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GAME[연재중단]

번호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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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G에이그리고

번호 06

W. 설하

[네 원래 이름이 뭐지?]

"…이름?"

그제야 그 '무언가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금방이라도 이름 세 글자를 내뱉으려 달싹이던 내 입이 딱 다물렸으니까. 동시에 내 머릿속은 혼란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이번엔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야, 야, 뭐야? 왜…, 나 지금 좀 황당한데, 어? 진짜 어이없는데, 근데…,"

[…….]

"내 이름,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

"…미친 거 아니야?"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불렸던 이름, 까먹을 게 없어서 이름을 까먹냐는 장난스러운 말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까먹을 수가 있지? 어떻게 잊어버릴 수가 있지? 마치 누군가가 내 이름 세 글자를 지워버리기라도 한 듯, 새하얀 백지만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히, 절망적이라 할 수 있는 그 감정을 느끼던 순간이었다.

[업적 달성]

축하합니다!

당신은

'이름을 잊은 자'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이름을 잊은 자'칭호를 획득합니다.

영광스러운 업적이 저장됩니다.

[알림]

히든 퀘스트 진입 조건을 모두 충족하였습니다.

[알림]

히든 퀘스트로의 진입을 시도합니다.

파란 창들이 내 시야 안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무언가가 깨지고, 부서지듯, 눈앞에 만개하는 파란 조각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지러웠다.

[히든 퀘스트 : 이름을 잊은 자]

이름의 힘은 생각보다 위대합니다.

당신의 자아, 당신의 기억,

그 외에 당신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당신의 이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름을 잊은 당신에게,

[조건]을 충족시킬 때마다

이름의 한 글자가 주어집니다.

모든 글자들을 찾아

당신의 이름을 찾아내십시오.

[조건 1] 오류 / 조회 불가

[조건 2] 오류 / 조회 불가

[조건 3] 오류 / 조회 불가

보상 : 당신의 이름

퀘스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알림]

비정상적인 접근이 감지됩니다.

[알림]

퀘스트를 자동 수락합니다.

뭐가 이렇게 제멋대로야, 나는 업적이라는 단어를 보고 한 번, 자동 수락이라는 단어를 보고 한 번,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업적이라니,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고. 원치도 않는 업적에다, 뭐?

"히든 퀘스트?"

[뭐?]

"너 나랑 장난해? 이런 상황에서도 굳이 퀘스트를 줘야겠어? 진짜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인데?"

[잠시만, 무슨 소리야?]

한껏 당황한 시스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의문과 당황이 뒤섞인 그의 음성에도 나는 좀처럼 진정할 수가 없었다. 이름 석 자, 한평생을 써오던 그 이름 하나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자꾸만 나를 괴롭히는 것 같았다. 나는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소리치듯 말했다.

"왜 모른 척이야, 네가 방금 나한테 준 퀘스트, 그거 뭐냐고!"

[아니, 대체 무슨 소리야, 진정 좀 하고 천천히 말해봐. 퀘스트? 무슨 퀘스트를 말하는 거야?]

"…히든 퀘스트 말이야."

[…히든 퀘스트라고?]

한데 뭔가 이상했다. 시스템은 정말 억울하다는 듯,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말했다. 히든 퀘스트라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시스템도 모르는 히든 퀘스트? 그런 게 존재할 수가 있나? 하는 의문이 저절로 생겨났다.

"이 퀘스트, 네가 한 게 아니야?"

[잠시만, 히든 퀘스트…, 내가 알기로 지금 상황에서 부여될만한 히든 퀘스트는 없는 것 같은데…. 퀘스트 이름이 뭔데?]

"…이름을 잊은 자."

쿠웅-, 하는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공간 전체를 감싼 파란 벽이 거칠게 진동하는 것이 보였다. 마치 무언가를 거부하듯이, 수많은 그래픽 조각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대체 왜? 하는 의문과 함께, 나는 진동이 멎어들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반쯤 찌그러졌던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즈음, 형편없이 떨리는 시스템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뭐라고…?]

"이름을 잊은 자. 히든 퀘스트 이름이야."

[…그런 히든 퀘스트는 존재하지 않아.]

"…그럼 내가 받은 이 퀘스트는 뭔데?"

