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GAME[연재중단]

17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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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G에이그리고

17번

W. 설하

"…민윤기?"

"많이 다쳤네."

허공에 떠있던 나를 품에 받아들며 그가 중얼거렸다. 그의 품에 온전히 안기고 나서야 내 몸을 떠받들고 있던 검은 안개들이 흩어졌다. 저게 그 혼령이라는 건가. 땅바닥에 무사히 발을 붙이고 일어선 뒤에야 상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네크로맨서, 혼령과 원혼을 다루는 그가 그 혼령들을 통해 검은 호수로 떨어지던 나를 받아냈다는 사실을. 저 멀리서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전정국과 김태형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율리아!!"

"야! 너 괜찮아?!"

사색이 된 그들을 보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아, 죽을 뻔했구나. 그런 생각이 듦과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휘청이던 나를 가볍게 받아든 민윤기가 눈짓으로 누군가를 불러냈다. 그제야 이 동굴을 찾아온 것이 민윤기 혼자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아이고 발바닥이…, 치료부터 해야겠네요."

정호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발바닥? 의아함에 발을 내려다본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괜히 봤다, 괜히 봤어. 벌겋게 달아오른 발등부터가 심각해 보였지만, 발바닥은 더했다. 살갗이 벗겨진 건 물론이고, 검은 호수의 액체가 닿은 곳마다 살이 자글자글 익어가고 있었다. 원래 알고 나면 더 아픈 법이라고, 그제야 발바닥의 통증이 격심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스치듯 닿은 것만으로도 이 정돈데, 저기 빠졌다가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 같아 괜스레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호수로부터 꽤 떨어진 곳에 민윤기가 날 내려놓음과 동시에 정호석이 내 발목을 잡았다. 조금 아플지도 몰라요, 하는 그 말에 나는 눈을 꽉 감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핏줄이 돋아날 정도로 꽉 쥔 내 손을 누군가가 감싸오는 것이 느껴졌다. 따뜻했다.

서머너, 흔히들 마법사라 불리는 이들은 대부분 강력한 마법을 통한 공격 마법을 익히는 것을 선호했지만, 정호석은 어째서인지 치유 쪽 마법을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했다. 누군가를 해치는 것보다 누군가를 돌보는 것이 더 익숙해서 그런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어쩐지 그의 유순하고 부드러운 성격과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조금… 느낌이 이상할지도 몰라요."

"…괜찮아요."

치유 마법은 일전에 딱 한 번 받아본 적이 있었다. 내가 막 '율리아'의 몸에 들어왔을 때, 한 달쯤 정신을 놓고 있다 막 정신을 차렸을 때 즈음, 엉망이 된 몸 상태를 알아차린 오르테 공작이 치유 마법사를 불러 나를 진단하게 한 것이었다. 그때의 감각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나로서는 정호석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치유 마법은 본디 무언가를 낫게 하는 마법인데, 정호석의 마법은 그것과 미묘하게 다른 것 같았다. 이를테면, 상처가 나기 이전의 상태로 시간을 되돌린다던가-, 하는.

내가 다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 것을 잘도 알아낸 정호석은 어깨는 물론이고, 몸 곳곳에 자리 잡은 자잘한 상처들까지 전부 치료해 준 뒤에야 나를 놔주었다. 몸 상태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전정국과 김태형의 부상도 만만찮은지라, 정호석은 내 치료가 끝난 뒤 바로 전정국과 김태형의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떻게 왔어?"

꽉 잡힌 손을 내려다보다 내가 물었다. 민윤기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대답했다. 혼령들이 알려줬어.

"아니, 아카데미는 어떻게 빠져나온 건데?"

"…몰래."

그 대답에 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일이 커져버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게임 내에서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야."

