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가 조금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썼습니다.
- 대체 무슨 글인지 작가도 모릅니다.
- 왜 썼는지 작가도 모릅니다.
- 클리셰 덩어리입니다.
- 가볍게 읽어주세요... 어차피 개연성 개나 준 엉망진창인 글입니다...
- 여주의 원래 이름이 나오는 부분은 일부러 비워뒀습니다. 독자님들 이름 넣어서 읽으시면 될듯...
-TRIGGER WARNING! 2010년대 초에 유행하던 인터넷 소설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폭력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엑스트라로 살아남는 법
:어느 날 소설 속 엑스트라가 되어버렸습니다.
W. 그쁨
뭐든지 다 알아서 척척해내는 김여주가 실은 연애 고자였다. 당장 김태형과 김여주의 연애를 성사시켜야 하는 우리 입장에선 이보다 더 곤란한 일은 없으리라. 온갖 가지 방법들을 다 시도해 보다가도 결국 '시간이 답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열흘, 고작 열흘이었다. 단 열흘 만에 우리는 김여주와 김태형 앞에 두 손 두 발을 다 든 채 항복을 외쳐야만 했다.
지난 열흘간 정말 별 짓을 다 했다. 바람잡이 역할은 물론이고, 일부러 김태형과 김여주 둘만 남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하고, 김여주에게 김태형에 대한 온갖 가지 티엠아이들을 쏟아내며 김여주의 관심을 사려 아등바등하기도 했다. 정말 눈물겨운 노력이 아닐 수가 없는데도 우리의 여주인공, 김여주는 한결같았다. 한결같이 김태형에게 이성으로서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권연희의 말에 따르면 김여주도 김태형에게 어느 정도의 호감이 쌓여있는 상태라고는 하는데, 글쎄, 김여주의 모습만 보자면 그런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는 탓에 더욱 눈앞이 캄캄해졌다. 특히나, 온갖 방법을 고민하다 웃기지도 않은 사고 하나를 친 뒤에는 더더욱 그랬다.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만만이었다. 망할.
그러니까, 그 '사고'라 함은, 내가 소설 속으로 떨어진 뒤 여주인공이 겪을법한 납치, 감금과 같은 중범죄스러운 일들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되려 그런 것들보단 흑역사에 더 가까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젠장, 그 일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목덜미에 열이 오르는 것 같은데 오죽할까. 아무튼, 그 일이 일어난 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매우 평온한 날들 중 하나였다. 점심을 먹은 뒤 운동장 스탠드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매점에서 털어온 간식을 먹는, 아주 평범한 하루. 김여주와 김태형을 조금이라도 빨리 이어주기 위해 둘만 버려두고 달리기 시합이랍시고 스탠드까지 우다다-, 달려간 것까지 그랬다. 나 화장실-, 하며 이유진이 잠시 자리를 뜨자마자 나를 포함한 빙의자 다섯은 저 멀리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오는 예비 커플 한 쌍을 보며 깊은 시름에 잠겼다.
"…무슨 방법 없냐?"
"이 짓도 벌써 4일짼데 어떻게 저렇게 진전이 없을 수 있지?"
"우리한테나 4일이지, 쟤네한테는 벌써 2주가 넘었거든…."
"그럼 더 심각한 거 아니냐…, 저러다 썸만 2년 타겠는데, 진짜로."
"야, 닥쳐. 말이 씨가 되는 수가 있으니까."
암울하기 짝이 없는 대화에 한숨만 푹 내쉬었다. 저렇게 잘 어울리는데. 중얼거리는 내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김태형과 김여주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선남선녀. 그러니 이제 우리 속 좀 그만 썩이고 이만 사귀면 좋으련만.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두 사람을 보며 생각했다.
"연주야! 이거 새로 나온 젤ㄹ, 엇,"
"어, 야! 김여주!"
김여주의 몸이 기우뚱하는 것을 보며 식겁한 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계단 형식으로 되어있는 운동장 스탠드는 그 경사가 꽤 높은 편이었다. 그러니 이대로 김여주가 굴러떨어진다면 크게 다칠 것이다. 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거리가 있던 탓에 내가 김여주를 붙잡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고에 다들 동공만 키우고 있던 차에 넘어지려던 김여주를 잡아챈 것은 김태형이었다.
'김태형이 김여주의 손목을 잡았다. 꺅! 하며 김여주가 비명을 질렀다.'
