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가 조금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썼습니다.
- 대체 무슨 글인지 작가도 모릅니다.
- 왜 썼는지 작가도 모릅니다.
- 클리셰 덩어리입니다.
- 가볍게 읽어주세요... 어차피 개연성 개나 준 엉망진창인 글입니다...
- 여주의 원래 이름이 나오는 부분은 일부러 비워뒀습니다. 독자님들 이름 넣어서 읽으시면 될듯...
-TRIGGER WARNING! 2010년대 초에 유행하던 인터넷 소설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폭력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엑스트라로 살아남는 법
:어느 날 소설 속 엑스트라가 되어버렸습니다.
W. 그쁨
아마도 우리가 납치라는 끔찍한 일을 당한 것 같다는 것을 김여주에게 전한 뒤 지금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우선 김여주가 이 소설의 여주인공이라는 자리에 위치해있다는 것이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전에 은하별 고등학교를 아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김여주 납치 사건'의 장본인이 아닌가. 이미 납치당한 경험이 한 번 있는 김여주인 만큼(굉장히 슬픈 일이지만) 그의 상황 파악도 굉장히 빨랐다.
"그럼 연주 너도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는 거지? 아까 대화 내용으로 봤을 땐 여길 지키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어? 응…, 함정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음, 아니야. 연주 네 말을 들어보니까 그 사람들은 그냥 평범한 여고생을 납치했단 사실에 굉장히 안심하고 있는 것 같거든. 사실 저번에도 그랬어. 되게 감시가 허술해서 나 혼자서도 잘 빠져나갔었거든, 물론 중간에 태형이가 도와주긴 했지만…."
"…언제? 너 납치당했을 때?"
"응! 아무튼 그런 걸로 봐선 감시는 잘만 피하면 피해질 정도일 것 같아. 연희를 데려올 생각도 하고 있는 걸로 봐선 동네에서 그렇게 떨어진 곳도 아닌 것 같고. 다른 지역으로 넘어온 것 같진 않아. 다행이다, 그치?"
"어, 응…."
상황 파악이… …지나치게 빨랐다, 응…. 이게 바로 여주인공의 비애인가? 어째서인지 눈물이 고일 것 같아 나는 눈을 홉뜨고 버텼다. 엑스트라라 다행이다,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아무튼, 김여주가 납치당했을 때 '꺄아아악, 살려주세요!!' 따위의 멍청한 짓거리를 하는 류의 여주인공이 아닌 점은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그랬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겨우 남자 주인공의 힘으로 여자 주인공을 찾아주기를 바라고 또 바라는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의 여주인공, 김여주는 달랐다. 상황 파악을 빠르게 끝내곤 저 조막만 한 머리통으로 이곳에서의 탈출 각을 재는 것만 봐도 비범함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는데, 이는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여주인공의 능력치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사기캐스러웠다.
"…어떻게 하라고?"
"잘 봐, 여기 매듭 끝을 이렇게 잡고, 반대쪽으로 이렇게… 또 이렇게 당겨서 다시 이 틈새로 밀어 넣고, 그다음은 이렇게 한 다음에에…, 또 이쪽을 잡고 세게 당기면… …풀렸다!"
장장 몇십 분이란 시간 동안 땀이 날 정도로 몸부림쳤던 내 의미 없던 행동들이 더욱 의미 없어졌다. 손목에 붉은 자국이 남을 정도로 세게 묶인 매듭을 이렇게 저렇게 손쉽게 풀어버리는 김여주 때문이었다. 할 수 있겠어? 하는 그 말에 나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건 밥 아저씨가 와도 못할걸.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얌전히 김여주에게 묶인 양손을 내밀었다. 부탁 좀 하겠단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여주는 삼 분도 되지 않아 발목과 손목에 묶여있던 끈을 모두 풀어헤쳤다. 그럼, 가자! 김여주가 웃으며 말했다. 납치된 상황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말갛게 웃는 김여주에 나는 계속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배웠어?"
"어? 뭘?"
