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로 살아남는 법

# 20 (끝)

- 작가가 조금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썼습니다.

- 대체 무슨 글인지 작가도 모릅니다.

- 왜 썼는지 작가도 모릅니다.

- 클리셰 덩어리입니다.

- 가볍게 읽어주세요... 어차피 개연성 개나 준 엉망진창인 글입니다...

- 여주의 원래 이름이 나오는 부분은 일부러 비워뒀습니다. 독자님들 이름 넣어서 읽으시면 될듯...

-TRIGGER WARNING! 2010년대 초에 유행하던 인터넷 소설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폭력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엑스트라로 살아남는 법

: 어느 날 소설 속 엑스트라가 되어버렸습니다.

W. 그쁨





김연주 결혼 선언, 이 웃기지도 않은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간단했다.

“너…! 이…! 아오…!”

“…아니, 나야 너네가 사귀고 있는 게 너무 당연한 거였으니까, 미처 생각을 못 했지….”

“그걸 변명이라고…!”

‘김연주와 김석진이 사귄다.’ 이 간단한 문장을 공책에 적는 걸 잊어버린 권연희의 탓이 제일 컸다. 저 문장 한 줄을 안 썼다고 소설 속 세계의 김연주와 김석진이 친구로 남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졸지에 친구와 단둘이 데이트를 하고, 친구들의 앞에서 친구에게 볼 뽀뽀한 파렴치한이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그 친구가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까지 하는 쓰레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젠장. 이게 어장이 아니면 뭔데? 졸지에 어장 속 물고기가 된 김석진에게 '물고기가 된 소감은?'이라며 깝죽대는 박지민의 말을 듣다못해 폭발한 나는-,

"이거 다 어쩔 거야!!"

-권연희의 멱살을 잡고야 말았다.

지은 죄가 있는 터라, 차마 날 떨쳐내진 못하고 얌전히 멱살을 내준 권연희와, 그런 권연희의 멱살을 잡고 짤짤짤 털어대는 나를 김석진이 겨우 진정시켰다. 빨리 방법을 강구해 내라는 김석진의 절실한 눈빛에 권연희가 눈동자를 도로록-, 굴렸다.

“…아! 방법! 방법은 있어!”

권연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고선 메고 온 가방에서 익숙한 것을 꺼내드는 것이었다. 낡은 공책과 볼펜 하나. 김석진이 겨우 붙잡고 있는 내게 그것들을 내보이며 말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얼마든지 고칠 수 있으니까!”

그 말에 조금 진정했다. 생판 모르는 남이랑 결혼할 일은 없겠다 싶어서.

방법을 찾았다 해서 단번에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이미 동창들 사이에 쫙 소문이 난 결혼을 어떻게 무마시킬 것인가. 약혼 한 것과 다름없는 사이에, 무작정 결혼을 없던 일로 하자고 찡찡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냅다 헤어지고 보자는 박지민의 말에는 고개를 저었다.

“눈 떴을 때, 김연주가 혼자 살던 집이 보이는데…, 왠지, 진짜 김연주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과몰입인가? 아무튼, 김연주에게 손해일 짓은 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소설 속일 뿐인데 뭘 그렇게 신경 쓰냐는 말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여기 있는 이들 모두 비슷한 상황을 겪었기 때문이겠지. 딱 한 명만이 다른 반응을 보였다. 권연희는 내 말을 듣더니, 세상 사악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걱정 마, 설마 내가 널 쓰레기로 만들까?”

“…야, 네가 그러니까 어째 더 불안한데?”

“뭐가 불안해! 네가 쓰레기가 되기 싫으면 다른 쪽을 쓰레기로 만들면 되잖아!”

이렇게 간단할 수가 없다며 룰루랄라 공책을 펼쳐드는 권연희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양심이 좀 아파오는 느낌이었다. …이래도 되나? 싶더라. 물론 그 죄책감은 내 옷자락을 소심하게 붙잡는 김석진에 의해 온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래, 내가 얠 두고 뭐 하러 다른 남자랑. 이름도, 얼굴도 모를 김연주의 약혼자에게 짧은 애도를 표했다.