때마침 꺄악-, 하는 김여주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렇게 위험한 장면이었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문장 하나에 나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권연희를 쳐다보았다. 뭐, 하는 입모양을 만들어낸 권연희가 손가락으로 김태형을 가리켰다. 잡았으니 됐잖아, 하는듯한 그 모습에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다시금 자리에 주저앉았다. 권연희의 말대로 김여주는 어느새 김태형의 품 속에 아주 꼬옥, 안겨있는 채였다.
"이런 장면이라곤 말 안 했잖아."
"제대로 읽었어야지. 그리고, 이런 장면이 쌓이고 쌓여야 김여주가 김태형을 좀 다르게 보는 계기가 되거든…."
"……."
"…아니면 사귀는 건 택도 없어…."
…맞는 말이라 눈물이 날 것 같다. 어쨌건, 꼭 이렇게 위험한 요소가 아니어도 되지 않느냔 말로 이런 장면들은 좀 자제해달란 내 말에 권연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지 뭐, 하는 떨떠름한 대답과 함께. 찝찝한 표정으로 권연희를 쳐다보았다. 모른 척 젤리만 뇸뇸 먹는 모습이 어째 얄미웠다. 그마저도 김태형의 부축을 받으며 내 옆자리에 앉는 김여주 덕에 시선을 떼어내야 했지만. 안 다쳤어? 하는 내 말에 깜짝 놀라긴 했지만 괜찮다며 조잘대는 김여주를 보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무언가를 새카맣게 잊어먹은 듯한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찌푸러진 미간에 김석진의 기다란 손가락이 닿았다.
"왜 인상을 써."
"아니…, 뭘 까먹은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김석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요한 거냐 묻는 그 말엔 눈썹만 찌푸렸다.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왠지 까먹어선 안될 걸 까먹은 그런 느낌이랄까. 찝찝함이 남달랐다. 그래도 기억도 못 하는 걸 하루 온종일 붙잡고 끙끙댈 수는 없는 법인지라, 나는 별일 아니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찝찝함을 넘겨버렸다. 그게 문제였다.
점심시간이 다 끝나갈 때쯤 되어서야 스탠드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등줄기에 오싹한 소름이 돋아났다. 어라? 할 틈도 없이 굉장히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느낌이 대체 뭔지 알아챌 새도 없이 내 몸이 빙글-, 돌려세워졌다. 뭐야, 왜 이래? 할 틈도 없이 몸이 마구잡이로 움직였다. 그리고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문장 하나가 있었다. 권연희가 대충 휘갈겼던 문장 하나.
'김연주가 김석진의 볼에 입을 맞췄다.'
…야 이건 좀 아니지!! 안 지웠냐?!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모두가 당황스럽단 표정으로 쳐다볼 동안,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을 한 사람은 권연희밖에 없었다. 이, 이, 너 다 알면서…! 당장에라도 욕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이미 내 통제에서 벗어난 몸뚱이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대로 김석진에게로 돌진했다. 당황스럽단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던 건 김석진도 마찬가지였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그 또한 눈치챈 것 같았지만, 이미 늦었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망할. 이미 쓰인 문장을 벗어날 방법은 없었기에,
쪼옥-,
-하는 남사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시발,"
김석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몸이 다시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다들 벙 쪄서는 나와 김석진만 쳐다보고 있는 꼴이 부담스럽고 수치스러워 당장에라도 쥐구멍을 찾아 헤매고픈 심정이었으나, 그보다는 얼굴에 재밌어 죽겠다고 써놓은 채 웃음을 눌러 참는 권연희를 응징하는 게 먼저였다.
"푸하학-,"
"…야, 너 이리 와!!!"
"크흡…."
권연희의 웃음소리를 시작으로 전정국이 꾹 눌러 담은 웃음을 흘렸다. 아, 망할. 뭐라 할 새도 없이 웃음판이 되어버린 탓에 수치스러움은 배가 됐다. 박지민이 숨넘어가게 웃어댔다. 난데없이 웬 염장질이냐며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외치는 박지민의 입에 뭐라도 쑤셔 넣어 다물게 하고 싶은 생각이 가득했으나,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권연희를 뒤쫓는 것만으로도 내 몸뚱이는 바빴다. 수치스럽다, 젠장.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 📗 📕
"그런 일도 있었지…."
고작 엿새 전의 일이었는데도 한참 오래전의 일을 떠올리는 듯한 박지민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냉담한 반응에도 싱글벙글하며 숨 멎기 직전까지 두고두고 놀려먹을 거란 박지민의 말에는 결국 쿠션을 내던져야 했지만. 작작해라. 짜증이 한껏 담긴 목소리로 박지민을 향해 경고를 날렸지만, 그런 말을 들어 처먹을 박지민이 아니었다. 젠장.