"이거, 밧줄 푸는 거. 아까 납치됐다는 소리 들었을 때도 너 되게 침착해 보였고…."
"아아, 별거 아니야! 저번에 납치당한 후에 태형이가 가르쳐줬거든,"
"…밧줄 푸는 법을?"
"응! 그리고 사실은…,"
잘만 말하던 김여주가 수줍은 듯 양 뺨을 붉게 물들였다. …엉? 할 새도 없이 이어진 말에 나는 굳은 다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랑 다르게 연주 네가 같이 있어서… 나 되게 침착하게 있을 수 있었어! 납치된 상황에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래도 연주 너랑 같이 있어서 다행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앞으로 김여주는 내 친구다. 응, 그렇고말고.
물론, 김여주의 깜찍한 발언만이 내 덕심폭발의 원인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김여주는, 되게 뭐랄까, 뭐든지 척척해냈다. 손발에 묶인 줄도 척척 풀고, 컨테이너를 뒤적거리며 쓸만한 것들을 척척 찾아내고(굴러다니던 쇠 파이프를 챙겨드는 모습에 내 두 눈을 의심하긴 했지만), 입구의 틈 새로 귀를 기울여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철두철미함이나, 발자국 소리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그렇게 안심될 수가 없었다. …남주인공들보다 낫지 않을까? 그리고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구경하던 나는 생각했다.
"탈출… 의외로 쉬울지도…?'
그만큼 김여주는 만능이었다. 역시, 빙의 첫날부터 괜히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든 게 아니었어, 응. 그리고 이런 생각은, 김여주가 근처에 있던 가드 두 명을 후드려패는 걸 보고 더욱 굳건해졌다.
"후-, 연주야! 이제 됐어, 나와도 돼!"
…대체 이 소설 장르가 뭐야?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으려 부단히도 애쓰며 김여주의 뒤를 쫄래쫄래 쫓았다.
쟤랑은 절대 싸우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과 함께.
📘 📗 📕
낡은 컨테이너 박스가 몇십 대 모여있는 공터에서 사람을 피해 다니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나 이곳의 지리를 잘 모르는 우리에겐 더더욱. 이름 모를 산속에 위치한 것만으로도 모자라 지금은 다 늦은 새벽이었다. 해가 뜨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진 않았지만, 암만 탈출이라 한들 밤에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옳은 선택일지 고심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질이 도망쳤다!!"
"주변을 수색해! 여학생 둘! 멀리는 못 갔을 거다!!"
오래가지 않을 고민이긴 했다. 인질이 사라졌다!! 덩치 큰 아저씨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게 공터와 산의 경계에 있던 우리에게도 들릴 정도였으니까. 인질이 사라졌다는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들은 나는 김여주를 쳐다보았다. 김여주는 날 쳐다보았다. 눈을 한번 마주친 우리는 망설인 적 없는 것처럼 산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암만 생각해도 인질로 잡혀있는 것보단 산속에서 구르는 게 훨씬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래도 명색이 여주인공에 여주인공 친군데, 산속에 갇히더라도 남주들이 구하러 오던가 하겠지.
원래 여주인공들에게는 이런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갈만한 능력이 있는 걸까? 하긴, 그러니까 여주인공이겠지. 산을 능숙하게 헤쳐나가는 김여주의 뒤를 헥헥거리며 쫓으며 생각했다. 무슨 일평생을 산에서 나고 자란 사람처럼 이리저리 산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꼴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하면 비루하기 짝이 없는 몸뚱이를 가진 나는? 김여주가 수월하게 한 걸음 내딛는 거리를 헥헥거리며 두세 발만에 쫓아가기 일쑤였다. 지쳐 나동그라진 건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연주야… 괜찮아?"
"허, 허억…, 조금, 조금만 쉬다 가자…, 제발…."