시스템은 대답이 없었다. 다만, 여전히 가늘게 진동하고 있는 이 아공간의 벽들이 지금 그가 극도로 불안한 상태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따금씩 지지직거리는 음성 사이사이로 [젠장,], [이게 말이 돼?]하는 격한 음성이 들려오기도 했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머리가 서서히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시스템 또한 마찬가지인지, 약간의 진동이 남아있던 파란 벽마저도 완전히 안정을 되찾았다.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탓이었다. 다른 플레이어에게 쫓기듯 도망친 일부터, 갑작스레 부여받은 히든 퀘스트까지. 쉽게 넘길 수 있는 일이 한 개도 아니고 여럿 일어나다 보니 몸이 잔뜩 긴장한 탓이기도 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지금 흥분해봤자 해결되는 일은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망했군, 일단 넌 여관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어.]

"너도 딱히 아는 게 없으니까?"

[자존심 상하는 소리지만, 맞아. 네 엉망진창인 상태창부터 히든 퀘스트까지, 내가 관여한 일은 단 하나도 없으니까. 추측하기로는, 아마 네 시스템 자체에 누군가가 개입해서 '오류'를 만들어낸 것 같아.]

"오류?"

[자세하게 설명하긴 좀 길고, 아무튼 누군가가 네 시스템에 개입해 네 상태창이 그렇게 됐다는 것 정도만 알아둬. 누가 그랬는지 알아내는 건 이제 내 몫이고. 너는….]

시스템이 잠시간 침묵했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피범벅이 된 망토를 챙기며 물었다. 나 뭐?

[음, 조력자를 찾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갑자기 무슨 조력자,"

[우선 넌 시스템 사용법조차 익히지 못했으니까 그걸 익히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지. 다른 플레이어 말이야. 앞으로 네게 부여될 메인 퀘스트들을 생각해 보면, 시스템 없이 메인 퀘스트를 수행하는 건 자살행위에 가까우니까.]

"…그 정도라고?"

[…어, 아무튼, 조력자 찾는 건 내가 퀘스트 형태로 너한테 부여할 거야. 그러니까 걔한테 도움 좀 많이 받고,]

"잠시만, 그래서 그 조력자는 누군데?"

[누구긴, 이미 찾아놓고 그런 걸 왜 물어?]

찾긴 누굴…, 하며 말을 내뱉던 내 입이 딱 다물렸다. 설마, 하는 생각에 주섬주섬 챙기더니 짐을 내팽개치고는 벌떡 일어나 허공을 노려보았다. 야, 진짜로? 설마 내가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지? 하는 내 말에 시스템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시스템에게 표정이 있었다면, 그는 필히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기어이 파란 벽에 투영시킨 누군가의 모습에 나는 얼굴에 핏기가 싹 빠지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세계에서 만난, 유일한 플레이어가 아까 내 목을 난도질하려던 그 남자 말고 더 있겠는가?

"야! 이건 좀 아니지!"

[뭐가 아니야. 말했잖아, 쟤는 전직도 가장 빨리 끝마치고, 시스템 다루는 것도 상위급이라니까? 쟤한테 도움받으면 좋은 거지.]

"너 같으면 네 목에 칼 들이민 사람하고 하하호호 웃으면서 일할 수 있겠냐?!"

[아 몰라, 아무튼 지금 네 근처에 플레이어는 쟤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다니까? 그러니까 잘 좀 꼬셔봐!]

"야, 이…!"

내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기도 전에, 아공간의 새파란 벽들이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새파란 그래픽 조각들이 허공에 흩날리며 내 시야를 어지럽게 흩뜨렸다. 너 다음에 볼 땐 가만 안 둔다! 하는 협박 어린 내 목소리 사이로, 문득 시스템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게임 내에서

여관을 나설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몰골로 다시금 돌아왔을 때, 여관의 관리인은 핏자국이 완연한 내 옷을 보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 목욕물을 올려주겠다는 말만을 남겼다. 이미 피에 젖을 대로 젖어 못 쓰게 된 망토를 가져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눈치가 참 빠르네, 하기야, 콧대 높은 귀족들을 상대하는 일을 하다 보면 발바닥에 붙어있던 눈치도 발전이란 걸 하게 될 터였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여 금화 한 닢을 관리인에게 주며 속삭였다. 난 여기에 도착한 뒤로 방 밖으로 나간 적 없어요, 하는 내 말을 단번에 알아들은 관리인이 금화를 받아들며 작게 목례했다.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은 채 내 방으로 올라갔다.

