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서로를 영웅으로 삼다.
“옛날옛날, 영웅이 되고 싶은 한 소년이 있었어요~”
“와~!!!”
어린 아이들의 환호성이 반을 가득채웠다. 이토록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따스한 햇살이 비춰지는 한낮의 유치원. 지금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고 기대하는 동화책 읽기 시간이다.
오늘의 책은 “영웅이 될거야.”, 아이들이 환장할만한 제목이었다. 역시나 선생님이 입을 떼기 시작한 첫 문장부터 시선을 끌었다. 평소엔 집중을 잘 못 하던 아이들도 책을 읽는 시간만 되면 두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에 빠져들곤 한다.
나긋나긋한 선생님의 목소리가 이야기와 어우러져 반을 가득 채우고, 어느새 클라이맥스를 향해가는 이야기는 아이들의 몰입도를 더욱 증폭시켰다.
“그때, 영웅이 나타나서 나쁜 악당을 밀치고 사람들을 살려주었어요!”
“우와아아!!!”
“그렇게 영웅은 악당을 몰아내고 사람들에게 많은 박수를 받았답니다~”
선생님의 박수와 함께 이야기가 끝나고, 몹시 집중해있던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여운을 잊지 못하였다. 너도나도 선생님께 달려가 질문을 해대는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선생님! 영웅은 어떻게 하면 될 수 있어요오?!”
“저도 영웅이 되고 싶어요!!”
“영웅처럼 멋있는 능력도 가지고 싶어요!!”
“맞죠~ 그치만 영웅은 꼭 멋진 능력을 갖고 있어야만 하는게 아니에요.”
“그럼요?”
눈을 똥그랗게 뜬 아이들이 선생님의 말에 귀를 귀울였다.
“멋진 능력이 없어도, 사람들을 도와주기만 하면 그 사람에겐 우리 친구들이 영웅이 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망설이지 말고 다가가야해요. 알았죠?”
방긋- 웃으며 말하는 선생님에 아이들은 당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네~!!”하고 소리쳤다. 그렇게 깊은 여운을 남긴 채 즐겁던 책 읽기 시간이 지나가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노곤노곤한 졸음을 맞이하는 낮잠 시간이 다가왔다.
“다들 잘 자요~”
선생님이 불을 탁- 끄고 반을 나가자, 이불속에서 꼼지락대던 아이들이 어느새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들의 대화 주제는 “영웅”, 아마도 책이 정말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나는 선생님 말처럼 영웅이 될거야!”
“어떻게?”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줄거야!!”
“나도나도!!”
저마다 한 마디씩을 거들어가며 너도나도 영웅이 되겠다고 소리치는 아이들. 꽤나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선생님에게도 전해졌는지, 문이 탁- 열리자 금세 자리로 돌아가 자는 척을 하였다.
“여러분~ 얼른 자야해요~”
“...네에...”
자는 척은 했지만 속이긴 못하겠는지, 소심하게 “네...” 하며 대답을 하는 아이들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모든 아이들이 새근새근- 고요한 숨소리와 함께 잠에 빠져들고, 반에도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느새 유치원의 하루도 다 지나가고, 하원 준비를 마친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승합차에 오르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유치원 앞 도로를 지나다니는 차들이 많아 선생님은 신난 아이들을 진정 시키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여러분! 차가 많으니까 조심해야 해요!”
“네에~!!!”
“자 우리 여주, 얼른 타야지!”
겨우 한 아이를 태우고 다음 차례인 여주를 찾아 헤매는 선생님, 그 주인공인 여주는 자기 순번을 잊고 뒤로 가 친구들과 마음껏 떠들다 그제서야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온다.
“헤헤...”
“자, 얼른 타자 여주~”
헤헤- 거리며 그렇게 순수한 웃음을 지으면 혼내지도 못하지. 특유의 귀여움으로 선생님을 무장해제시킨 여주는 뭐가 그리 좋은지 발그레한 미소가 끊이질 않는다.
그때, 차가 다 지나갔는지 보려 선생님이 여주와 잠시 멀어졌을 때였다.
“어어? 선생님!!!”
“저기 차!!!”