땀에 절다 못해 시뻘게진 얼굴을 한 나를 김여주가 기겁하며 커다란 바위에 앉히지 않았더라면, 장담컨대 난 그대로 낙오하던 진짜로 산을 구르던 했을 것이다.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다. 짧은 시간에 꽤 멀리까지 왔다는 사실은 희소식이었지만, 산을 뒤지는 듯한 인기척이 여전히 들려온다는 것은 비보였다. 나는 바위에 걸터앉았던 몸을 바위 뒤로 숨기는 쪽을 택했다. 혹시라도 근처까지 왔다 날 발견하면 좆 되는 건 우리니까.
괜찮아? 하며 걱정스레 묻는 김여주에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쉬니까 좀 살 것 같긴 했다. 갈증이 일고, 다리가 욱신거리긴 했지만 참을 만했다. 숨만 좀 고르고 가자는 내 말에 김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위 뒤에 숨은 꼴이 처량하기 그지없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찾았다, 이 쥐새끼들-,"
어휴, 시발…. 한숨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누가 클리셰 덩어리 망작 소설 아니랄까 봐 진짜 대사 하나하나가 다 진부하기 짝이 없었다. 번들거리는 눈빛을 하곤, 재수 없게 히죽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덩치 큰 아저씨가 보였다. 나는 흘긋 김여주를 쳐다보았다. 암만 여주인공이라 한들 이런 상황에서는 패닉에 빠지기 마련인 법이라, 김여주의 낯이 꽤 파리하게 질려있었다. 어휴, 그래. 탈출시켜준 값은 해야지, 생각하며 나는 숨을 몇 번 더 몰아쉬곤 김여주를 내 쪽으로 당겼다. 그러고는,
"크아아아악!! 이 미친년이!!"
냅다 흙을 뿌렸다. 명중이었다. 비명소리마저도 저렇게 진부할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을 잠깐 하며 나는 소리쳤다. 튀어!! 하는 내 말에 김여주는 잠깐 당황하긴 했지만, 이내 뒤에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아저씨를 한 번 쳐다본 뒤에는 망설임 없이 뛰쳐나갔다. 잡히면 죽여버릴 거야!! 하며 악을 쓰는 소리가 산에 울려 퍼진 탓인지 어느새 뒤를 쫓는 사람이 배로 늘어나있었다. 아, 좆됐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게 내쉬려 애쓰며 생각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냥 잡혀야 하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상황을 타개할 묘수가 번쩍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암만 소설 속이래봤자 나는 엑스트라였으니까, 그딴 기적에 희망을 걸 바에야 최악과 최악을 지워나가며 방법을 추려나가는 쪽이 더 어울렸다. 역시 여기선 남주인공들의 등장에 기대를 해보는 수밖에 없나, 아니면, 아니면….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리고 그게 원인이었다.
철퍼덕, 하고 넘어지는 걸로도 모자라 산길을 데굴데굴 구르기까지 했다. 일전에 권연희가 산에서 밀었을 때의 것과 같은 류의 통증이 온몸에 번졌다. 연주야!! 하는 김여주의 놀란 목소리도 들렸다. 그래, 이 상황에서 빌어먹을 몸뚱이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도망가지는 못할망정 꼴사납게 넘어져 버리고 만 것이었다. 아씨, 상처를 확인할 틈도 없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무릎이고 팔꿈치고 안 아픈 곳이 없었지만 일단 도망치는 게 먼저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은 내 시야에 가득 들어찬 장면 하나로도 아주 잘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비단 뒤에서 쫓아오는 험상궂은 조폭 아저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오, 망할…."
절뚝이며 뛰던 것도 멈추고 내가 중얼거렸다. 김여주의 안색이 더욱 파랗게 질렸다. 뒤뿐만 아니라 앞에서도 웬 새카만 정장을 차려입은 무리들이 나타날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그래, 포위당했다는 말이 꼭 어울리는 꼴이었다.
