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가 조금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썼습니다.
- 대체 무슨 글인지 작가도 모릅니다.
- 왜 썼는지 작가도 모릅니다.
- 클리셰 덩어리입니다.
- 가볍게 읽어주세요... 어차피 개연성 개나 준 엉망진창인 글입니다...
- 여주의 원래 이름이 나오는 부분은 일부러 비워뒀습니다. 독자님들 이름 넣어서 읽으시면 될듯...
-TRIGGER WARNING! 2010년대 초에 유행하던 인터넷 소설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폭력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엑스트라로 살아남는 법
: 어느 날 소설 속 엑스트라가 되어버렸습니다.
W. 그쁨
"먹을래?"
이보다 더 어이없는 일은 없겠다 싶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상대에 나는 생긋 웃어 보이곤 손에 쥐고 있던 젤리봉투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그래봤자 뜯긴 젤리봉투 안으로 손이 들어오는 일은 없었지만. 기꺼이 젤리봉투에 손을 내미는 대신, 정말 제게 말한 것이 맞느냐는 듯 연신 눈을 깜빡이던 상대방이 물었다.
"…나한테 하는 소리야?"
설마 그럴 리 없단 역력이 가득한 말투였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그 애에게 젤리를 권한 것이 맞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지 못할 이유가 없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이제는 허! 하며 헛웃음을 치는 것이었다. 왜? 하는 악의 없는 되물음에 그는 이제 어이가 없다는 눈빛을 숨기지도 않고 마구 뿜어냈다. 이거 맛있는데…. 어쩐지 젤리로는 시선도 안주는 그 아이에 불쑥 뾰로통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아무도 손 대지 않은 젤리봉투에 손을 집어넣어 개중 가장 맛있는 것으로 고른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먹어봐, 맛있어-,"
그 애의 입에 무작정 젤리를 집어넣기 위해서. 어, 그러니까,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권연희의 입속에 말이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결코 괴롭힐 목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암만 권연희가 날 죽이려 바득바득 애쓴 전적이 있더래도 말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곤 말했다.
"독이라도 탔을까 봐? 걱정 마~, 난 그런 짓 안 해. 너면 몰라도."
"……."
"그래도 맛있지 않아?"
"…대체 어제부터 왜 이러는 건데?"
시뻘게진 얼굴로 젤리를 오물오물 씹어삼킨 권연희가 물었다. 딱히 할 말이 없어 되는대로 지껄였다. '…친구끼리 뭐 어때?' 하는 내 말에 권연희는 정말로,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그 표정이 분통터진다는 표정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음, 말을 잘못 꺼냈나? 열받을 땐 또 단 게 좋지-, 하며 또 젤리봉투를 뒤적이려는 내 뒷목을 다급하게 잡아챈 손길이 아니었다면, 아마 권연희는 또 열불이 난다는 표정으로 젤리를 씹어야 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맥없이 질질 끌려가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단 소리다. 마지막으로 권연희의 손에 복숭아 맛 새콤달콤을 쥐여준 것만 빼면 말이다.
📘 📗 📕
분통이 터진다는 표정을 지은 건 비단 권연희 뿐만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박지민이 딱! 권연희가 지어 보였던 그 표정 그대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입술을 달싹거리긴 하는데, 막상 입 밖으로 말을 내뱉기엔 황당함에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박지민은, 내 뒷목을 잡아채곤 복도 저 끝 구석에 도착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문장을 내뱉을 수 있었다.

"너 대체 뭐 하자는…, 아니, 왜 갑자기 거기서 애를 사육하고 있는 건데?!"
사육이라니, 나름 친해지자고 내민 뇌물들이 그렇게 보였다니 통탄스럽기 그지없단 생각을 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사육이라니, 친구한테 젤리 좀 권할 수도 있는 거지."
"…너랑 권연희가 친구? 차라리 고양이랑 쥐가 친구라는 게 더 그럴듯하겠다."
"그 정도야?"
"애초에 친해질 이유가 없는데 거기서 왜 그러고 있냐고…. 권연희가 너한테 한 짓도 있는데, 그날 너한테 자기가 한 짓들 다 실토했다며? 뭐,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았지만."