형형한 진의 눈빛을 받아내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죽다 살아난 동생한테 참 너무한다. 물론 진짜 동생은 아니었지만 우선은 겉가죽이 그 동생이라는 점에서. 아카데미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마주해야 했던 사람은 교관도, 담당 교수도, 교장도, 심지어는 이사장도 아닌, 잔뜩 화가 나 이마에 핏대를 세운 진의 모습이었다. 단단히 뿔이 난 모습에 나는 물론이고 함께 있던 전정국과 김태형마저도 바싹 긴장했더랬다. 그런다고 노기 어린 진의 호통을 피해 갈 순 없었지만.

"율리아."

"…아니, 이건 내가 의도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있었던 일은 모조리 다."

"……."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해야 할 거야."

당연히, 별일 아니었다는 둥의 말은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 내가 의도한 상황이 아니라는 말 또한 귓등으로 듣고 넘긴 진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숲에서 길을 잘못 들었을 뿐이야. 서식지 근처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숲 깊은 곳까지 들어가 버려서…"

"그래서 거지꼴로 돌아왔고,"

"…그건 숲에서 밤 좀 새다 보면…"

"그러다 어깨를 다쳤고."

"그건…."

"죽을 뻔했고."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니, 안절부절못하며 이쪽을 바라보는 정호석이 보였다. 너구나, 진한테 죄다 일러바친 놈이. 나는 형형한 눈빛으로 정호석을 한 번 노려봐주고는 고개를 돌렸다. 물론, 진의 앞에서야 정호석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내 눈빛은 쥐 죽은 듯 얌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죽을 뻔했다는 진의 말에 너무 과한 표현이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엄연한 사실이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민윤기가 없었더라면, 내가 그 검은 호수에 빠져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거란 사실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진은 한동안 내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아무리 학과 실습이래도 너무 무모한 행동을 하면 안 된다, 위험한 일은 제발 하지 말아라, 이런 일이 한 번만 더 생긴다면 영지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하는 둥의, 그런 류의 잔소리들. 지은 죄가 있기에 나는 그의 걱정 어린 잔소리들을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난 저 형님 너무 무섭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내내 김태형이 중얼거렸다. 하긴, 평소 잘 웃고 다니던 진이었기에 더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살기 그 비스무리한 것을 내뿜는 진은 내가 봐도… 엄청나게 무서웠으니까.

이제는 아지트가 되어버린 A210호에서 우리는 다시 모였다. 하룻밤 새 꼬질꼬질해진 옷을 벗어던지고, 뽀득뽀득 소리가 날 정도로 씻은 뒤 이루어진 만남이라, 방금 전까지 진창을 굴렀다고는 믿기지 않을법한 모습들이었다. 나는 멀쩡해진 이들이 앉아있는 소파의 구석에 몸을 기댔다. 졸음이 몰려왔으나, 아직 자기엔 일렀다.

[메인 퀘스트 : 수색]

보상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가장 먼저 한 일은, 이전과 달리 지체 없이 정산된 보상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근원을 파괴하자마자 보상 정산이 완료되었다는 알림 창이 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미뤄두고 있던 차였다. 익숙하게 'Y'를 누르자, 알림 창의 내용이 변했다.

[메인 퀘스트 : 협력]

플레이어 : 율리아 비안 오르테 / ?혜?

-수령 가능한 보상이1개 있습니다.

<보상 목록>

· 스킬 : 집중 포격

1개의 보상을 수령하시겠습니까?

또 스킬이다. 일전 '협력' 퀘스트에서 수령을 실패했던 스킬이었다. 망설임 없이 보상을 수령을 선택하자, 일전의 것과 비슷하게 생긴 돌 하나가 손에 나타났다. 집중 포격, 수많은 선들이 하나의 점으로 모여드는 듯한 빛나는 선들이 마구 그어진 돌이었다. 손에 힘을 주자, 돌이 바스러지며 희끄무레하던 빛무리가 선명해졌다. [스킬 : 난사] 때와 같았다.

[알림]

[스킬 : 집중 포격]을 획득합니다.

[직업 전용 스킬 : 집중 포격]

단일의 적군에게 치명타의 일격을 가합니다.