신이 나서 글씨를 휘갈기던 권연희는 앉아있던 그 자리에서 김연주의 파혼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엄청난 속도에 다들 입을 열 생각도 못 한 채 구경만 했더랬다. 자, 이 정도면 결혼은 파토나고도 남을걸-, 하며 내미는 공책을 받아들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글을 읽어내리는 동안 네 명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이거 쓰레기네, 하는 말이 저절로 나올 만큼 몰입했다. 말도 안 되는 전개에 멍하니 있던 우리 대신 전정국이 딱 한마디 했다.

“…너 아침드라마 작가로 데뷔하는 거 한번 생각해 봐.”

권연희가 빵 터져서는 테이블을 내리치며 웃었다.

그리고 얼마 뒤, 내 결혼은 정말로 파토났다.

소설 속 세계에서 작가로 살아가기란 얼마나 편한가. 문장 한 줄만 끄적이면 대부분의 일이 현실이 되는데. 난장판이 된 결혼식장을 보며 생각했다. 잔뜩 당황한 사회자, 웅성거리며 반쯤 몸을 일으킨 채 이곳을 보고 있는 하객들, 그리고,

“윽, 이거 놔…!”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나만 사랑하겠다며…!”

대사 누가 썼냐. 아, 권연희였지.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내 앞에서 머리채가 쥐어뜯어지는 예비 신랑(진짜 신랑이 되는 일은 없겠지만)을 짜게 식은 눈으로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애가 그동안 막장 드라마를 너무 열심히 본 것 같다. 신부 측 하객석에서 박수까지 치며 웃고 있는 권연희를 보며 생각했다. 주변 어른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뻔뻔스레 웃는 모습이 얄미웠다.

난장판이 된 결혼식의 사정은 이러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앞으로 이어나갈 결혼생활에 들떠있는 예비 신부 김연주, 그리고 불안한 마음을 안고 결혼식에 참석한 예비 신랑 원준우. 그리고 예비 신랑의 불안은 신부 입장과 동시에 현실이 되고야 마는데…

아침드라마 한 편 뚝딱 만들어낼 정도로 엄청난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주례를 시작함과 동시에 '이럴 순 없어!!!'를 외치며 신랑 측 하객석에서 튀어나온 여자 한 명이 신랑의 머리채를 틀어잡는 것을 시작으로, 결혼식은 엉망진창으로 변했다. 당최 이게 무슨 일인가 싶던 하객측은 여자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에 기함했다. 누가 봐도 신랑 측이 사실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단 것을 증명하는 발언들이 여자의 입에서 서슴없이 튀어나왔으니까. 그리고 그 난장판은 여자의 마지막 말에서 절정을 찍게 되는데…,

"네가 우리 애를 두고 어딜 가!!!"

말할 것도 없이 결혼식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우리 애'발언에 하객들은 예비 신랑의 머리채를 부여잡은 여자의 배가 상당히 불러있다는 사실을 눈치챘고, 그 사실을 눈치챈 이들 중에서는 당연히 김연주의 부모님도 있었으니,

"이 결혼은 없던 일로 해!!"

뭐, 그 난장판 속에서 웃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짧게 후일담을 풀어보자면, 그 난장판 결혼식 바로 다음날 우리는 축하주를 깠다.

"김연주 결혼 파토를 축하하며-!!!"

건배사가 대체 왜 이런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축하받을 일이야? 진짜 김연주 입장에서는 무슨 이런 날벼락이 다 있나 싶을 일이건만, 내 입장에서는 축하받아 마땅할 일이니 그렇다 변명하겠다.

아무튼, 권연희 주도 하에 내 결혼식은 아주, 아주, 완벽하게 파토가 났다.





📘 📗 📕





"야!! 결혼축하한다!!"

그러니까 이건 내 결혼식은 아니다.

"…뭔놈의 웨딩드레스가 저렇게 잘 어울린대?"

"내 말이…."

"김태형 입 찢어지겠네…."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웨딩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김여주는 장난 아니게 예뻤다. 이게 바로 여주인공 효과인가? 얼마 전의 난리통에서 내가 입었던 웨딩드레스와는 퍽 다른 느낌이 드는 김여주의 드레스를 한참이나 구경하다 연주! 하며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쪽을 보며 방긋 웃은 김여주가 이리 오라며 손짓한다.