권연희를 만났던 날의 일을 박지민과 전정국에게도 모두 털어놓았기에, 박지민이 그날의 일을 운운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권연희가 했던 말들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아주 세세하게 읊어주었거든. 그 덕에 그게 사람이 할 법한 생각이냐며 당장 권연희를 잡아 죽여야겠다 길길이 날뛰는 박지민과 고요하게 권연희를 비롯한 그 집안을 조져버릴 계획을 세우는 전정국을 말리느라 진땀을 뺐더랬다. 소설 속에서 영향력 있는 집안 자제로 살아서 그런가, 애들이 누구 하나 조지는 데 아무런 거리낌 이 없어진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슨 해결책이 죄다 권연희를 조져버리는 것으로 결론이 나는지.
"아닌데?"
"뭐?"
"친해질 이유가 왜 없어."
차고 넘치면 몰라-, 하는 내 말에 박지민은 인상을 썼다. 당최 무슨 뜻인지 모르겠단 표정에 나는 킥킥 웃었다. 권연희와 친해질 이유? 딱 한가지면 충분했다.
"권연희는 작가잖아."
"…그게 뭐?"
"작가잖아?"
이 소설의 작가라는 것. 그거 하나면 차고 넘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마음대로 소설을 뜯어고칠 수 있는 존잰데, 어떻게 친해질 이유가 없다고 할 수 있겠어?"
따지고 보면 이 세계에서 작가란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권연희의 말만 해도 그랬다. '김연주'라는 등장인물이 생겨난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테다. 원하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이 세상을 이끌어갈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박지민이 입을 떡 벌린 채 경악하는 꼴을 난 즐겁게 구경했다. 단번에 그 이유를 납득한 것만 봐도, 권연희가 우리에게 있어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그 영향력이 단번에 입증된 셈이었다. 나는 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교실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 '작가'라는 대단한 위치에 권연희가 있다는 사실 말고도 꽤 복합적인 이유가 존재했지만, 그것에 대해 박지민에게 일일이 설명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옛날 생각이 나서'라는 추억에 젖은 이유를 대봤자 꼴값을 떤다며 날 호구 취급할 것이 뻔해서 그랬다.

"그럼 그 말 같지도 않은 계획을 세운 게…,"
아무튼 그런 다양한 이유들로 하여금, 나는 김석진과 박지민, 그리고 전정국이 권연희에게 쓸데없는 적개심을 가지고 여태까지 내게 행한 일들에 대한 복수를 하겠답시고 나서는 것을 막았다. 소설 속에 빙의하게 된 마당에, 작가를 적으로 돌리는 멍청이가 어디 있어? 그래서 나는, 그 모든 것을 반대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적으로 돌리는 게 싫다면, 아군으로 만들면 될 것 아냐?
…물론 나를 제외한 세 빙의자들이 거세게 반발하긴 했지만, 아무튼 나는 권연희와 친해지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실천하고 있었다. 이름하여, '친구 먹기 대작전'. 유치찬란한 네이밍 센스는 그냥 넘어가 주길 바란다. 아무래도 권연희를 보고 있자면 열일곱 무렵의 흑역사가 마구마구 떠오르는 통에 그랬으니.
"그래도 그렇지, 겨우 생각한 방법이 사육이냐?"
"사육 아니라니까. 원래 먹을 거 주면서 친해지는 게 정석인 거 몰라?"
"…그거야 평범한 애들이나 그렇겠지. 너랑 권연희가 마이쮸 하나로 절친 먹는 게 가능한 상황인 것 같아?"
세 사람의 격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만의 작전을 아주 착실하게 수행해나갔다. 바로 어제부터. 즉, 내가 권연희에게 '먹을래?'하며 무언가를 내민 게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권연희에게 싸늘한 눈총을 받고 쓰레기통에 처박힌 초코우유를 시작으로, 오늘 억지로 권연희의 입에 들어가게 된 젤리까지.