-패시브 스킬 : 명사수

에 의해 명중률이 상승합니다.

-패시브 스킬 : 불릿 부스트

에 의해 공격 속도가 10% 상승합니다.

-패시브 스킬 : 인피니티 불릿

에 의해 마력탄의 개수가 무한대로 설정됩니다.

"스킬석? 새 스킬 받았어?"

"아, 응."

손바닥에 약간 남아있는 스킬석의 잔해를 매만지며 김태형이 물었다. 내 긍정의 대답에 김태형이 씨익 웃으며 손에 쥐고 있던 것을 흔들어 보였다. 스킬석이었다. 드디어 자기도 공격 스킬이 나왔다며 좋아하는 그 모습을 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전정국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 또한 새로운 스킬을 받은 듯싶었다. 멀뚱하게 앉아있는 것은 민윤기와 정호석뿐이었다.

"너희들은, 진즉 퀘스트를 해결했다고?"

"응."

내 말에 민윤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심지어는 비교적 쉬운 퀘스트였단다. 나와 김태형, 그리고 전정국이 수행해야 했던 퀘스트와는 다르게, 그저 물건 하나만을 찾으면 되는 아주 간단한 퀘스트였다고. 처음에야 퀘스트 난이도가 뭐 이렇게 불공평하냐며 불평불만을 쏟아내던 우리였으나, 정호석과 민윤기의 퀘스트 내용을 듣고 난 뒤에는 눈을 끔뻑이며 그들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쉬웠다고?

"아카데미의 자료 열람권을 찾아오라는 퀘스트였는데…, 위치가 시시각각 변하길래 확인해 봤더니 고위 교수들만 가지고 있는 것 같더라고."

"……."

"그렇다고 교수들한테 찾아가서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그냥 훔치기로 했어."

"……."

"보안이 그렇게 삼엄하진 않아서 쉽게 해결했어. 정호석이 보안관을 재우고, 내가 혼령들을 시켜서 열람권을 찾았어. 뭐, 그게 다야."

요컨대 고위 교수의 연구실에 직접 들어가 물건을 훔쳤다는 소리였다. 아카데미의 교수진들은 원래 세계의 대학교수들처럼 각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기 때문에 그 연구 결과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출입을 꽤 철저하게 단속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결코 보안이 삼엄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인데,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있는 민윤기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 방법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우리에겐 좋은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서.

그래서 그 열람권이 뭔데? 김태형이 팔짱을 끼며 묻는 말에 민윤기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주머니에서 꺼내든 것은,

[메인 퀘스트 : 자료 찾기]

필수 퀘스트

[메인 퀘스트 : 수색]을 완료하였습니다.

연계 퀘스트로의 진입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연계 퀘스트가 자동 부여됩니다.

당신과 협력한 플레이어 중 누군가가

아카데미의 [자료] 열람권을 획득했습니다.

[자료] 열람권의 사용처를 찾아내

아카데미의 [자료]를 열람하십시오.

'이상 현상'에 대한 자료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성공 보상: ???

군데군데 녹이 슨 열쇠 하나였다. 그와 동시에 뜬 퀘스트 창에 몸이 움찔거렸다. 그놈의 [자료]가 뭐라고, 협력 때부터 꾸준히 언급되는 그 [자료]에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 열쇠를 살폈다. 화려한 생김새와는 다르게 낡을 대로 낡은 열쇠였다.

"저희도 저희 나름대로 열쇠의 사용처를 찾기 위해 아카데미를 다 뒤져 봤지만, 딱히 열쇠가 쓰일만한 곳이 없었어요."

"아카데미가 아닌 다른 장소에 있는 거 아닐까?"

"그건 아닐 거예요. 자료는 '아카데미'의 자료라 했고, 이 열쇠도 고위직 교수들만이 가지고 있는 걸 보면 아카데미 안에 있는 게 맞아요."