암만 눈을 굴려봐도 탈출구는 없다. 앞뒤로 나와 김여주를 붙잡으려는 이들이 빽빽하게 벽을 이루고 있었으니. 아, 망할. 잇새로 조용히 욕지거리를 짓씹었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뭐가 있지? 최악에 최악을 지우고 남은 방법 중 가능한 것들만을 추려낸다.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나는 김여주를 내 뒤로 숨겼다. 숨긴다고 뭐가 해결되는 건 아니겠지만, 아무튼 창고에서의 그 멍청한 두 아저씨들의 대화로 봤을 때 권연희가 노리는 것은 나 하나였으니 나만 곱게 잡히면 될 일이었다. 김여주를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그럼 김여주가 경찰이든 남주인공들이든 도움을 청해 날 구해줄 수 있겠지. 그래, 발목도 접질린 마당에 이게 옳았다. 나는, 이왕이면 정장을 차려입은 쪽에 붙들려가는 것이 덜 꼴사나워 보이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꼿꼿하게 앞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엥?"
그리고 허망한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분명 나와 김여주를 잡기 위해 올라온 것이라 여겼던 까만 정장 아저씨들이 우리를 지나쳐가는 것은 내 예상범위에 없던 상황이라 그랬다. 심지어는 다친 덴 없으시냐 공손하게 묻기까지 하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김여주도 마찬가지였다. 당최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어 얼굴에 물음표만 띄운 채 굳어있는 나와 김여주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릴 때까지는 그랬다.

"야, 김연주! 김여주!! 괜찮아?! 다친 덴 없어?!"

"김연주는 벌써 한바탕했나 본데, 다리 개 아프겠다…."
김여주의 몸이 풀썩 꺾였다. 어어? 하며 같이 무너져내리려던 나와 김여주를 전정국이 단단히 붙잡았다. 괜찮아? 다시 물어오는 그 말에 김여주는 와앙-, 울음을 터트렸다. 긴장이 풀린 탓일 터였다. 나는 눈을 끔뻑이며 김여주를 한 번, 전정국과 박지민을 한 번, 저 뒤에서 둔탁한 소리와 비명을 내지르며 쌈박질에 열을 올리는 까만 정장 아저씨들과 우리를 쫓던 조폭 무리를 한번 쳐다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멀뚱멀뚱 서있던 내가 입을 열 새도 없이 나는 그대로 누군가의 품에 쏙 들어가 안길 수밖에 없었다. 차가운 품이었다. 얼마나 뛰어다닌 것인지 바람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차가운 품,
"…다행, 무사해서…, 다행이야…,"
"…김석진?"
그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기까지 해서 나는 놀라 손을 들어 그 얼굴을 더듬거렸다. 축축했다. 왜 울어!! 하며 그의 얼굴을 마주보기 위해 버둥거렸으나, 내 몸을 단단히 감싼 팔은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되려 발버둥 치면 발버둥 칠수록 더욱 단단하게 죄여오는 탓에 나는 그 품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반쯤 포기했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등을 어설프게 토닥거렸다.
"야, 야, 왜 울고 그래…."
나름 달래려고 한 말이건만, 이제는 내 어깨에 제 얼굴을 묻곤 아주 대성통곡을 해대는 것이었다. 어깻죽지가 축축하니 젖어들어갔지만 불쾌하진 않았다. 되려 어떻게 달래야 하나-, 하는 걱정만이 남았을 뿐. 울음보가 터진 김여주를 위로하는 박지민과, 전정국, 대성통곡하는 김석진을 어떻게든 달래보려는 나. 다른 세상인 양 저 뒤에서 쌈박질이나 벌이고 있는 정체불명의 아저씨들. 개판이구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서서히 멎어가기 시작한 김석진의 울음에 다시금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만 울지? 누가 보면 나 죽은 줄 알겠다."

"…다친 데는?"
"다리 조금? 넘어졌어."