골목을 따라 굴러오는 커다란 승용차, 운전자도 없이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차는 여주를 덮칠 기세로 빠르게 달려왔다. 겁에 질린 여주의 다리가 굳어 선생님의 외침조차 잘 들리지 않던 찰나,
“여주야!!!! 피해!!!!”
“꺄아아악!!!!”
쾅-!!!
“으... 흐으...”
“여주야!!!”
“선생니임... 흐아... 으아앙...”
여주를 향해 달려왔던 차는 벽을 들이받았고, 다행히 여주는 그 옆으로 넘어져 약간의 생채기만이 무릎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정국... 정국아!!!”
“......”
“여보세요?!! 거기 119죠!!!”
여주를 밀쳐내고 자기가 대신 차를 들이받은 정국, 차에 깔려 처참한 그 모습에 선생님조차 차마 눈을 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아이들이 동요하자 선생님은 곧장 119를 불렀고, 그렇게 정국은 여주와 함께 병원으로 옮겨졌다.
“선생님!!!”
“정국이 어머니...!!”
“어... 어떻게 된거예요? 우리 정국이...”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면목이 없어요 어머니...”
“마... 많이 다쳤어요?”
응급실에 들어서자마자 정국을 찾는 정국의 엄마. 그런 그녀의 앞에는 피투성이가 된 침대와 그 옆에 앉아있는 선생님,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의 여주가 있었다.
“우, 우리 정국이... 어떻게 된거예요?”
“그게요... 아이들 하원을 시키다 그만...”
“...아... 아아...”
“아아아... 정국아... 아...”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정국의 엄마가 응급실 바닥에 푹- 쓰려져 오열하기 시작했다. 작은 사고도 아닌 아주아주 큰 사고, 그 누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는지. 응급실은 그녀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고 말리는 이도 하나 없었다.
그때, 멍하니 침대를 바라만 보고 있던 여주가 정국의 엄마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여주야...!”
“아줌마... 죄송해요...”
“제가 거기 있어서... 정국이가 저 대신에...”
“그, 그런데 정국이 이제 죽어요...?”
“......”
큰 눈에 맺힌 눈물. 떨리는 목소리. 정국의 엄마는 고개를 들어 여주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여주도 무릎이 까지고 고운 얼굴에 피딱지가 붙어있는 등 상처가 있으면서 오로지 정국을 걱정하고 있었다. 정국의 엄마는 여주의 볼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닦아냈다.
“아냐... 네 잘못 아니야 아가야.”
“정국이... 살거야.”
“흐으... 으...”
결국 터져버린 여주의 눈물. 정국의 엄마는 여주를 품에 앉고 조용히 함께 흐느꼈다. 어느새 여주의 엄마도 오고 응급실은 한산해졌지만, 정국의 수술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 안 나오지...?”
“금방 나올거예요 어머님...”
“그... 그렇겠죠?”
“잘못된 거 아니겠죠...?”
한껏 불안해진 정국 엄마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여주는 그런 그녀의 손을 꼭 잡았고, 선생님은 여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써 떨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 순간,
“후...”
의사가 수술 가운을 벗고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응급실로 들어왔다. 그리고선 주변은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는 듯 하더니, 이내 익숙한 이름이 나왔다.
“전정국 환자 보호자 계십니까?”
“아, 네!! 여기요!!”
“잠시 이쪽으로...”
정국의 엄마가 다급히 손을 흔들자, 의사는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그녀를 따로 불러냈다. 여주도 따라가서 듣고 싶었지만, 꽤나 심각한 분위기에 선생님과 여주의 엄마가 여주를 말리며 빠져나왔다. 정국이 깨어나는 모습을 보고 싶던 여주는 집에 가지 않겠다며 떼를 썼지만 엄마를 이길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집으로 가는 차 안, 여주는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내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깨지 않았으며, 선생님의 권고에 따라 3일 동안 유치원을 가지 않고 쉬게 되었다. 수도없이 정국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매번 엄마에게 제지 당하며 다시 유치원에 등원할 날 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유치원에 가기 하루 전 날, 여주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여주야. 정국이가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간대.”
“...네에...?”
“정국이가 많이 아파서, 여기서는 치료를 못한대.”
“그래서 서울에 오래 있을거야. 아마 거기서 평생 살수도 있고.”
이럴수가, 하루아침에 서울로 떠난다니. 이 사실을 믿기 어려웠던 여주는 금세 눈물을 흘리며 자기도 정국의 병원에 따라간다고 졸라댔다. 그날 만큼은 엄마도 애틋한 눈빛으로 여주를 받아주었다.
옷을 단단히 여미고 도착한 병원 입원실, 엄마는 여주에게 시끄럽게 하면 안된다고 당부하며 조심스레 병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엔,
“...정국아...”
“...김여주?”
몸 곳곳에 붕대를 칭칭 감은 정국이 누워있었다.
“너... 왜 왔어...?”
“서울 간다며어...!!”
“...그게 왜...”
“왜긴...! 나는... 너 걱정돼서 그랬는데...!!”
“...너는 괜찮아...?”
힘겹게 눈을 뜬 와중에도 여주를 걱정하는 정국, 여주는 그런 정국을 보자 다시 한 번 눈물이 쏟아졌다. 겉잡을 수 없이 커진 울음에 정국은 당황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여주는 꾸역꾸역 할 말을 내뱉었다.
“진짜진짜... 고마워 정국아...”
“너는 내 영웅이야.”
“...뭘...”
“그러니까... 서울 가서도 나 잊으면 안돼...”
“알았지...?”
“...응... 안 잊을게.”
고작 5살때의 우정이 뭐가 그리 중요했던지, 정국과 여주는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엮인 상처를 달고 긴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다.
다행히 여주의 상처는 금세 나았고, 후유증도 없었다.
그치만 마음 한구석이 어쩐지 허전한 건 왜인지 모르게 계속 되었다. 그렇게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어느덧 어엿한 17살이 된 여주는 새롭게 시작될 고등학교 첫 날을 앞두고 있었다.
새학기의 공기가 풋풋히 느껴지는 반의 공기, 그 구석에 조용히 앉아있는 여주는 아직은 어색한 분위기에 덩달아 침묵인간이 되었다. 그 적막을 깬 건 다름아닌 담임 선생님의 입장.
“자, 새학기 첫 날부터 전학생이 왔네.”
“들어오렴, 정국아.”
“...응...?”
정국이라니, 설마. 내가 아는 그 전정국은 아니겠지, 하며 놀란 마음을 넘기는 여주다. 유치원때 그 아이가 여기 있으려고...
드르륵-