"결혼 축하해. 결국 네가 제일 먼저 간다?"

"윽, 연주, 그거는…!"

"아니 뭘 또 미안해하고 그래! 네 탓도 아닌데?! 됐어, 사진이나 많이 찍어."

마지못해 자세를 잡는 김여주의 옆에 딱 붙어앉았다. 권연희는 물론이거니와, 김여주 결혼식이라고 월차까지 써낸 이유진까지 한자리에 모여 카메라를 쳐다본다. 하나, 둘-, 하는 소리에 맞춰 셔터음이 몇 번이고 울려 퍼졌다.

즉석에서 인화한 사진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지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김여주와 눈이 마주쳤다. 버릇인 것처럼 방긋 웃어오는 김여주에 나도 그를 따라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새하얀 장갑을 낀 김여주의 손을 붙잡고 나는 물었다.

"김여주, 행복해?"

그럼 김여주는 또, 그 특유의 말간 웃음을 지으며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응, 엄청!"

"그래 보이긴 해. 김태형은 입 찢어지려고 하던데."

"어어, 태형이가?"

"너 입장할 때 우는 거 아닌가 몰라."

"에이, 설마~,"

그날 결혼식에 대해 잠깐 말해보자면, 우선 김여주의 설마는 현실이 되었다. 신부의 손을 잡음과 동시에 눈물을 터트리는 신랑의 모습은 그 결혼식 하객들의 웃음꽃을 피워냈고, 신부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을 피워냈다. 신부 대신 신랑의 울음으로 시작한 그 결혼식은, 우는 신랑을 달래고, 하객들과의 사진을 몇 번이나 찍고, 정신없이 하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이리저리 얼굴을 비추러 다니다 웨딩카에 올라타기 전 부모님의 품에서 울음을 터트린 신부의 이야기로 끝이 났다.

"잘 살아, 행복하게."

내 말에 그러겠노라 대답하며 웨딩카를 타고 떠나는 김여주의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김여주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오오,"

"응? 왜 더 안 자고."

잠이 안 와…, 투정 부리듯 어깨에 얼굴을 묻는 김석진의 손을 그러잡았다. 목덜미에 간질간질한 숨이 옅게 달라붙는다. OOO, 하고 중얼거리듯 다시금 김석진의 입에서 흘러나온 내 이름에 왜, 하고 대답하니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짓는다.

"김연주."

"응."

"오오."

"왜."

"OO아,"

"왜."

OOO …, 웅얼거리듯 내 이름이 내뱉어진다.

"뭐가 그렇게 불안해서 분리불안 온 강아지처럼 굴지,"

15년을 하룻밤 사이에 건너뛰어 온 뒤로 줄곧 이랬다. 아닌 척하지만 이따금 이름을 불러오는 그 목소리에 불안함이 한가득이었다. 김석진이 손끝을 움찔거렸다. 찔린다는 듯한 반응을 곧이곧대로 내보이고서도 모른 체 말한다.

"…안 불안해."

내 허리를 부서져라 꽉 끌어안고 있는 김석진의 팔을 풀어내곤 몸을 돌렸다. 발갛게 짓무른 눈가에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이래놓고 뭐가 안 불안하다는 거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김석진을 쳐다보니 제가 생각하기에도 제 말과 행동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는 듯 시선을 피한다. 좋은 말 할 때 불지? 하는 내 말에 모른 체 품에 안겨온다. 진짜 자기가 강아지라도 되는 줄 아나 봐. 김석진의 널따란 등을 토닥였다. 김석진이 얼굴을 묻은 어깻죽지가 축축해지는 건 모른척했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꿈을 꿨는데,"

김석진이 꽈악 끌어안은 허리가 뻐근해져 올 때쯤에야 김석진이 입을 열었다.

"네가 OOO이 아니었어."

"뭐?"

"너는 김연주였고, 내가 널 OOO이라 부를 때마다 당황하면서,"

"……."

"OOO이 누구냐고, 말했어. 그게, 그게 계속 반복되니까…,"

"……."

