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럴 거면 날 사랑하지나 말지_
술을 마신 데다 그 비를 몽땅 맞고 집까지 간 나는 일주일을 내내 앓아누웠다. 오히려 좋았다. 몸이 죽을 듯이 아프니 마음이 아픈 게 좀 가시는 것 같아서 감기약도 먹지 않고 내내 앓기만 했다 그러다 결국 탈진으로 쓰러져버린 나를 발견한 건 네가 아니라 네 친구이자 내 친구인, 나의 미련함을 가장 가까이서 본 범규였다.
아픈 걸 참는 건 좋은 게 아니라 미련한 거예요 환자분-
희미한 의식 사이로 들려오는 의사의 말은 귀에 담기지 못했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의사의 말을 듣고있는 범규만 보였다 태현이한테 전화하면 안 되는데, 화낼텐데 아픈 와중에도 급한 마음에 남아있는 모든 힘을 쥐어 짜 범규의 손을 붙잡았다
" 백여주!, 정신들어?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참아! "
" 전화,...태현이,한테....전화하지,마. "
" 하. 야 백여주 너 진짜.!! 넌 이와중에도 그 X끼 생각이냐? "
그 순간, 응급실 베개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그러게 그렇게 비를 다 맞으며 돌아서는데도 한 번 잡아주지도 않은 네가, 며칠을 학교에 나오지 않는데도 한 번 찾아주지도 않는 네가 뭐가 좋다고 난 이렇게 널 놓지를 못하고 있을까. 자조 섞인 헛웃음이 나왔다. 범규도 이런 내가 어이가 없는지 붙잡은 내 손을 뿌리치고 접수대로 가버렸다 나도 이렇게 내가 싫은데 넌 오죽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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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난데, 강태현 지금 어디서 뭐하냐. "
미치도록 화가 났다. 탈진해 쓰러질 때까지 스스로를 방치한 너에게, 널 이렇게 만든 강태현에게, 이 와중에도 네게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나에게 미치도록 화가 났다 수액을 맞으며 잠든 너의 이마를 조심스레 짚어 열이 내린 것을 확인하고서야 참았던 한숨을 길게 내쉬고 네가 깨지 않게 조용히 병실 앞으로 나와 전화를 걸었다. 널 이렇게 만든, 그럼에도 네가 가장 보고 싶어 할 그 자식을 찾기 위해서
" 강태현은 왜, 아 야 강태현 여친이랑 쫑났냐? 그 자식 요즘 연희정 꼬시려고 별 짓을 다하더만 오늘도 둘이 영화보러 가는 것 같던데 역시 쫑난 거지? "
" 입 닥치고 그 영화관 어딘지나 털어. "
" ....우리 학교 근처 세림백화점에 있는 레고시네마. "
평소엔 밝고 유쾌하던 내 목소리가 진지하게 굳어 휴대폰 스피커를 넘어가자 직감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듯 두 사람이 헤어진 거냐며 장난스럽게 강태현의 근황을 얘기하던 친구놈이 입을 다물고 조용히 그 자식의 위치를 알렸다 너는 그 자식이 준 상처때문에 이렇게 앓고있는데 그 자식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사실에 말아 쥐고 있던 주먹이 분노에 하얗게 질리다 못 해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것도 모르고 그 자식을 잡아 죽이기 위해 영화관으로 무작정 향했다 아무리 권태기여도, 아무리 마음이 식었어도 이런 비겁한 짓은 도리가 아니었다 연인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마저 어그러뜨리려는 그 자식에게 미치도록 화가 치밀었다.
세림 백화점 건물 안에 들어서서 연인처럼 꼭 붙어 재잘거리는 두 사람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여자의 손을 꼭 붙잡고 악세서리 매장을 다정하게 구경하는 그놈의 웃는 얼굴에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더 망설이지 않았다.
퍽-!!
" 꺄아아아아악!!! "
" X발 뭐,...최범규? 너 뭐냐. "
" 그건 내가 할말이고 개새X야. 너 여기서 뭐하냐. "
" 이러고 다니니까 지 여친이 어떤지도 모르지 "
내 주먹에 맞고 뒤로 날아 넘어진 강태현의 멱살을 붙잡아 일으켰다. 네 옆에 함께 있던 여자가 지르는 비명 따위는 상관 외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있던 그 얼굴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이런 게 정상적인 우정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 쯤은 진작 알고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숨길 생각도, 마음도 없었다.
" 뭐라는 거야 잘못 먹었으면 병원을 가. "
" 근데 이 새끼가...!! "
" 그만!!!! 그만해 둘 다!! "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래를 돌렸다 너였다. 병원복 차림의 네가 거기 서 있었다 그 사실에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으로 얽혀버렸다 왜 언제부터, 이 자식이 다른 여자랑 팔짱을 끼고 데이트 하는 것까지 전부 본 걸까 또 상처받아 버린 걸까 계속 스쳐가는 생각에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하는 사이 강태현이 나를 밀치고 일어나 너에게 다가가 양팔을 으스러뜨릴 듯 꽉 쥐어잡았다.
" 이젠 하다하다 내 찬구한테 이상한 소리까지 하냐? "
" 백여주가 그럴 사람이냐? 아직도 걜 몰라?! "

" 너 진짜 사람 질리게 한다. "
*
*
*
말을 돌렸다 너는 끝까지 내게 이별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잔인했다. 그게 여전히 너도 내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내게 쉽사리 이별을 말하지는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수많은 밤을 달랬다 그랬는데 지금 네 표정과 팔뚝을 파고드는 고통이 그 모든 밤을 혼란 속으로 집어삼켰다. 답을 찾기도 전에 미로에 빠진 것 같있다.
나였잖아, 네 모든 순간은 언제나 나였잖아.
짤랑-!!
그 순간 네 가방에 달린 익숙한 토끼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대학로 거리에서 함께 사 하나씩 나누었던 정표와 다름 없었던 그 인형이 또 다시 눈앞에서 내 모든 순간을 재정립하고 있었다. 범규에게 잡혀 네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때 까지도 내 시선은 계속 그 인형 고리에 못 박혀있었다.
" 그만 잡아. "
" 뭐? 야 최범규. "
" 왜 끝까지 넌 좋은 사람이고 싶냐? 근데 어쩌냐 늦었어 X끼야. "
" ..진짜 지친다 백여주. 이럴거면 그냥, "
" 태현아!, 미안해 갑자기 방해해서 범규 말은 신경쓰지 마.
나 먼저 갈게. 얼른 가 최범규. "
네 입에서 이별이 튀어나오기 전에 말을 막아섰다 엉망인 얼굴을 보어주고 싶지 않아서 애써 미소 지으며 인사를 하고 범규의 팔을 끌고 백화점을 벗어났다. 뭐든 상관없었다 그 이별을 막을 수만 있다면, 나는 속 없는 바보라도 기꺼이 될 수 있었다. 몇번이고 그렇게 멍청하게 굴어줄 수 있었다.
난 정말 몰랐어. 나의 물러터진 마음이 너에게 모든 걸 정당화 시켜 줄 권리가 되어버릴 줄은. 그래서 네가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의 시간들을 내앞에서 무참하게 짓밟을 수 있었다는 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