다행스럽게도 진은 내가 잠시간 사라졌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여관의 직원이 올려준 목욕물에 몸을 푹 담그고, 치렁치렁한 긴 머리를 말리고, 뽀송뽀송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몸을 던질 때까지도 진은 제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나로서는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일이었다. 시험을 치러 가는 나를 마중 나온 진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어둡다는 것을 느꼈으나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모르는 척, 아무것도 모른 체하며 치른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은 내가 느끼기에는 성공적이었다. 아니, 적어도 입학까지는 할 수 있겠다 싶을 정도의 난이도? 현대에서 수능이다 토익이다 하며 수많은 시험들을 준비했던 나였지만, 그 악명 높다는 메를린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단 두 문제, 서술형으로 출제된 문제에 엄청난 기본 지식과 응용력을 요구하는 두 문제에 나는 시험을 치르는 내내 머리를 싸매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나온 답안이 만족스러웠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채로 시험장을 나설 뻔했다.

"시험은 잘 봤어?"

"응 뭐…, 그럭저럭?"

"…그래, 그렇구나. 수고했어."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어색한 분위기에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진은 더 이상 말을 얹지 않은 채 살가운 미소만을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내게 화를 낸 뒤에도 예전과 같은 다정한 모습만을 내게 보이려 애썼다. 하지만 간간이 보이는 진의 어두운 표정이 그의 진심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미 다 알려주고 있어서, 나로서는 배는 불편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우리는 말없이 여관으로 향했다. 진은 아마도 이 북부로 올 적부터 읽고 있던 책을 다시 펼쳐든 것 같았고, 나는 빠르게 지나다니는 북부의 거리를 멍하니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새로운 망토도 하나 사야 하는데. 이참에 바깥에 나가 북부를 둘러볼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한가로운 북부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마침 읽고 있던 책에 북부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도 많이 써져 있었기에, 북부 거리에 대한 호기심이 더 깊어진 참이기도 했다. 그런데, 과연 진이 내가 혼자 나가는 것을 허락해 줄까? 엄연히 아직 미성년자인 율리아의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는 진이었기에, 진의 허락을 맡은 뒤 북부 거리로 나도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엊그제처럼 막무가내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뭐 설마, 아무리 미성년자래도 그냥 거리를 둘러보겠다는 것뿐인데 허락을 안 해줄까-, 하던 내 안일한 생각은, 진의 단 한 마디에 무참히 깨져버렸다.

"안 돼, 리아."

진의 입에서 튀어나온 거절의 말에 내 얼굴이 저절로 찡그러졌다. …왜? 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은 내 질문에 진은 읽던 책을 덮으며 대답했다.

"…왜 굳이 혼자 다니겠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여긴 오르테 공작령이 아니야. 게다가 너는…,"

"……."

"기억도 온전치 않으면서 왜 혼자 다니려고 하니. 북부는 네 생각보다 위험한 곳이야."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내가 어린애는 아니잖아. 물론 미성년자니까 법적으로는 보호자가 필요하지만, 열일곱이면 그다지 어린 나이도 아니고. 잠깐 나갔다 오는 것뿐인데 굳이 누군가를 데려가야 할까?"

"세상에 호위 하나 없이 혼자 돌아다니는 공녀가 어디 있다고 그러니, 율리아. 네가 미성숙하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네가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어린애처럼 사고하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

"…내가 말하고자 했던 건, 너 혼자 다니기에 북부는 생각보다 위험한 지역이라는 거야. 왜 굳이 혼자를 고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기사 한 명을 데려가지 않는 이상 나는 허락할 수 없어."

…알았어. 마지못해 내뱉는 내 대답에 진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리아. 하는 그 말에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혼자 생활하는 것이 익숙하던 나에게, 꼭 누군가와 함께 행동해야 된다는 진의 사고방식은 마치 내 발목을 억세게 조이는 족쇄와도 같이 느껴졌다. 불편하기 짝이 없단 소리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여기는 내가 살던 곳이 아닌 것을. 괜한 의심을 사지 않는 쪽이 앞으로의 일에 더 도움이 될 것이란 사실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마차가 천천히 여관 앞에 멈추었다. 진이 마차에서 훌쩍 내린 뒤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은 채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리며 진에게 말했다.

"그럼 에반 경이랑 나갔다 올게. 그건 괜찮지?"

"그래."

진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에반 경은 오르테 공작가의 기사들 중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자였으니, 그가 굳이 반대할 이유도 없긴 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책상에 어지러이 펼쳐놓았던 물건들을 빠르게 챙긴 뒤 다시금 여관 밖으로 나섰다. 진은 내 외출을 마중이라도 하겠다는 듯, 여관의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녀올게, 오라버니."