김석진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츄리닝 바지 중간쯤에 흉하게 난 구멍 새로 핏물이 배여있었다. 구멍 사이로 언듯 보이는 무릎마저 상처로 뒤덮여있는 것을 본 김석진의 눈망울이 또 그렁그렁 해지는 걸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발목도 삔 것 같다 하면 진짜 울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조심조심 손을 들어 올렸다. 양 뺨을 축축하게 만든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김석진은 쉽게 진정하지 못했다. 딸꾹질에 가까운 흐느낌이 멈출 생각을 않는 것은 둘째치고 눈이 부어가는 와중에도 꾸준하게 눈물을 흘려대는 모습이 그랬다. 팔을 풀면 내가 도망가기라도 할까, 내 허리를 옥죄는 팔을 풀지 않는 모습마저도 그랬다. 그 모습을 보는 내 기분은… …상당히 묘했다. 그건 분명히 애정이었다. 김석진이 아끼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눈물을 내보일만한 위인이 아니라는 것 즘은 겨우 몇 달을 같이 지낸 나도 알 정도였다. 그렇다면, 그런데도, 이렇게 울면서도, 내게 좋아한단 말을 건네놓고도, 혼자 질겁하며 그 말을 다시 숨겨버린 이유는 뭘까? 문득 머릿속이 맑게 개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김석진의 양 볼을 붙잡았다. 축축한 볼이 내 손안에 뭉개졌다.
"…헐,"
"…히끅,"
"……."
고백 철회, 내 자존심을 와장창 무너뜨린 그 사건이 결국 김석진이 날 생각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더 이상은 모를 수가 없었다. 붙잡힌 김석진의 얼굴에 냅다 내 입술을 부딪힌 것도 그래서였다. 쪼옥-, 하는 남사스러운 소리가 들리고, 흐느낌과 딸꾹질이 뒤섞여있던 김석진의 울음소리가 딸꾹질 소리로 변하는 데는 10초면 충분했다. 귓바퀴부터 아주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그 얼굴을 보며 나는 꺄르르-, 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김석진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울음 그치게 하는 데는 입맞춤이 최고였다.
"…너, 너, 방금, 뭐,"
"응, 나도 좋아해-,"
늦은 대답에 김석진의 얼굴이 정말 터지기 직전까지 붉어졌다. 뒤로는 쌈박질 소리가, 사방에서는 바람이 나무에 부딪히며 내는 선득한 소리가 들리는 산속에서, 꾀죄죄한 몰골로 무릎에서 피나 질질 흘리는 꼴로 말하는 때늦은 대답은 분위기고 무드고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좋아한단 말 하나면 충분했다.
"…뭔데 니들?! 김연주가 김석진 좋아했어?!"
"언제 고백하나 했네."
"뭐야, 전정국 넌 알고 있었어? 왜 나만 몰라?!"
"…우와아,"
박지민과 전정국이 왁왁 대는 소리와 김여주가 나지막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음, 한 달 치 놀림거리 탄생이군. 따위의 생각을 하며 나는 김석진을 보며 베싯 웃었다. 여전히 붉게 달아올라있는 얼굴이 볼만했다. 얼렁뚱땅 내뱉은 고백에 참 잘 어울리는 대답이었다. 그 새빨갛게 물든 얼굴이 말이다.
📘 📗 📕
소설의 클리셰답게, 남자 주인공들에게 구해지는 역할을 아주 충실하게 해냈다. 아니, 사실 클리셰라고 하기엔 좀 다른 상황이긴 했다. 무엇이 다른가 하면, 나와 김여주를 구한 사람이 남자 주인공들이 아닌 다른 이라는 점에서 그랬다. 그러니까-,
"아가씨, 제압 완료했습니다."
"수고했어."
우리를 구해준 장본인이 바로 권연희라는 점이 그렇다. 재벌집 따님이라더니, 아가씨 소리를 듣는 모습이 퍽 자연스러워 보였다. 나는 여전히 얼굴이 새빨간 김석진에게 손 한쪽을 붙잡힌 채 '재벌집 외동딸' 역할을 아주 충실하게 해내는 권연희의 모습을 구경했다.
"여, 연희 아가씨! 제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게 다 아, 아가씨를 위한…!"
"날 위한 거다?"
"예, 예, 당연한-,"
"이게?"