정호석, 그리고 민윤기는 우리가 실습에 가 있는 동안 아카데미 내부를 쥐잡듯 뒤져보았다고 한다. 각 교실부터, 이제는 쓰지 않는 별관까지도. 열쇠의 모양이 요즘 사용하는 여타 다른 열쇠들과는 다르게 크레아 왕국 시절에나 쓰던 열쇠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더 짐작 가는 곳이 없다 했다.

"기숙사는 일부러 생략했어. 열쇠의 존재 자체를 고위 교수진들만 알고 있는데, 그 장소를 기숙사에 굳이 만들어놓은 것 같진 않아서,"

민윤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들로부터 무언가를 숨기려 하는데, 그 장소를 학생들의 가장 가까운 곳인 기숙사로 정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질 않는 일이었다. 수색 범위에서 기숙사가 제외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정호석이 아카데미의 지도를 펼쳐들었다. 이미 갔다 와본 장소에는 X 표시를 해두었다고 했다. 메를린 아카데미가 대륙 내에서도 꽤나 큰 편에 속하는데, 그 아카데미의 3분의 2 정도에 X 표가 쳐져 있는 것을 보고 나는 혀를 내둘렀다. 실행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무튼 지도에서 X 표가 쳐지지 않은 곳을 나열해보자면 이러했다. 교수 연구동, 아카데미 서관이 전부였다. 어쨌거나 범위가 대폭 줄어든 셈이었다. 좁혀지는 범위를 보며 전정국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내가 알기론 이곳에 금서 보관소가 있다."

기다란 손가락이 X가 표시된 도서관의 지하, 그 아래쪽을 콕 집어 가리켰다. 지하와 금서, 꽤 그럴듯한 조합에 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전정국을 바라보았다.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이가 많지. 이 지도에도 따로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만 봐도 그렇지 않나."

"…도서관의 지하는 이미 갔다 왔어. 고서를 보관하는 장소라 열쇠구멍 따윈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나는 그 지하의 아래쪽을 말하는 거다."

전정국의 말에 민윤기가 입을 꾹 다물었다.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김태형이 물었다.

"진짜건 아니건, 난 지금 이 제국의 황태자 신분이니까."

"…아,"

"이곳에 오기 전에 아카데미에 대해 알아봤다. 황족만 접할 수 있는 자료에는 숨겨진 사실들까지 죄다 적혀있기 마련이라,"

"……."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

확실히, 하며 김태형이 긍정의 대답을 내뱉었다. 황태자로써 접근하는 정보들이 우리가 접하는 정보들보다 한 수 위의 것이라는데는 이견이 없었기에 나는 지도에 올려진 전정국의 손가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무조건 금서 쪽으로 가야겠네, 하는 내 말에 나머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금서 보관소의 입구를 알고 있어? 내 혼령들은 도서관의 지하에 또 다른 문은 없다고 했어."

그 말에 전정국이 끄덕였다. 물론, 알고 있다.

"문이 아니라 네 혼령들이 찾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문이 아니라니?"

"금서는 마땅히 숨겨야 할 존재들이지.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극형에 처해질 수 있는 게 금서다. 너 같으면 그 금서들이 있는 '입구'를 남들에게 보이고 싶어 할 건가?"

"입구를 숨겨놨다는 뜻이겠네."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입구를 문이 아닌 다른 걸로 막아두었을 뿐이다."

"…뭘로?"

그 물음에 전정국은 퍽 장난스러운 웃음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건, 가서 확인해보는 편이 빠를 거다, 하는 말은 덤이었다.

/

느지막한 새벽이었다. 해가 뜨기까지 겨우 몇 시간 전, 잠깐이나마 짧은 잠을 청한 우리는 이른 새벽부터 기숙사를 나섰다. 목적지는 당연하게도 도서관. [자료]의 가장 유력한 위치를 알아냈으니 굳이 지체할 필요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당장 움직이기엔 죄다 녹초가 된 탓에 잠시간의 휴식은 필요했지만.