"조심해서 다녀와."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는 내 인기척을 듣자마자 얼굴에 서려있던 수많은 감정들을 말끔하게 지워낸 채 언제나 그랬듯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양 팔을 살짝 벌리는 그의 품에 안겨, 가벼운 포옹을 한 뒤 나는 기사에게 무어라 지시를 내리는 진을 뒤로한 채 여관을 나섰다. 북부답게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허겁지겁 내 뒤를 쫓는 기사의 뒤로, 나를 쳐다보는 진이 보였다. 눈이 마주친 것은 아주 잠시였다. 왜인지 기분이 이상했다.

/

"에반 경, 혹시 대장간 거리가 어딘지 알아?"

호위랍시고 따라붙은 기사는 뜬금없는 내 물음에도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은 채 나를 안내했다. 메를린 거리 내 대장장이들의 골목이 제국 내에서도 아주 유명한 탓이었다. 장인들이 넘쳐나는 곳, 아카데미 때문이던 아니던 북부에 들렀다면 한 번쯤 가볼 만한 장소로 꼽히기도 했기 때문에 그는 그저 아가씨의 단순한 호기심이겠거니-, 하고 여기는 듯했다.

에반 경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대장장이들의 골목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깡, 깡, 하며 담금질을 하는 소리, 망치와 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귀 따갑게 울려 퍼졌다. 다루는 물건이 물건인지라, 골목을 채우고 있는 사람의 9할 정도는 죄다 남성인 듯했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나는 낑낑대며 골목길을 빠져나와야 했지만. 혹시라도 내가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할까 안절부절못하며 따라오는 에반 경을 흘끗 곁눈질하고는 나는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대장장이들의 골목은 메를린 거리 중심부부터 외곽까지 쭈욱 이어져 있었는데, 당연한 수순으로 외곽으로 가면 갈수록 사람이 적었다. 이윽고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한 대장장이의 골목에 다다랐을 때 즈음에서야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철을 두드리는 소리가 귀 따갑게 울려 퍼졌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외곽 중에서도 외곽, 다른 대장간에 비하면 훨씬 작은 대장간을 발견하고는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경, 경은 밖에서 기다려줘요."

"예? 저, 공녀님, 죄송하지만 소공작님께서…."

"뭐, 내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그래요?"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반쯤 장난으로 뱉은 말에 이런 반응이 돌아오니 입가에 걸치고 있던 미소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점차 싸늘해지는 내 표정을 보는 에반 경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빤히 보였으나, 그를 위해 애써 다시 웃어줄 기분이 아니었다. 아, 어쩐지, 요즘 따라 나를 보는 진의 눈빛에 낯선 감정이 깃들어있다고 느끼던 바였다. 걱정이라는 포장지를 벗겨내니 나온 것은, 의심이라는 새카만 감정이었던 것을.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오랜만의 외출에 들떠있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소공작님께서…."

"그래요, 오라버니가, 내가 도망갈 수도 있으니 딱 달라붙어 감시하라고 했구나."

"……."

"…됐어요, 뭐, 기대도 안 했어."

이게 호위냐, 감시지. 나는 변명처럼 쏟아져 나오는 에반 경의 말들을 죄다 무시한 채 대장간의 문을 열었다. 투박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그마한 가게에 별별 것들이 다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살폈다. 주된 상품은 검인 듯했다. 넓고 큼지막한 대검부터, 자그맣고 날카로운 단검까지. 이따금 벽에 걸려있는 화려한 디자인의 활이 내 시야를 사로잡기도 했다. 활이라, 총과 같은 화약을 사용하는 무기가 없는 이 세계에서 활도 퍽 괜찮은 무기일지도 몰랐다.

"무슨 일로 오셨소?"

이거 원, 대장간에 어울리지 않는 손님이구먼. 껄껄 웃으며 한 여성이 다가왔다. 근육이 보기 좋게 자리 잡은 팔뚝이 눈에 들어왔다. 와, 멋있다. 하는 감탄사를 속으로 흘리며 나는 빙긋, 웃어 보였다.

"의뢰를 몇 개 맡기고 싶어 찾아왔어요."

"아, 의뢰. 어떤 걸 원하시오?"

"음, 괜찮다면 따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나는 내 뒤에 서 있는 에반 경을 흘긋거렸다.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대장장이가 알만하다는 듯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이윽고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며 두꺼운 장갑을 벗어던진 그가 가게에 딸린 자그마한 문을 열며 손짓했다.