…암만 봐도 내가 기억하던 권연희의 모습은 아니었다. 외적인 모습이든, 내적인 모습이든.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권연희는 저런 위압감을 뿜어낼 만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뭐, 그게 몇 년이나 지난 일이란 사실을 되새겨본다면, 어쩌면 지금 내 앞에서 위압감을 풀풀 풍기며 조폭 아저씨들을 무릎 꿇려놓은 권연희의 모습도 내가 모르던 권연희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긴 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주인을 무는 개는 필요 없어."
존나 멋있다. 새카만 머리를 질끈 묶으며 말하는 권연희를 보며 생각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내 앞에 있는 권연희나 내가 기억하고 있던 권연희나 둘 다 같은 사람이란 사실이었다. 개 멋있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권연희가 데려온 정장 아저씨 무리들이 조폭 아저씨 무리들을 잡아가며 납치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온 김태형과 김여주, 이 소설의 남주와 여주의 재회도 그들의 뜨거운 포옹으로 성공적으로 끝났다 (놀랍게도 아직 사귀는 사이가 아니다). 조금 놀란 것일 뿐, 별다른 외상은 없는 김여주와는 다르게 또 꼴사납게 산길에서 구른 나는 권연희의 차를 빌려타고 그의 집까지 가서 권연희의 담당 의사라는 분에게 산에서 넘어진 탓에 까진 무릎과 손바닥,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벗긴다고 살짝 쓸린 탓에 생긴 관자놀이 부근의 아주 얕은 상처까지 전부 다 치료받았다. 게다가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말 한마디와 권연희네 아버지(무려 K 기업의 회장이라는…)의 전화 한 통에 다음날의 등교까지 싹 취소된 채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
"……."
권연희의 집에서.
"…팩이라도 할래?"
"…그래."
마스크팩을 얼굴에 꼼꼼히 붙였다. 권연희가 빌려준 체크무늬 잠옷을 입고, 나란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내내 어색한 공기만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하루아침에 죽이고 싶을 만큼 짜증 나는 애에서 같이 파자마 파티를 할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면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어색함이었다. …김여주나 이유진이라도 있었으면 이 어색함이 덜했을까? …아닐지도?
"…미안."
난데없는 사과에 눈동자만 도르륵-, 굴려 권연희를 쳐다보았다.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천장만 바라보며 권연희는 다시 한번 말했다. 미안해. 하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권연희를 쳐다보았다. 뭐가? 하는 내 물음에 권연희도 고개를 돌렸다.
"…그간 너한테 했던 것들 전부. 제대로 사과한 적 없는 것 같아서."
"뭐, 네가 야산에서 민거, 아니면 횡단보도에서 넘어뜨린 거, 아님 화분 던진 거, 아니면 지우개 똥 던진 거?"
"……."
"농담이야. 괜찮아."
찔리라고 한 말이긴 한데, 권연희가 진짜 찔려 하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입을 꾹 다문 권연희를 보며 서둘러 농담이라는 말을 덧붙이자, 권연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마스크팩 아래에 있는 표정이 다 드러날 정도라면, 진짜로 어이없긴 했나 보다. 괜히 분위기만 더 싸하게 만든 것 같아 괜히 말했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이어질 권연희의 말을 기다렸다.
"…그래, 그거 전부 다. 미안해. 그리고 오늘 일도.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 정말 너 납치하려고 한거 아니야. 그냥, 그냥…,"
"알아, 믿어. 네가 시킨 거 아닌 거 알아."
"…어떻게?"
나는 고민했다. 컨테이너에 갇혀있는 동안 들었던 얘기를 권연희에게 해야 할까. 자기가 탄생시킨 캐릭터들이 이렇게나 멍청하다는 사실에 새삼 충격받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납치 이후, 컨테이너에서 수상한 남자 둘이 나누었던 이야기를 비롯한 내 생각들 모두.
"…아무튼, 그래서 네가 시킨 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
"……."