"내 말 듣고 있어? 상대는 권연희라니까!? 먹을 거 하나로 좌지우지될 우정이었으면 애초에 널 그렇게 싫어했겠냐고,"
"먹을 걸로 좌지우지될 우정인가 보지."
"…아무튼, 안 먹힐 계획으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냥 우리끼리 해결책을 찾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고."
"아니야, 먹힐걸?"
"먹힌다고, 이게?"
"…뭐, 네 눈엔 좀 다르게 보이려나?"
가능성 없어 보이는 계획에 목을 매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정말 바보가 아닌 이상, 가능성에 0에 수렴하는 일에 애를 쓰진 않는다. 그러니까, 내 눈엔 보였다. 권연희 모습에서 간간이 보이는 'XX고등학교 권연희'의 모습에 나는 가능성을 내건 것이다. 예를 들면, 첫날 내민 초코우유에 잘게 떨리던 시선이 그랬고, 억지로 집어넣은 젤리를 뱉어내는 대신 씹어삼키는 것을 택하는 모습이 그랬고, 손에 쥐여준 복숭아 맛 새콤달콤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모습이 그랬다. 그래, 여태 내가 내민 것들이 모두, 우리가 열일곱 일 적 자주 먹곤 했던 주전부리였으니까.
만일 권연희가 내가 내미는 모든 것들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 감흥 없다는 반응을 내보였으면 나도 이 계획을 빠르게 포기하고 다른 해결책을 찾으러 나섰을지도 모른다. 근데 아니니까. 자그마한 틈이 보였으니, 이왕 하는 거 모두에게 좋은 결과가 날 수 있도록 애써보자-, 이거지. 물론 이런 속 사정을 알고 있을 리 없는 박지민은 여전히 알쏭달쏭 한 표정이었지만, 뭐 어때.

"…난 아직도 네 머릿속을 잘 모르겠다. 날 잡고 한번 뒤져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
이제부터라도 알아가면 될 일이다. 나는 박지민의 말에 또 킥킥 웃으며 그의 입에 젤리를 한가득 넣어주었다. 얌전히 젤리를 받아먹던 박지민이 말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위험한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바로 관둘게. 그 정도는 약속할 수 있지-,"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날 보며 박지민이 픽 웃었다. 제 새끼손가락을 꼭꼭 걸어 약속, 도장, 복사, 마지막 코팅까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일련의 행동들을 한 우리는 사이좋게 교실로 들어섰더랬다.
"……."
그리고 김석진과 눈이 마주쳤고-,
"……."
나는 마주친 눈을 피해버렸다.
"…나 묻고 싶은 거 하나 더 있어."
"……."

"너 김석진이랑 또 싸웠, 아니, 뭔 일 있었냐…?"
…싸운 건 아니고…, 말 끝을 흐리는 날 보며 박지민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뭔데? 하는 표정에 자는 불퉁한 표정을 짓곤 젤리를 한가득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걸 그대로 박지민의 입에 쑤셔 넣었더랬다. 난데없이 봉변을 당한 박지민이 황당함을 온 얼굴로 표출했다. 박지민의 칭얼거림을 피하기도 할 겸, 그의 질문에 회피하기도 할 겸, 나는 제 자리에서 내게 손을 흔들고 있는 이유진과 무사히 퇴원을 마친 김여주에게로 뛰다시피 걸어갔다. 연주야! 주말에 영화 보러 갈래?! 하며 반겨주는 이들에게 말간 미소를 보이면서.
거짓말은 아니었다. 싸운 게 아니다. 비록 일전보다 훨씬 어색한 사이가 되긴 했지만, 고작 싸움으로 사람 사이가 이렇게 멀어질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싸운 게 아니었다.
고백을 철회당했다. 그뿐이었다.
📘 📗 📕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고백을 철회당하기까지 하느냐 묻는다면,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대답을 내놓겠다. 진짜로.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아무런 짓도 안 했다고! 시발! 차라리 내가 김석진의 좋아한단 말을 듣고 떨떠름한 기색을 내보였다거나, 그 이후에 그를 망신을 줬다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했다거나 해서 그에 대한 결과로 고백을 철회당하기라도 했다면 차라리 억울하지라도 않지, 아니, 그런 거였다면 오히려 반겼겠지! 한데 그게 아니었다. 김석진이 고백을 철회한 이유가 내게 있지 않았다. 아니, 내게 있나?