"귀한 손님을 대접도 않고 세워둘 순 없는 법이지요. 들어오시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공녀님, 잠시…!"

"경은 여기서 기다리도록."

"예? 하지만,"

"어허! 의뢰인이 아니라면 여기서 기다리시오! 내 작업실을 아무에게나 공개할 수는 없는 법이니!"

대장장이의 호통소리를 끝으로, 에반 경의 눈앞에서 닫힌 문을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니까 꼭 기사를 괴롭히는 못돼먹은 주인이 된 것 같은데 말이야. 휴게실로 보이는 공간에 자리한 소파에 앉을 것을 권하는 대장장이에 나는 천천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윽고 퍽 익숙한 솜씨로 따뜻한 물에 차를 우려낸 대장장이가 내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조심스레 찻물을 입에 머금었다.

"그래서, 어떤 걸 만들려고 그러시오? 검? 아니면 활? 애인에게 줄 선물인가?"

"흡, 컥,"

울컥, 찻물을 뱉어낸 내가 쉴 틈 없이 기침을 했다. 대장장이가 퍽 당황한 낯빛을 띄우는 것이 보였다. 아이고, 괜찮소? 하며 건네는 손수건을 사양 않고 받아들이고는 그걸로 입을 가린 채 잔기침을 몇 번 뱉어냈다. 아니 그보다, 뭐? 애인? 설마 에반 경을 말하는 건가? 기침이 잦아들고 의아함을 가득 담은 채 대장장이를 바라보자, 여인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밖에 있는 호위 기사가 애인 아니었소?"

"그럴, 그럴 리가요…."

"아, 실례했구먼. 난 또 애인에게 몰래 선물이라도 쥐여주려는 줄 알았지 뭐요."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며 소파에 걸터앉는 대장장이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공녀와 호위 기사라, 얼핏 보기에 그만큼 로맨틱한 관계가 없었다. 실제로, 현대에는 그들을 등장인물로 한 로맨스 소설이 한두 권쯤 있으니까. 지금 나와 에반 경의 모습도 그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물론, 내 인생의 장르는 로맨스가 아닌 판타지 액션이 되어버린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그럼 의뢰할 물건은…, 아가씨가 쓸 거요?"

"그렇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아하, 그렇다면 단검류는 어떻소? 아니면 티타늄을 섞어 만든 장검도 있긴 합니다만."

"아니,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대장장이의 표저에 의아함이 맴돌았다. 그럼, 의뢰하고자 하는 게 뭐요? 하는 그 물음에 나는 씩 웃으며 물었다.

혹시 자네, 검이나 활 말고 다른 걸 만들어볼 생각이 있는가?"

책에서 본 바에 따르면, 북부의 대장장이들은 명예를 중시한다. 사회적인 명예 뭐 이런 것이 아니라, 대장장이로서의 명예. 동시에, 본인의 작품이 남들의 작품보다 더 뛰어나길 바라는 욕구. 그렇다면, 그들에게 생소하지만, 만들어내기만 한다면 최상의 성능을 뽐낼 수 있는 무기의 도안을 제공한다면? 그 성공으로부터 얻는 명예는 자신의 것이 될 것이고, 승부욕이 강한 이들이기에 그걸 남들과 쉽게 나누지 않을 테니 비밀을 지키는 것 또한 쉽지 않을까? 그렇기에 나는 대장장이의 골목 중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이 대장간을 찾았다. 가장 외진 곳에 있는 탓에, 누구보다 명예에 목말라 있을 대장장이를 찾아서.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는 여인에, 나는 품 속에 잘 넣어두었던 종이 몇 장을 꺼내들었다.

"내가, 이런 걸 좀 만들어볼까 하는데 말이지."

/

'공녀님이 달라지셨다.'

에반이 생각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에 대해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었으나, 예전과는 퍽 달라진 행동거지를 보이는 공녀님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었다. 아니, 사실은 소공작님의 언질이 없었다면 공녀님께서 달라지셨는지, 예전엔 어떠셨고 지금은 어떠신지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자신은 소공작님을 따르는 기사지, 공녀님을 따르는 기사는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에반은 공녀의 달라진 분위기를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달리 말하자면, 아주 조금이라도 공녀님께 신경을 쓴다면, 그 누구라도 알아볼 정도로 공녀님께서 달라지셨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에반은 제 눈앞에서 닫힌 문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며 제 주인인 진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에반, 리아를 잘 감시하도록 해. 절대 혼자 있게 두지 말고."