여전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럽기 짝이 없어 양 볼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듯한 착각을 주는 경험이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 일로 김여주가 '연애'라는 것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있었다. 왜, 원래 남의 연애가 제일 재밌는 법이라고, 누군가가 연애하는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연애 세포가 살아나는 경우도 왕왕 있지 않은가. 해서 기대했다. 혹시라도 김여주가 '연애'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진 않았을까. 뭐, 물론 볼뽀뽀 한 번 했다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좀 웃기긴 했지만…,
"…뭐 좀 써지긴 해?"
"아니? 전혀?"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공책과 씨름하는 권연희가 짜증을 가득 담아 내뱉은 대답에 나는 주섬주섬 주워온 쿠션에 다시 머리를 박았다. 여전히 썼다 하면 틈새에 지워지는 '김여주는 김태형을 좋아한다'라는 문장 하나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제 분에 못 이겨 공책을 냅다 집어던진 권연희가 씩씩거렸다. 뭐, 애초에 저 문장을 백번 써서 만들어질 감정이었으면 진즉 김태형과 김여주가 사귀고도 남았을 것이다. 공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써대던 문장이었으니 말이다.
"아오, 뭐라도 좀 해봐!!"
분통이 터진단 표정으로 바락 악을 쓰는 권연희의 모습에도 거실에 있던 이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열흘이었다. 무려 열흘. 그것도 우리의 시간으로만 열흘이었지, 김여주의 시간으로 따지자면 거의 한 달하고도 2주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셈이었다. 하복을 벗고 춘추복을 꺼내 입고, 곧 있으면 패딩을 꺼내 입을 계절이 오는데도 여전히! 김여주는 철벽 그 자체였다.
"못 해, 안 해. 김여주 걘 그냥 천연이 아니야."
"걔가 천연이 아니면 대체 뭔데,"
"철벽이지, 철벽.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철벽"
"하……."
넘치다 못해 터져버린 김태형의 애정이 고스란히 김여주에게로 향하고 있단 사실은 지나가던 고양이도 눈꼴 시리다고 혀를 차고 갈 만큼 뚜렷했다. 근데도 김여주는 모른다. 정작 그 사실을 가장 알아야 할 사람은 모른다. 제일 중요한 사람은 모르고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보통 이런 경우엔, 옆에 있는 친구가 '에이, 그 정도면 너도 걔 좋아하는 거지~', 하는 뉘앙스만 풍겨도 '어, 그런가?'싶은 마음이 들 텐데, 김여주는 그 모든 법칙을 깨부수고야 만다. 강철을 넘어 오리하르콘급의 철벽이 아니라면 해낼 수 없는 일을 오리하르콘 철벽을 가진 김여주가 해낸다. 남들 눈엔 다 보이는 애정이 제 것이 아니라 단정 짓는 탓이었다. 애초부터 김태형과 김여주 저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감정은 우정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애정일 뿐이라 단정 지어버리곤 그 이상을 넘볼 생각도 않는 것이었다. 덕분에 속이 터지는 건 우리였다. '김여주는 김태형을 좋아해'. 그 사실을 좀 깨닫게 해주기 위해 흘렸던 온갖 말들에 대한 반응이-
"여주는 김태형 어때?"
"태형이? 좋은 친구지?"
친구라고 선을 긋는 것뿐만 아니라,
"여주는 김태형 보면서 멋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응? 태형이 멋있지-,"
"그치, 멋있지?"
"응! 헉, 혹시 연주 너 태형이 좋아해?!"
"…미쳤어?"
김석진과 멀쩡히 사귀고 있는 와중에 저런 오해를 한번 받고 나니 의욕이 다 사그라드는 것이었다. 못해 이건. 김여주가 제 감정 깨닫게 하기. 이 퀘스트 완료 보상이 현실 세계로 즉시 귀환이라 해도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아 헤맬 것이었다. 절대 못 깰게 분명하니까. 소파에 늘어진 채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이제는 김여주의 철벽에 뭉개지다 못해 갈기갈기 찢기기 직전인 김태형의 순정이 안타까워 울어야 될는지, 고3이라는 지옥 같은 1년을 한 번 더 보내게 생긴 날 위해 울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주방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던 김석진이 쟁반을 들고 나왔다. 김이 폴폴 솟아오르는 머그컵 중 하나를 내게 건네곤 나머지는 테이블 위로 대충 올려버린다. 달달한 향이 풍겼다. 마시멜로가 둥둥 띄워진 핫초코에 저절로 구깃 했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호록, 하는 소리를 내며 핫초코를 한입 머금었다. 단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어차피 이어질 애들이면 우리가 굳이 뭘 하려고 나설 필요는 없지 않을까?"