"네가 아직도 OOO이 아닐까 봐, 김연주일까 봐 무서워."

어쩐지, 이름을 계속 불렀던 이유가 이거였나.

"내가 너와 김연주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네 이름 하나뿐이라는 게 그렇게 끔찍할 수가 없었어…."

김석진이 훌쩍인다. 다 큰 성인 남성이 우는 꼴을 몇 번이나 보게 될 줄은 몰랐으나, 그 남성이 내 남자친구인 김석진이라는 점에서 다 용서가 된다. 토닥이던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저 악몽일 뿐이었다고 말하면 네가 진정할까. 다시 악몽을 꾸게 될까 불안해하는 건 아닐까. …애초에 악몽이 맞긴 할까? 그간 이런저런 잔걱정들을 했던 걸 미루어보아 그런 알량한 위로만으로 네가 진정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무슨 말을 해야 네가 더는 불안해하지 않을까. 진짜 날 바로 앞에 두고도 이렇게 불안해하는 네가.

나는 천천히 김석진의 손을 풀었다. 양손으로 그 손을 꼭 붙잡곤 베란다 문을 열었다. 당사자 없는 김여주 결혼 기념 뒤풀이는 P 기업 장남이라 돈이 썩어나게 많은 박지민의 집에서 이루어진 터라, 넓은 오피스텔 거실에 술에 꼴아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이 여럿 널려있었다. 얼마 만에 술이냐며 미친 듯이 부어라 마셔라 하던 권연희와 박지민은 진즉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잠들어 있었고, 당당하게 소파를 차지한 채 긴 다리를 뻗고 잠든 전정국도 있었다. 심지어는 누가 불렀는지 모를 이유진까지 거실 한구석을 차지하는데 동참하고 있었다. 걸리적거리는 팔다리들을 발로 슥 밀어가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양심이 집주인의 침대에 드러눕는 것은 죽어라 뜯어말렸기에 나는 빈 방중 아무 데나 골라 들어가 바닥에 드러누웠다. 반항 없이 날 따라 빈 방으로 들어선 김석진이 발갛게 짓무른 눈을 끔뻑였다. 어서 눕지 않고 뭐 하냐는 듯 내 옆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자 마지못해 내 옆에 조심스레 눕는다. 김석진을 꼭 끌어안았다. 아직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기에 베란다에서 했던 것처럼 그저 김석진의 등을 토닥였다.

"백 번이고 대답해 줄 테니까 계속 불러."

"……."

"근데 너무 지쳐서, 하기 싫다, 못하겠다 싶으면 그냥 거기 있어."

"……."

"좀 늦으면 내가 찾으러 가지, 뭐."

너는 스물일곱이나 먹어놓고도 뭐가 그렇게 무서운 게 많나. 내 품에 얼굴을 쳐묻곤 또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는 김석진을 보며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 두려움이 다 내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기분이 좋기도 해서, 나는 기꺼이 울음을 터트린 김석진에게 내 품을 내어주었다.

"…오늘 김여주 결혼식 보는데,"

"응."

"저번에 네가 웨딩드레스 입은 게 생각이 나는 거야, 너무 잘 어울렸는데,"

"응."

"…근데 기분이 나쁜 거야."

"어, 진짜로?"

"…응."

"너 웃고 있길래 몰랐는데."

"어차피 파토날 결혼식인 거 다 아니까. 티 낼 필요 없다 생각하긴 했는데…."

"응."

"…내가 하객석에 있는데 네가 웨딩드레스 입고 있어서 짜증 났어."

"……."

"질투 났어,"

"아, 진짜 미치겠다."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또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붉어진 귓불에 냅다 쪽쪽 입을 맞추니 배로 빨갛게 익어버린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한참을 서로를 끌어안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물가물해지는 눈을 감고 잠에 드는 건 곧이었다. 이마에 무언가가 살포시 닿았다 떨어지는 것을 끝으로 의식이 저 멀리로 가라앉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김석진은 없었고,

여전히 낯선 천장만이 보일 뿐이었다.

참으로 뻔하게도.