"예, 예? 감시라뇨…."

"…리아가 달라졌어."

모르겠어? 하는 소공작님의 물음에 자신이 무어라 대답했더라, 공녀님의 달라진 점을 몇 개 떠올려보려 끙끙거리다 결국 잘 모르겠다는 대답만 내놓았던 것 같다. 에반은 허름한 대장간을 서성거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원래의 공녀님은 어떤 분이셨더라? 밝고, 다정하시고, 그리고…,

덜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에반은 저도 모르게 기합을 준 채로 문을 응시했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띤 채로 율리아가 대장장이와 이야기하며 나오고 있었다.

"바쁘겠지만, 최대한 빨리 만들어주었으면 해요."

"당연하지요, 얼마 안 걸릴 겁니다. 도안이 이미 완벽하게…,"

"아무튼, 부탁할게요. 계약서는 내가 잘 보관하도록 하고. 에반 경,"

"네, 공녀님."

"이만 돌아가도록 해요. 그리고…,"

"예?"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요, 하는 율리아의 말에 대장장이가 조심히 가시라며 인사를 건넸다. 입꼬리를 들어 올릴랑 말랑하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율리아가 대장간의 문을 열고 나섰다. 투박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원래의 공녀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자신할 수는 없었으나, 에반은 비로소 한 가지는 깨닫게 되었다.

"경, 안 와요?"

눈빛이 달랐고, 눈동자에 담긴 수많은 감정들이 달랐다. 오직 이 세상의 밝은 면만을 담아놓은 것 같은 눈을 가진 공녀님이셨는데, 지금 제 앞에 있는 공녀님의 눈빛은 어떠한가,

"…에반 경?"

에반은 율리아의 부름에 예? 하는 얼빠진 소리를 내고 나서야 걸음을 옮겼다. 긴장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제 옷에 닦으며 에반은 생각했다.

공녀님께서 달라지셨노라고.

/

에반 경이 이상하다.

아까부터 어딘가의 나사가 하나 빠지기라도 한 듯,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는 것 하며,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던 목청은 어디 가고 자꾸만 에? 예? 하는 얼빠진 소리만을 내뱉는 것이었다. 많이 피곤한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힘들거나 피곤한 기색은 전혀 없어 보여, 나는 알쏭달쏭 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간에, 오늘 목표로 했던 대장간에서의 계약은 성황리에 이루었기 때문에 나는 지체 않고 진이 있을 여관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물론, 돌아가는 길에 새 로브를 몇 개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와서는, 그대로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일전의 골목길에서의 추격전 때도 그러더니, 오늘 북부의 거리를 조금 오래 걸었던 것만으로도 쉽게 피곤해지는 걸로 보아 율리아는 평소에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것 같았다. 아니고서야 그거 조금 걸었다고 두 다리가 퉁퉁 부어오를 수는 없는 법이니까.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도, 품 속에 잘 챙겨두었던 종이 한 장을 꺼내드는 내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걸려있었다. 로시아, 아까 그 대장장이의 이름이 유려한 필기체로 쓰여있었다.

'계약 성공이다!'

로시아는 내가 밤을 새워 그려온 총의 도안을 보더니 대번에 계약을 하겠노라 선언했다. 이렇게 완벽한 도안은 본 적이 없다며 어찌나 환호성을 질러대던지, 내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라 제 색을 찾을 수 없게 될 정도였다. 아무튼 그와의 계약은 만족스럽기 그지없는 계약임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뿐인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실상 이게 가장 큰 문제이긴 했다. 히든 퀘스트야 뭐, 제한 시간도 없겠다, 때 되면 어련히 기억나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쳐도 이건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문제였다.

[서브 퀘스트 : 조력자]

특수 퀘스트

튜토리얼을 끝내지 못한 당신을 위해

특별한 '조력자'를 소개합니다.

메를린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메인 퀘스트'를 비롯한

다양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이 시스템이 적응해야 합니다.

해당 인물을 찾아내고,

조력자로서의 협력을 받아내십시오.

성공 보상 : 조력자 1인

<인물>

이름: ???

나이: ???

직업: ???

해당 퀘스트는

퀘스트 완료 시까지 진행됩니다.

*힌트 사용 가능 횟수 : 2 회

미친 게임아…. 나는 지끈대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