달큼한 향에 이끌려 좀비떼처럼 테이블로 슬금슬금 다가오던 이들의 눈빛이 김석진에게 박혔다. 대부분이 무슨 개소리냐는 듯한 표정인지라, 김석진이 흠칫 몸을 떨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고3을 진정 겪고 싶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순 없잖아."
가장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한 전정국이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우리의 현실은 이곳이 아니다. 하루라도 더 빨리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더 빨리 김태형과 김여주를 이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완결이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지. 혹시나 소설이 끝났는데도 여전히 여기 남아있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기도 하고. 전정국의 말에 김석진이 머쓱한 표정으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당연히 마냥 기다리자는 말이 아니라…, 시간을 뛰어넘는 방법도 있지 않나 해서."
"…어?"
"왜, 우리 여름방학 때처럼 말이야."
누군가가 들었다면 이게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인가-, 하겠으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김석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긴 정적이 흘렀다. 각자 머릿속으로 갖가지 계산을 끝낸 이들이 서로의 눈을 마주했다.
이거다, 정답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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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반쯤 성공했다. 권연희에 말에 따르면, 원래 김태형과 김여주가 이어지는 날은 우리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라 했다. 그러니 우리의 목표 또한 자연스럽게 고등학교 졸업식 날로 시간을 건너뛰는 것으로 정해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그렇게 졸업식 날이 되었다'라는 문장 하나만으로 2년 반이라는 시간을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했다. 개연성을 어느 정도 신경 쓰되, 넘길 수 있는 시간은 팍팍 넘겨버리는 것이 최선이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첫 번째로, 세 달이란 시간을 뛰어넘었다.
"연주야!! 반 배정 봤어?! 우리 또 같은 반이야!! 유진이도!!"
"어어, 봤어, 연희는?"
"앗, 연희는 다른 반이야…."
"이게 치사하게…!"
더 이상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다. 이건 권연희와 내가 이 소설이 전개되는 내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왕 전개 다 뛰어넘는 거, 김여주랑 남주인공들만 같은 반에 몰아넣고 우리는 다른 반하면 안 되냐? 하며 권연희를 살살 꼬드겼건만은, 치사하게 나를 포함해서!! 김여주와 남주인공들을 2학년 1반에 몰아넣고, 저는 2학년 7반에 홀로 떨어지는 만행을 저지른 권연희 덕에 나는 또 정신없는 한 해를 보내야 했다. 뭐, 말이 좋아 1년이지, 정작 우리가 은하별 고등학교의 2학년으로써 지냈던 시간은 며칠 남짓이었다. 소설에서 시간이 너무 훅훅 지나가는 것도 안 좋다며 간간이 주가 되는 사건이 일어난 날만 제대로 보냈다.
"이번에 영어 너무 어려웠다, 그치…."
"…권연희 진짜 가만 안 둔다, 내가."
반 배정 다음 날 바로 중간고사로 뛰어넘는 탓에 시험문제의 반을 연필을 굴려야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권연희 이거, 백 프로 일부러 그런 거다. 물론 원래 같았어도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지는 않았을 거지만, 하필이면 중간고사 날로 타임워프를 시키는 인성은 대체 뭐란 말인가. 비가 내리는 시험지를 들고 하교했다가 엄마에게 등짝을 수없이 맞아야 했던 것도 다 권연희 때문이다. 망할!
여름방학은 조용히 지나갔다. 일전의 여름방학이 눈 깜짝할 새 사라졌던 것처럼, 이번에도 별다를 것 없이 방학식 바로 다음날이 개학식 되시겠다. 어쨌거나 우리의 목적은 빠른 완결이었기 때문에 2학년 2학기라고 해서 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한 학기가 단 며칠 만에 끝났다. 수련회와 제2의 김여주 납치 사건(김태형에 대한 김여주의 호감도를 올려야 하기 때문에 꼭 넣어야 하는 이야기라고 권연희가 고집을 부렸다.)을 제외한 나머지 날들은 우리가 직접 겪지 못한 날들이 되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고작 3주였다. 약 20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 우리는 3학년이 되었다.