이야기를 듣는 내내, 권연희의 표정은 수도 없이 바뀌었다. 수치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이야기가 끝나고 내려앉은 정적이 당연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괜히 말했나? 옆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아니었으면 괜히 말했단 생각을 백 번쯤 더 했을 것이다.
권연희는 한참을 웃었다. 멍하니 그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나도 웃음이 피식피식 났다. 계속 웃음이 났다. 대략 10분가량을 웃는데만 쓸 정도로 말이다. 권연희가 침대에 뉘었던 몸을 일으켰다. 마스크팩을 떼어낸 그가 웃느라 눈꼬리에 고였던 눈물을 닦아냈다. 나도 얼굴에 붙였던 팩을 떼어냈다. 대충 쓰레기통이 있던 것 같은 자리에 뭉친 팩을 집어던졌다. 빗나갔는지 철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권연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런다고 내가 몸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볼펜으로 그려진 낙서를 지우개로 지워버릴 수 없듯, 이미 지나온 일들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없던 일로 친다 할지언정, 지우개로 지워버린 곳에도 자국이 남는 것처럼 어떻게든 그 흔적을 남기고야 말 것이었다. 그렇다고 낙서를 평생 달고 살 필요야 없는 것이었다. 낙서 위에 그려진 그림이 훨씬 더 아름다울 수도 있는 법 아닌가. 진짜 고등학생들처럼 엎치락뒤치락 하며 격 없이 뒹굴진 못했지만, 우리는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령 이 소설에 관한 것이라던가, 권연희가 알고 있던 원래 세계에서의 남주인공 네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하는 것들을 말이다.
"현실로는… 소설이 완결 나면 자연스럽게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뭐,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지. …근데 이 소설 완결도 났었냐?"
"……."
"뭐, 어차피 작가는 너니까 상관없지만."
"현실에선 뭐 하고 지냈어?"
"나? 그냥 대학 다니고, 취업 준비하고…. 남들이랑 별다를 거 없이 지냈는데."
"의외다. 넌 뭔가… 좀 남다른 일을 할 것 같았는데."
"예를 들면?"
"…조직 보스라던가?"
"…칭찬 맞지?"
대답 없이 키득키득 웃기만 하는 권연희의 머리카락을 쭉 잡아당겼다. 악! 하며 손을 더듬거리던 권연희가 내 머리카락을 쥐곤 주욱-, 잡아당겼다. 고개가 꺾였다. 머리가 가까이 맞닿았다.
"너는 어떻게 지냈는데?"
"…나는, 글쎄…."
"……."
"평범하게 지냈던 것 같기도 하고, 방황했던 것 같기도 하고."
"……."
"잘 모르겠어."
권연희의 머리카락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계속해서 잡아당겨지던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권연희도 마찬가지였다. 방 안에는 침묵만이 가득했지만, 아까와는 달리 어색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은 침묵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그 고요를 즐겼다. 각자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채로.
"넌 여기 남고 싶은가 보네."
"…응, 그럴지도?"
"음, 나쁘지 않지. 일단 여기선 재벌집 딸이기도 하고, 학교도 나름 재미있고, 친구는 없지만. 일단 네가 환장하는 잘생긴 사람이 한가득이고…."
"야."
"농담. 아무튼,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봐. 어차피 네 인생인데 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너도 소설 속에 남을 거야?"
"아니? 난 돌아갈 건데. 이왕이면 완결 좀 빨리 내주라. 100일을 소설 속에서 맞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
권연희가 베개를 휘둘렀다. 눈을 뾰족하게 뜨고는 얄미워 죽겠다며 소리 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졸지에 베개에 얻어맞게 된 내가 코를 감싸 쥐었다. 와, 개 아파. 코를 붙잡고 얼굴을 찡그린 내 모습을 보며 권연희가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한 손으로 베개를 붙잡고 휘둘렀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권연희가 옆으로 넘어졌다. 푹신한 침대 위에서 한참을 그렇게 어린애들처럼 놀던 우리는 새벽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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