우개 똥이나 던지고 있고…."
그뿐이랴, 걸레 빤 물을 냅다 부으려 하기도 했고, 괜히 발을 걸기도 하고, 멀쩡한 체육복을 찢지를 않나, 횡단보도에서 사람을 밀치질 않나…. 아무렇지 않게 넘기긴 했다지만, 그간 당했던 일들에 대한 짜증이 아주 없는 건 또 아니었던지라 내 입에서는 그간 권연희의 행적들이 봇물 터지듯 줄줄 흘러나왔다. 물론 권연희가 그런 내 말에 줄곧 시큰둥한 반응만 내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애초에 이런 걸로 죄책감을 느낄 애였으면 이런 행동을 하지도 않았겠지. 나는 되는대로 뱉어내던 말들을 삼키고 물었다.
"그리고 내 이름은 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 궁금한데."
"네 이름? 같은 반 친구 이름도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네 이름, 김연주."
만약 내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가 권연희가 아니었다면, 나는 쉽게 그 말을 수긍했을 것이다. 그치, 같은 반 친구끼리 이름 아는 건 당연한데, 뭐가 이상하다고-, 하면서. 하지만 내가 물은 '이름'에 대한 것은 은하별 고등학교 1학년 3반 김연주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말고, OOO."
"……."
"알지? 내 이름,"
OOO. 내 원래 이름. 저 봐라, 악귀라도 씌인 것 마냥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저 얼굴을. 모른 척을 할 거였으면 끝까지 뻔뻔하게 나가기라도 하던가. 내 이름 한 마디에 평정심을 잃은듯한 권연희는 그저 소리만 빽빽 질러댈 뿐이었다. '내가 널 어떻게 몰라!!' 하는, 꽤 드라마 남주인공이 내뱉을법한 대사를 하면서 말이다. 나는 또 얼빠진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권연희가 '내가 널 알면, 너도 날 알고 있어야지!'하는 떼쓰는 아이 같은 대사를 내뱉었을 때는 더더욱.
권연희가 OOO를 알고 있단 사실은 그의 반응만 봐도 거의 확실했다. 다만 내 머릿속에 권연희라는 사람이 존재하질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 하지만 앞서 말했듯, 암만 생각해 봐도 내 주변에 저렇게 싸가지와 인성을 동시에 밥 말아먹은 사람은 없었다고. 이쯤 되니 순수하게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대체 네가 누구길래? 대체 나한테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는-,
"OOO, 네가 어떻게 날 몰라!!"
"…네 원래 이름도 권연희야? 아니, 내 주변엔 그런 사람 없었는,"
"있어!! XX 고등학교!!"
내 모교? 나는 다시금 기억을 되짚었다. XX 고등학교에 다녔던 건 맞긴 한데….
"XX 고등학교!! 1학년 4반!!"
"…!"
"4번 권연희! 네가 왜 날 몰라!"
아 그래, 내가 진짜 17살이던 무렵 나름 친하게 지냈던 아이의 이름이 권연희였던 것 같기도 하고. 미간을 찌푸리곤 눈동자를 도로록 굴리며 나는 떠올렸다. 그래, 확실히 '권연희'란 이름을 가진 아이가 있었던 것 같긴 했다. 근데…,
"…네가 그 권연희라고?"
"그래애!!"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는 씩씩거리는 내 앞의 권연희를 보던 나는 오른손으로 내 입을 가렸다. 이제야 기억이 난다. XX 고등학교 1학년 4반 권연희. 기억에서 선명해진 그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입을 열었다.
"…아닌데? 거짓말 치지 마."
"뭐어?!"
생긴 게 너무 다르잖아…!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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