📘 📗 📕




BGM 추천 : 시간의 바깥 / 아이유(IU)








눈을 뜨자마자 몸을 벌떡 일으켰을 때 들려온 것은 김연주가 아닌 진짜 내 이름을 부르는 부모님의 목소리였다. 낯선 천장은 병원의 것이었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살펴본 내 몸에는 환자복이 입혀져 있었다. 한참을 내 얼굴을 더듬으며 내가 깨어난 것을 확인하던 부모님의 말로는 몇 달 전 갑자기 심정지로 쓰러져 그대로 의식을 찾지 못하던 상태였다고 한다. 쓰러진 날이 소설 속에 빙의하던 시점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소설에서 흘러갔던 내 시간도 현실에서 그대로 흘러간 모양이었다. 15년을 쌩으로 날려먹진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현실로 돌아오기만 하면 뭐든 해결될 것만 같단 생각은 착각이었다. 15년까지는 아니더라도 몇 달이란 시간을 쌩으로 날려먹은 시점에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쓰러졌단 소식에 발 벗고 달려와준 지인들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는 것만 해도 며칠이 걸렸다. 갑작스럽게 쓰러진 탓에 강제로 휴학해야 했던 학교 문제도 있었고, 개강과 동시에 출근하기로 되어있던 회사와의 계약 문제도 남아있었다. 원해서 날려먹은 시간이 아니었기에 억울한 감이 없잖아 있었으나,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며칠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수많은 문제들이 차츰 사라져갔다. 깨어났다는 소식에 달려와준 이들과 가볍게 밥 한 번씩 먹고, 중도 휴학 처리된 김에 이번 학기는 쭉 휴학 상태로 있는 걸로 깔끔하게 해결하고, 출근하기로 했던 회사는 일손이 부족했던 탓에 계약 기간을 미뤄 다음 달부터 출근하기로,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됐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을 정도로 깔끔하게. 그러나 하나만은 쉽지 않았다.

"여기 김석진이라는 사람 있나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초조함에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죄송하지만 김석진이란 분은 안 계시는데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허탕이 대체 몇 번째인지 모른다. 한숨을 내쉬며 알겠단 대답과 함께 건물을 나섰다.

"또 허탕?"

"응."

유일하게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건 권연희였다.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만큼 지인을 통해 근황을 알아내기 쉬웠다. 그마저도 김석진을 찾아내는데 몇 번 실패한 뒤 찾아갔던 터라, 혹시나 아니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앞에서 망설이고만 있는 나를 권연희가 발견한 게 먼저였다. 야 OOO!! 하며 날 꽉 끌어안는 모습에 안심했다. 혹시나 꿈은 아니었을까, 망상은 아니었을까, 그냥 긴 악몽이 아니었을까 하는 불안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너는? 박지민이랑 전정국도 아직?"

"뭐, 지역밖에 못 들었으니까. 사실 난 그렇게 급하지도 않아. 애초에 너랑 김석진처럼 서로를 찾아야 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못 찾아봤자 음, 그냥 친구 한 명 잃었구나-, 하고 넘기면 될 일이고."

"그래도 아쉽잖아."

"누가 아주 포기한대? 게다가 부산이라잖아. 내려가는 것도 일인데 그 넓은 데서 걔네를 대체 어떻게 찾니. 너처럼 부딪혀볼 엄두는 안 난다."

"SNS 같은 건 안 하나?"

"있긴 한데, 안 쓰나 봐. 마지막으로 활동한지 몇 년 됐고, 연락도 안 되고. 너는? 김석진 찾아봤어?"

"생각보다 동명이인이 너무 많아. 거기다 대고 '혹시 저 아세요?'하고 하나하나 연락할 수도 없고."

"무슨 개고생이야 이게,"

"그러게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기 전에 신상정보 싹 털어서 올 걸 그랬어. 투덜대며 하는 말에 권연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랬으면 이렇게 고생할 일도 없잖냐며 이제는 날 탓하는 게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모르겠다. 어쩌면 김석진을 찾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닌 몇 년이 걸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관두지는 않을 거잖아."

"당연하지."

잘근잘근 씹던 빨대를 뱉으며 씩 웃었다. 그쪽은 목이 터져라 내 이름을 불렀다는데, 쉽게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이미 내가 먼저 찾아가기로 약속까지 한 마당에 더 사릴 것도 없었다.