자박, 자박하는 다섯의 발걸음 소리가 텅 빈 아카데미의 복도를 울렸다. 얼굴을 꽁꽁 가린 로브를 더 깊게 눌러쓰며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경비를 교체하는 시간대를 노렸다고는 했지만, 언제 어디서 누군가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기숙사에서 도서관은 아카데미의 끝과 끝에 가까웠기에, 우리는 먼 길을 걸어야만 했다. 이미 도서관에 한번 갔다 온 민윤기와 정호석이 앞장서고, 그 뒤를 나와 김태형, 전정국이 따랐다. 대화 한 줄 없이 고요한 행진이었다.

"…생각해 봤다."

"…뭐를?"

목소리를 한껏 낮춘 전정국이 말했다. 부러 걸음을 늦춰 일행과의 거리를 벌리는 그에 나 또한 그에 맞추어 걸음을 늦추었다. 앞의 셋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나는 전정국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네가 동굴에서 했던 말, 있잖나-,"

"아…,"

"처음엔 도통 무슨 소린지 몰랐다. 내 몸뚱이만 카일로스일 뿐, 내면은 전정국이라는 사람이 들어앉아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

"네 말을 곱씹어 보다, 깨달은 게 하나 있다."

전정국이 숨을 골랐다. 그의 목울대가 격하게 움직였다. 긴장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잘 들어라, 어쩌면 이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뭐길래 그렇게 뜸을 들…,"

"내가, 전정국이었던 시절의 기억을 잊어가고 있는 것 같다."

"……."

"아니, 잊어가고 있는 것 같은 게 아니라 확실히, 잊어버리고 있다."

…뭐? 나는 느릿느릿하던 걸음을 완전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세 걸음을 앞서나간 전정국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갔다. 뒤를 돌아본 전정국이 기다란 손가락을 제 입술 위로 가져다 댔다. 목소리를 낮추라는 뜻이었다.

"동굴에서, 너는 어릴 적의 일부터 꽤 최근의 일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했지."

"…그랬지."

"그게 난 안된다. 비유하자면 그래, 누가 그것들을 지우개로 지우는 것처럼 점차 희미해지다, 종국엔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는 거다."

"……."

"그리고 그 공백이 카일로스의 기억으로 채워진다. '전정국'의 기억이 '카일로스'의 기억으로 바뀐다고 보면 되겠군."

무언가를 말하려 입술을 달싹거린 것도 같은데,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전정국이 '전정국'과 '카일로스'를 혼돈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실상은 그것보다 더 심했다. 아예, '전정국'이 '카일로스'에 묻혀 사라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제야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말투와 행동을 떠나, 그가 이 세계에 대해 퍽 잘 안다는 듯 말했던 것도, 또, '전정국'이라면 절대 몰랐을 것들을 알고 있는 것도. 어쩌면 이 금서 보관소도 '전정국'의 기억이 아닌 '카일로스'의 기억에 의해 알게 된 것일 수도 있단 생각까지.

"하나만 물어보지, 넌 '율리아'의 기억이 단 한 줄이라도 존재하나?"

전정국의 물음에 나는 기억을 더듬거렸다. 그러나 기억나는 것들은 죄다 내가 율리아가 아닐 때의 기억일 뿐, '율리아'의 과거라던가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일말의 기억조차 없었다. 내 반응을 확인한 전정국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내 예상이 맞다면, 너는 아마 예외일 것이다."

"어째서?"

"예전에 네 상태창을 내게 보여준 적이 있지. 물음표투성이던 그 상태창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협력' 퀘스트가 끝나갈 때 즈음, 전정국을 9할쯤 신뢰하게 되고 나서 그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상태창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더불어 시스템에 대해서까지 죄다 말했었지.

"그리고 히든 퀘스트도,"

"맞아. 이름에 대한 거였지."

"…율리아, 네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으니 말해주겠다. 네 상태창을 열어봐라."