“어... 안녕...”
“...!!!”
알 수 있었다. 분명했다.
많이 변한 이목구비였지만, 틀림없는 전정국이었다.
“서울에서 전학 온 전정국이고...”
“...잘 부탁... 해.”
“그래, 정국이는 저기 가서 앉자.”
“오늘은 첫 날이니까 간단히 소개를 하마. 나는...”
담임 선생님의 소개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여주의 신경은 온통 전정국을 향해 있었다. 몸은 괜찮은건가, 다 나아서 온 건가, 그런데 아까는 왜 불안해 보였을까, 갖가지 수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다. 날 알아보긴 할까?
복잡한 생각을 달래다보니 어느새 하루가 다 갔다. 나름 새로운 친구도 사귀었고 반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지만, 여주는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담임 선생님이 종례를 마치자마자 쏟아져 나가는 아이들, 그 사이로 유유히 사라지는 정국을 여주는 쫓아 달려갔다.
“헉... 저기...!!”
“전정국!!!”
“...왜?”
“헉... 너, 나 기억 안 나...?!”
“나...!! 김여주!!”
“...김여주?”

“네가 어떻게...”
우리는 커피 한 잔씩을 들고 학교 뒷 편 공원에 가 자리를 잡았다. 몇 년만에 봐서 그런지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간간히 풍겨오는 봄내음이 분위기를 한층 풀어주는 듯 했다. 옛날 얘기와 유치원 시절 등 나름의 대화들이 오고가고, 나는 조심스레 사고 이후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은 다 나은거야? 몸.”
“...아...”
“...?”
어쩐지 뜸을 들이는 정국, 머뭇거리는 그의 입술이 묘하게 떨렸다. 내가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말하라며 거들자, 정국은 한숨을 후- 내쉰 뒤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그렇게 좋은 상태는 아니야.”
“왼쪽 눈은 시신경 손상으로 거의 안 보이고...”
“다리도 거의 절고있지.”
“......”
“사실 이것때문에 전학온거야.
중학교에서 장애 때문에 괴롭힘 당했거든.”
“아...”
나는 멍해졌다. 떠난 이후 아무 소식도 없더니, 그렇게 살고 있었다는 걸 알고나니 왠지 북받쳐 올라 쉽사리 아무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랬는데... 아마 여기서도 똑같겠지 뭐.”

“...내가 도와줄게.”
“네가...?”
“그때는 네가 날 도와줬으니까, 이젠 내가 널 도와줄게.”
“나도 네 영웅이 되게 해줘.”
“…”
네가 나의 목숨을 구해줬던 것처럼, 나도 널 그 어둠속에서 구해줄게.

“그래, 좋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