그래, 생각을 달리해보면, 오히려 아무 짓도 하지 않아서 그런 걸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머리 터지도록 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어이가 없었지만, 엊그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다 보면 자동적으로 내 머릿속이 그날의 일로 가득 차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비단 '고백 철회'라는, 인생에 있어 한 번쯤 겪을까 말까 한 경험을 한 날이라는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사실 그 이유가 가장 크긴 했다. 나는 천천히 그날의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았다. 그러니까,
난 그냥 훌쩍거리며 우는 김석진의 등을 토닥여줬고,
그러다 김석진이 좋아한단 말을 했고ㅡ
그리고,
'…난 그냥 계속 김석진의 등을 토닥였을 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가 무슨 말을 내뱉은 것인지 직시한 김석진이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이기까지 하며 고백을 철회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 뒤로 김석진이 얼굴은 희게 질린 주제에 귓바퀴만 새빨갛게 불타오르는, 퍽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벌떡 일어난 탓에 채 중심을 잡지 못한 내가 엉덩방아를 찧긴 했지만, 안절부절못하던 그는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손길로 날 일으켜주기까지 했다. 그래, 그랬는데…. 그 뒤에 뱉은 김석진의 말은 좋아한다는 말 따위가 아니었고, 앞선 고백에 대한 부연 설명은 더더욱 아니었다.

"미안, 실언이었어."
"……."
"없던 일로 해줘."
고백을 듣고, 바로 뒤에 없던 일로 해달란 말을 들었다. 여기서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은? 백 번을 생각해도 황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뭐? 하며 인상을 찌푸리곤 되물어오는 내 모습에 김석진이 대체 무슨 감정을 느꼈길래 얼굴을 더더욱 창백하게 물들였는지는 모를 일이나,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서 미안하단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고, 이렇게 충동적으로 내뱉어 날 곤란하게 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고,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는 김석진을 보며 내가 대체 무슨 반응을 보였어야 했냐고…! 당황스러움과 황당함은 물론이거니와, 이윽고 내게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이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잘못된 일이라 여기는 듯한 김석진의 모습에 나는-,
"…열받네?"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져내리고 만 것이었다. 젠장!
그래도, 알고 지낸 시간이 결코 짧다고 할 순 없었던 만큼, 김석진이 정말 좋아하지도 않는 나에게 고백하는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다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넘어갈 수 있을 만큼, 짧은 시간 동안 김석진과 나를 비롯한 빙의자 네 명에게 생겨난 신뢰는 두터운 편이었다. 그래도 고백 철회는 이야기가 다르지. 이를 으득으득 갈며 집으로 돌아간 나는 침대에 엎드린 채 괴성을 질러댔다. 으아아악-!! 하는 그 소리에 엄마가 시끄럽다며 등짝을 퍽퍽 내리쳐도 나는 앓는 소리를 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좋아한단 말에 하릴없이 귓바퀴나 발갛게 물들여버린 내가 짜증 나서 말이다!!
김석진을 좋아해? 하는 물음엔 아니라고 대답하겠지만, 그렇다고 호감이 아주 없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이 무슨 쓰레기 같은 발언인가 싶어 손에 돌을 쥐는 이들에게는 그런 거 아니니까 진정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남 주기에 아깝고, 내가 갖기엔 싫은 그런 건 절대 아니니까! 말하자면, 확신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다. 김석진이 고백을 없던 일로 해달라 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그 자리에서 냅다 그에게 '그래! 나도 좋아! 그럼 우리 사귀자!' 이딴 말을 내뱉을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생각할 시간을 달라-, 정도의 대답이 나올 정도의 호감은 있단 말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그럼에도! 굳이! 고백을 취소해버리고 마는 그 모습은 열이 받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없던 일로 하자는 그 말을 듣던 순간 그냥, '이 개쓰레기 새끼가!!' 하며 김석진의 뺨을 내리치고 싶단 생각이 만만이었다고!