상태창, 속으로 단어를 중얼거림과 동시에 눈앞에 새파란 창이 떠올랐다. 여전히 물음표투성이인 그것을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언제 정상으로 돌아오려나-, 하는 생각과 함께 전정국을 올려다보았다. 퍽 복잡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는 그가 보였다.

"네 히든 퀘스트는 이름 세 글자를 모두 기억해 내는 것이 아닌가?"

"맞아."

"율리아, 상태창을 잘 봐라."

"…?"

"네 이름 옆에, '혜'라는 글자가 있지 않나."

"…!"

[플레이어 : 율리아 비안 오르테 / ? 혜 ?]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바본가, 왜 이걸 여태 눈치채지 못했을까. 물음표는 그렇다 쳐도, '혜'라는 단어는 분명 이름을 뜻할 것인데. 나는 급하게 히든 퀘스트 창을 열었다. 하지만 [조건]의 상태를 본 나는, 어? 하는 얼빠진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히든 퀘스트 : 이름을 잊은 자]

·

·

·

[조건]을 충족시킬 때마다

이름의 한 글자가 주어집니다.

모든 글자들을 찾아

당신의 이름을 찾아내십시오.

[조건 1] 오류 / 조회 불가

[조건 2] 오류 / 조회 불가

[조건 3] 오류 / 조회 불가

[조건 2]는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처음과 다를 게 없는 그 퀘스트 창. '혜'가 마땅히 내 이름의 중간 글자라면, [조건 2]가 클리어 되던, 뭐든 변화가 있어야 할 터.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보이질 않는 상태창, 이것이 뜻하는 바는-,

"억측일지도 모르지만, 원래 '율리아'의 몸에 들어와야 했던 사람이 네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

"율리아의 몸에 들어가야 했던 사람의 이름에 '혜'가 들어가고, 네 이름에 '혜'라는 글자가 없다면, 충분히 의심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

"아마 김태형, 민윤기, 그리고 정호석까지, 원래의 기억을 잊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 본인조차 깨닫지 못한 것일 뿐. 나도 네가 말하지 않았더라면 평생을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겠지."

나는 멍하니 앞서 걸어가는 세 명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모두가 원래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잊어버린다고? 그럼 나는? 어째서 나만 예외인 것일까-,

"너만 예외다, 율리아. 어쩌면 이 세계에서 네가 변수로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허, 어이가 없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였다. 네가 변수고, 내가 시스템이 의도했던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

"시스템을 너무 믿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전정국이 말했다. 나는 멍한 눈빛으로 상태창을 껐다. 도서관 건물의 입구에서 나와 전정국을 기다리는 셋의 모습이 보였다. 저 셋도 기억을 잃는다면, 남는 건 나 하나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나는 부러 눈을 크게 치켜떴다.

"걸음이 왜 그렇게 느리냐,"

"……."

"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저쪽이에요, 빨리 가는 게 좋을 것 같-,"

그와 동시에 내 머리는 빠르게 돌아간다. 이 상황에 대해, 그리고 시스템이 했던 말들에 대해. 자그마한 퍼즐 조각들이 제 알아서 차곡차곡 맞춰지는 것 같았다. 그림의 한구석, 아주 작은 부분의 퍼즐이 맞춰졌다.

[네 시스템 자체에 누군가가 개입해서 '오류'를 만들어낸 것 같아.]

[누군가가 그 '메인 퀘스트'를 다루는 시스템에 접근했어.]

[나를 해킹하는데 성공하게 되면 '메인 퀘스트'를 마음대로 부여할 수 있게 되거든.]

[그 권한을 이용해서 그놈이 '그분'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너희들에게 퀘스트를 부여한다면?]

도서관의 지하로 걸음을 옮기며 나는 생각했다. 어쩐지 이 모든 일을 일으킨 범인이 누군지 알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메인 퀘스트 : 협력]

필수 퀘스트

·

·

·

제외된 플레이어: 1












현생이 바빠 슬픈 설하,,,