"얼마가 걸리든 찾아낼 거야."

김석진이 그랬던 것처럼.

별 짓을 다 했다. 생전 해본 적도 없던 별별 SNS를 다 깔아 죄다 본명으로 가입했다. 혹시나 권연희와 나처럼 셋 중 한 명이라도 SNS를 통해 우리를 찾지 않을까 싶어서. 활동이 아주 없으면 또 아니라 생각할까 봐 일부러 권연희와 있는 사진을 업로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김석진을 찾는 것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소설 속에선 현실로 돌아갔을 때 서로를 찾을 수단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은 없어서, 내가 김석진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곤 스물일곱 살 사회 초년생이라는 것과, 고향이 과천이라는 것, 대학은 서울에서 다녔다는 것 밖에는 없었다. 회사의 이름을 얼핏 들었던 것 같은데, 망할 놈의 기억력이 힘을 내주지 않는 바람에 이미 가물가물했다. 기억하는 것과 비슷한 이름의 회사에 찾아가 냅다 '김석진이라는 사람이 있느냐' 묻고 다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연락이 온 건 현실로 돌아온 지 딱 두 달이 지나던 날이었다.

"너희는 빙의 시작한 날에 뭐 아프다거나 하지 않았어? 쓰러졌다거나, 의식을 잃었다거나."

"심정지? 너도 위험했네. 아니, 난 아니고. 난 그냥 의식불명. 나 말고, 석진이 형."

"나도 연락받은 지 얼마 안 됐어. 어쩌다 연락이 닿아서. …연락 안 왔어? 아, 못한 건가."

"△△병원, 가보지그래?"

"뭐가 겁나."

"어…,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

"아니, 그건 아니고."

전정국이 제일 먼저 찾아간 건 박지민이었다고 한다. 같은 부산에 있었으니 만나기도 쉬웠다면서, 미친 척 먼저 말을 꺼내 그 세계에서의 일이 현실임을 먼저 확인한 후에 우리를 찾았다고 한다. SNS로. 쓰지도 않던 계정을 발굴해 내는 게 얼마나 귀찮았는지 아냐며 투덜대는 걸로 말문을 연 그가 말했다. 김석진의 행방에 대해서. 연락을 받은 그날, 이 늦은 밤에 대체 어딜 가냐는 엄마의 잔소리도 뒤로하고 나는 집을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다. 택시를 부르는 손이 다급했고, "아저씨, 빨리 가주세요!" 외치는 목소리가 다급했다.

"OOO만 찾았다잖아, 석진이 형이."

심정지로 쓰러졌던 김석진이 의식을 찾은 건 겨우 일주일 전이었단다. 그마저도 간간이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처음 듣는 이름만 중얼거렸다. 27년을 함께했던 가족들조차 당최 누군지 감도 잡히지 않아 골머리만 싸매던 이름을. 의식을 완전히 되찾은 뒤로 그 이름을 다시 입에 담은 적은 없다지만, 퇴원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전정국이 웃으며 말했다. 세기의 사랑 아니냐, 정말.

△△병원 1204호,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자신이 없어 비상계단의 문을 열어젖혔다. 무려 몇 달간 누워만 있다 겨우 한 달 전에 의식을 찾은 몸뚱이가 급격한 움직임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기를 몇 번, 기어고 계단에서 쿠당탕-, 넘어진 나를 보고 놀란 행인이 괜찮냐며 내미는 손을 모른체하고 다시 계단을 오르기를 한참. 12층에 다다라 비상계단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저녁 늦은 시간에 환자들의 병문안을 위해 왔던 이들이 다시금 저들의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그곳에서 나는 유일하게 열려있지 않은 병실 앞에 섰다. 문을 열었다. 열리는 문에 고개를 돌린 네 눈이 크게 뜨였다. 네 품에 뛰어드는 내 눈가가 시큰거린다. 뻔한 클리셰가 가득한 소설의 한 장면처럼 네게 입을 맞췄다.

클리셰 가득한 소설의 주인공은 너와 내가 될 것이다. 앞으로,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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