"있잖아, 나, …태형이 좋아하는 것 같아…!"
이쯤 되니 1년이나 빠르게 이 말을 들은 권연희와 내가 울먹이며 콧잔등을 부여잡은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길고 긴 싸움이었다.
김여주가 김태형을 좋아하기 시작했다고 해서 내 엑스트라 인생이 곧바로 끝나는 건 아니었다. 소설의 완결은 둘이 교제를 시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김여주가 김태형을 좋아한다는 나름의 폭탄 발언을 들은 후에도 나는 -가 아니라 김연주로서 남아있었다. 사귀는 데 얼마나 걸릴까, 하는 걱정이 앞서긴 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씻은 듯이 사라질 걱정이었다. 어쩐지 김여주의 말을 들은 뒤부터 권연희의 얼굴에서 근심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가 없더니만은, 이제부턴 속전속결이라는 권연희의 말을 나는 머지않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만일 이 소설의 여주인공인 김여주가 고구마 백 개를 목구멍에 쑤셔 넣고 사이다 한 방울을 줄까 말까 하는 류의 여주인공이었더라면, 아마도 우리는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활을 결국 억지로 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여주인공 김여주는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깨달은 순간부터 브레이크가 고장 난 스포츠카처럼 굴었다. 오직 직진만이 답이다-, 하는 것처럼 무작정 들이밀었다. 김여주가 우리에게 김태형을 좋아한단 사실을 털어놓은지 겨우 3일이 되던 날에, 두 사람이 연애를 시작했다. 그것도 김여주 주도 하에. '태형이 너랑 연애하고 싶어!' 분위기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그저 제 감정만이 앞선 고백이었지만 김태형의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말이었다. 고백마저도 너무나도 김여주다웠기에 더 그랬다.
그렇게, 우리는 이 소설의 종장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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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하고 있겠지? 또 이상한 일에 휘말려서 데이트 파토나는건 아니겠지…?"
"제발 진정 좀 해. 손톱 그만 물어뜯고. 니가 김여주 엄마냐?"
"네 다리나 좀 어떻게 하고 말하시지? 지진 난 줄 알았거든?"
마지막은 그저 기다림뿐이었다. 자주 가던 카페의 구석자리에 5명이 모여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여주는 데이트 잘 하고 있을까' 하며 몇 번의 걱정을 하는, 기다림.
"돌아가면 뭐 하지. 스X이더맨 4 개봉한댔는데 이미 개봉했겠지…?"
"난 드라마… 몰아봐야지…."
"난 맥주 먹고 싶어…."
박지민이 테이블에 엎어지며 하는 말에 모두가 침을 꼴깍, 삼켰다. 하필이면 빙의해도 고등학생으로 빙의한 탓에, 빙의한 뒤로는 강제 금주 생활을 이어나가던 차였다. 아, 인생아. 그간 겪은 일들을 생각해 보면 알코올 한 방울 없이 그 모든 것을 버텨낸 게 신기하다 싶으면서도, 맥주 한 모금이 그렇게 간절해지곤 하는 것이었다.
"나가서도 모여서 술 한잔하면 좋겠다."
"좋지-, 안줏거리는 진짜 차고 넘치겠네."
"여기서 있었던 일만 해도 몇 개냐."
"권연희는 우리 술자리 가질 때마다 이불킥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솔직히 이 세상 자체가 권연희 흑역사 모음집인데."
"야아!!"
"아~ 그치그치~, 여기 작가님이시잖아~!"
"아오, 얄미워!!"
"이렇게 다 모일 필요도 없이 나랑 김여주만 모이면…, …아…."
침묵. 그 누구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아, 그치. 여주는, 없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인데 막상 입 밖으로 내뱉고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의 현실에 김여주는 없다. 더불어 이유진도. 내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본 김석진이 내 손을 슬그머니 붙잡아왔다.
"아니지, 김여주는 '다 지난 일이니까 괜찮아~' 그러겠지. 연주 너만 권연희 죽어라 놀려댈걸,"
안 그래? 김석진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도 단단하게 맞잡은 손에 힘을 꾹 준다. 마치 걱정할 것 하나 없다는 듯이, 자기가 여기 있으니 괜찮다고 말하듯이. 가라앉았던 분위기는 전정국의 웃음소리를 시작으로 다시금 떠오른다. 권연희를 놀리는데 누구보다 진심인 박지민이 깐족거리기 시작하니 권연희가 바득바득 성질을 부린다. 나도 웃음을 터트렸다. 억지로 지어내는 웃음은 결코 아니었다. 김석진의 어깨에 머리를 살포시 기댔다. 이제는 몸까지 일으켜가며 장난치는 이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김여주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는.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 김여주는 여기서도 충분히 행복할 테니까. 귓가에 김석진의 나긋한 음성이 달라붙는다.