…아무튼, 그렇게 된 것이었다. 고백 비스무리한게 오간 사이에 예전처럼 허물없는 사이로 지내길 기대하는 건 무리겠지만, 김석진과 나 사이에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이나 넓은 어색함이라는 강은 우리 사이에 오간 말이 겨우 '고백 비스무리한'게 아닌, '고백 철회'라는 나름 대형 사건에 가까운 일이 자리 잡는 바람에 생겨난 것이란 말이다.
그래, 이왕 털어놓은 김에 조금 더 솔직한 심정을 전해보자면, 나는 내 자존심이 와장창 뭉개버린 당사자인 김석진을 절대 곱게 볼 수가 없었다. 김석진이야 그 일을 없던 일로 해달라 부탁한 당사자인 만큼, 내게 당장 어색하게 굴기보단 태연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나을 거란 판단을 했겠지만, 난 아니었다. 난 아니라고. 당장 다음날부터 난 김석진을 싸그리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소소한 복수라면 복수였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김석진과 그런 거리를 두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뭉개진 자존심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되지도 않는 핑계를 대가며 김석진을 피했다. 자꾸만 무시를 당하니 김석진도 열이 받던 풀이 죽던 내게 더는 말 거는 게 요원해졌을 터였다. 그렇게 어색하게 지내기 시작한 게 겨우 삼일 전이었고, 단 삼 일 만에 우리는 둘도 없이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렸더랬다. 김석진과 내가 내외하는 이유를 모르는 박지민과 전정국은 그저 내가 권연희를 혼자 만나고 온 일 때문에 싸웠겠거니-, 하며 넘어갔다. 일전에 김석진이 나 혼자 움직이는 것에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한 일이 있었던 탓이었다. 아무튼 그래, 세상 살아가는데 하등 필요 없는 것이 자존심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말에 반박하겠다. 적어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내 자존심을 좀 챙기고 싶다는 게 내 본심이었다.
'그래도 평생 이렇게 지낼 순 없는 법이긴 해.'
그러니까 조금만, 내가 뭉개진 자존심을 개미 똥구멍만큼이라도 회복할 시간을 줘. 딱 그동안만 어색하게 지내자. 김석진은 절대 모를 이유를 들어가며 속으로 심심한 사과의 말을 보냈다. 이기적이기 짝이 없단 생각이 들었지만 별 수 없었다. 괜히 어색한 연기를 하며 사이를 유지하다 박지민과 전정국에게 들켜 죽도록 놀림당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고, 와장창 짓뭉개진 내 자존심을 그대로 두고 싶지도 않다. 아무튼, 난 적당한 시간 동안 김석진에게 심통을 좀 부려볼 예정이었다. 이렇게까지 나오는 이유라 함은, 아마도 내가 그에게 호감이 있었다는 이유가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때가 되면 적당히 오해를 풀고, 김석진과 진솔한 이야기라도 나눠봐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했는데…
…그게 다, 죄다 부질없는 짓이 된 건 단연코 내 탓은 아닐 것이다. 절대로!
"…으, 머리야…."
…아니, 어쩌면 내 탓일지도…? 그래, 내 탓이 맞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내가 빙의한, 권연희가 빚어낸 이 소설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엄청나게 유치찬란하고 말도 안 되는 일들만 가득하단 사실을 아주 새까맣게 잊고 있던 내 탓이 맞는 것 같다.
코를 찌르는 퀴퀴하기 짝이 없는 공기나, 아주 단단하게 묶인 양 팔과 양 다리나, 그에 비해 어설프게 씌워진 채 내 시야를 가리고 있는 새카만 천이나…. 그래, 수많은 소설들을 읽어온 지 어연 10년에 빙의 인생 2개월이면 모르기도 힘들법한 일이 내게 다시 일어나고야 말았다.
"…또야? 진짜로?"
아무래도 또! 납치당한 것 같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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