"괜찮아."
"……."
"난 계속 네 옆에 있을 거야."
그거면 충분했다.
때늦은 저녁을 위해 장소를 옮기면서도, 김여주도, 이유진도 불러내자 고집을 피우는 박지민에 결국 핸드폰을 들었다. 저녁을 같이 먹지 않겠냔 내 말에 기뻐하며 금방 오겠단 대답을 내놓은 김여주와, 말한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츄리닝에 슬리퍼만 질질 끌고 나온 이유진을 데리고 우리는 근처의 고깃집으로 들어섰다.
"이모!! 여기 삼겹살 10인분이랑 쏘ㅈ, 으읍,"
"사이다! 사이다요! 콜라랑요!"
교복을 입은 채 당당히 소주를 주문하려다 권연희에게 입이 틀어막혀진 박지민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버릇이 무섭다고, 현실에서야 거리낌 없이 음주를 즐길 합법적인 나이라지만 여기선 한낱 고등학생인걸. 주문을 받은 주인아주머니가 우리를 비행청소년 보듯 하는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우리는 열심히 고기만 구웠다. 종종 소주가 그립다는 박지민의 입을 틀어막아야 하긴 했지만.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술 없이도 충분히 달아올랐다.
뒤늦게 도착한 김태형과 김여주에게 데이트는 잘 했냐며 놀려먹기 시작한 이후로는 더 그랬다.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마냥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김태형과, 배시시 웃는 김여주의 모습은 너무나도 커플의 그것이었다. 첫 데이트에 키스는 했냐 묻는 박지민의 입이 다시 권연희의 손에 틀어막히기도 했다. 언제는 우리더러 주책바가지 같다더니, 이번엔 자기가 한술 더 뜬다. 여덟 명이 다 같이 모인 자리는 그랬다. 모두가 들떠있었고, 모두가 시끌시끌하게 떠들어댄다.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다섯 명의 속 깊숙이 묻어둔 채로.
부른 배를 부여잡고 어둑어둑해진 밤거리를 다 같이 걸을 때도 그랬다. 자연스레 학교 가기 싫다 말하는 꼴이 영락없는 고등학생들의 모습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뒤에서 조용히 걸었다. 싱숭생숭하다. 시끌벅적하게 앞서나가는 박지민과 권연희, 이유진, 그리고 전정국과 김석진의 뒤로 김태형과 김여주가 조용히 따라붙는다. 맞잡은 손이 보기 좋아 보였다. 역시 잘 어울린다. 김여주가 김태형의 팔을 잡아당겼다. 자연스레 김여주 쪽으로 몸을 숙인 김태형에게 김여주가 무어라 소곤거렸다. 김태형이 작게 웃곤 김여주의 손을 놓았다. 김여주는 잠깐 멈칫하는가 싶더니 걷는 속도를 줄였다. 날 보며 말갛게 웃었다, 연주! 하면서. 자연스레 팔짱을 끼는 모습이 애교스러웠다.
"무슨 생각 해?"
"내일 학교 가기 싫단 생각?"
"그러고 보니까 교복이네!"
"아, 응. 어쩌다 보니까. …내일까지 고기 냄새 안 빠지는 거 아니겠지?"
내 말에 김여주가 꺄르르-, 웃는다. 그러고는 평소와 다름없이 조잘거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내뱉는다. 개중에는 오늘 있었던 김태형과의 데이트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는데, 박지민의 짓궂은 장난에도 태연하게 굴었던 아까와는 달리 귓바퀴가 살짝 붉어져있었다. 귀엽기는, 작게 웃으며 김여주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랬어? 하면서. 그럼 김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평소와 같았다.
"여주야,"
"응?"
"행복해?"
그래서 더 충동적이었다. 김여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도 잠시 이내 눈꼬리를 사르르 접으며 웃어 보였다. 어쩐지 그 모습만 봐도 대답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안심이었다. 응. 하며 김여주가 말했다. 나 행복해. 그럼 됐다. 김여주는 여기서 행복할 것이다. 이번에는 추측이 아닌, 확신이었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번에도 억지웃음은 아니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땐, 낯선 천장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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